해인사의 산내암자 - 가야산 최초의 가람 원당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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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3년 04월 134호
큰절 대적광전 앞에 서면 아름다운 비봉산이 보인다. 그 아늑한 자리에 가람을 이룬 원당암은 해인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암자이다.
해인사 대가람을 창건하려고 기초 작업장으로 세운 원당암의 본디 이름은 봉서사 鳳捿寺 였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당시 신라 40대 애장왕은 봉서사를 짓고 이곳에 머물면서 해인사 대가람을 이루는 한편 이곳에서 정사 政事를 돌보았다. 해인사 인근에는 세 명의 정승이 살았다는 삼정 三政을 비롯하여 절 앞의 옥가평 獄街坪, 극락전 동쪽의 어수정 御水井, 서쪽 십리 밖에 있는 마을인 마장 馬場들이 있는데, 그 지명으로 오늘날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해인사 창건과 왕실은 꽤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역사적인 상황으로 볼 때 과연 애장왕이 친히 이곳까지 와서 공사를 감독하고 정사를 돌보았다고 보기에는 여러 면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애장왕은 그 무렵 열여섯 살의 어린 소년에 불과했고 그의 숙부 언승 彦昇이 섭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때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전설의 근거는 40대 애장왕과의 전설이라기보다는 51대 진성여왕과 해인사의 관계에서 그 전설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진성여왕과 연인 관계였던 각간 角干 위홍 魏弘이 서기 888년에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그 원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진성여왕은 즉위 11녕인 897년에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해인사에 머물다가 12개월에 돌아가서 황산에 장사지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황산은 해인사 가까이에 있는 야산이다. 진성여왕은 연인의 원찰이었던 해인사에서 연인의 명복을 빌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묻히기를 원하였다고 하니 그 뜨거운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알려졌던 해인사의 신라 왕실과의 관계, 애장왕과의 관계를 다시 조명해야 한다.
해인사의 원당암은 언제부터 봉서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원당암이란 암자명을 가지게 되었을까? 해인사 사간장 寺刊藏 가운데에 고봉화상 선요 禪要 끝에 ‘홍치弘治 십사년 十四年 신유추유일 辛酉秋有日 경상도 慶尙道 합천공陜川工 가야산 伽倻山 봉서사 鳳捿寺 개판 開板’ 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지금의 원당함은 적어도 홍치 14년인 연산군 7년 서기 1501년까지는 해인사에 부속된 암자가 아니라 독립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누구의 원당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원당암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라 생각된다.
개략적으로 원당암에 머물렀던 스님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원당암은 조선조 세조 때의 학조대사가 오래 머물던 곳으로서 우룡대사가 철종 3년 서기 1852년에 중수하였으며 1874년에는 성주 비구니가 크게 중수한 기록이 있고, 최근에는 혜암 큰스님이 주석하여 전 가람을 일신하였으며 한편으로 토요일이면 경향 각지에서 참선 수련을 하려고 불자들이 몰려들어 선열(禪悅)의 구도장 이라고도 할 만하다.
오랜 역사를 지닌 원당암은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귀중한 유물과 유적이 전해져 오는데, 보물 제51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점판석의 다층탑과 석등, 그리고 정교하게 인상(目象)을 넣은 금당의 축대석이 있다.
점판석 다층탑은 소공예적인 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한 신라 말기의 것으로 이러한 소탑이 다른 곳에도 몇 기 있지만 원당암의 이 탑은 그 가운데서도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보존되어 있는 퍽 중요한 유물이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약 240미터인 소탑으로 현재 보광전 바로 앞 좌우의 석등과 배례석을 나란히 하여 서 있다.
3매의 화강석 기단 위에 다시 점판암으로 방형대석(方形臺石)을 놓았으며 그 대석은 복변複辨의 연화를 한 면에 각각 5엽씩 부조했으며, 그 위에 다시 방형으로 1면 7엽의 한 잎씩의 앙연(仰蓮)을 새겨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따라서 갑석의 두툼한 복변복련(複辨覆蓮)과 더불어 그 위의 단변앙련(單辨仰蓮)이 상하에서 잘 조화되어 더욱 정취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소탑이다. 이러한 양식의 소탑은 대체로 구세기 후반의 것으로 이는 진성여왕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등 역시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아주 희귀한 것이다. 특히 석질이 약하여 잘 부서지는 성질이 있는데도 이처럼 잘 보존되어 있다.
기품이 무척 우아하면서도 높다란 간석(竿石)을 이용하여 단조로움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지대석은 옆의 청석탑과 같은 화장석으로 육각을 유지하고 있다. 지대석 위에는 점판석으로 부조된 육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복련의 꽃잎은 12잎을 나타내었고 간주(竿柱)는 육각을 유지하여 128센티의 단조로우면서 간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탑의 바로 옆에 배례석이 놓여 있다. 크기는 93센티, 폭은 47센티, 높이 33센티로 돌 하나로 조성되었다. 지대(地臺) 위에 2단의 괴임 장식을 나타내었고 전측에 각각 두 측면 1구의 안상(眼象)을 보여 도합9구의 안상을 나타내고 있다. 상부 판석 중앙에는 자방(子房) 직경 7.5미터, 전폭 22.5미터의 연화를 양각하였다.
그밖에 금당대석도 아름다운 통일신라 이후의 조각 수법을 보이며 인상과 배례석 또한 섬세한 구세기 후반 신라왕실의 두터운 후광 아래 이룩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원당암의 신축 불사들은 혜암 큰스님의 주도 아래서 이루어졌다. 새 건물인데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 규모나 짜임새가 전통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그 본디 단아함을 유지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