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공(空)의 연극론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기획연재 - 김미미 1987년 11월 69호
불교연극에 대한 어떠한 완벽한 이론도 한편의 훌륭한 불교연극 공연에 미칠 수 없다. 이는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모두 암기한다 하더라도 실제의 깨달음을 얻는 것과는 무관한 것과 같다. 그리고 근사한 이론의 수립이나 정밀한 분석이 또 하나의 견고한 틀을 만들어 자유로운 창작 행위를 그 속에 감금시켜 버리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우기 불교=종교, 불교연극=종교극이라는 대개의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장엄’이며 ‘신성’이니 하는 단어들로 한겹 더 울타리를 치고 있는 셈이다.
이번 한해에 걸쳐 불교연극에 대해 매회 외쳐대면서도 때론 어디서 어디까지를 불교연극이라 가름짓느냐로 실제의 작품 앞에 여러번 난감하기도 했다. 쉬운 예로 무대에 법당이 서고 배우가 삭발만 한다 해서 모두 불 연극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미흡하나마 필자가 내린 결론이라면, 예술이건 교리건 혹은 구체적인 실천의 방식이건 간에 모두 불교가 갖는 공(空)의 세계관, 즉 관계와 변화를 통해 이해하고 접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연극은 제반종교 중 불교라는 가상적인 영역 안에 존재하는 독특한 형식이나 내용이 아닌, 자유스럽고 왜곡되지 않은 성격을 가진 예술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적인 삶이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특수한 종류의 세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연극 역시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연극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간혹 ‘성(聖)’의 개념으로 모든 반대되는 것들을 걸러버리고 종교라는 갑옷을 입혀 예술의 한 부분 속으로 안주시키려는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입버릇처럼 경계를 외치는 서구적 개념, 서구적 발상의 단면이라 하겠다. 그들(서구의 학자들)은 신성한 것에서 종교적 관심을 느끼며 그 관심은,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신성 너머에 막연히 실재하리라 믿는 신(神)에게로 집결된다. 그러므로 신과 관련된 모든 종교행위(예술까지 포함하여)는 절대 신성, 거룩, 신비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도덕과 비도덕을, 신성과 저속을, 고와 낙을 모두 수용하는 예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 종교예술은 특수한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구색을 맞추게 된 것이다.
우리가 무심히 쓰는 ‘성루’니 ‘종교극’이니 하는 말도 이처럼 따져보면 신성 교단과 교주 중심의 철저한 서구적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일진대, 성(聖)도 속(f/)도 고(苦)도 낙(樂)도 모두 실재가 아님을 깨달으라 하시던 석가의 가르침과는 근본적으로 화합될 수 없는 발상이다. 이런 까닭에 더러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
자유로운 불교예술 행위를 저해하는 또 한 가지 요인으로 서구적 예술지상주의가 주는 문제점을 들 수 있다. 그들 예술 지상론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예술은 어떠한 사회적 목적에 봉사하지 않고 또 해서도 안되며, 예술 외적인 사실과는 어떠한 관계도 가지지 않는, 존재 자체로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 주장의 여파로 우리나라에서도 순수니 참여니 하여 그에 대한 이론들이 머리 허연 노 시인들로부터 젊은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논쟁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제 아무리 신축성있는 불교의 예술 형태도 불교라는 종교적 이름으로 인해 목적을 가지게 되고 또 일정한 봉사 대상을 가지는 등, 위의 조건에 모두 저촉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학도들에게 마치 고귀한 명언처럼 들리는 이 말도, 알고 보면, 산업혁명 이후 봉건 체제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 사회 체제로 전환될 당시 기존 예술구조에 대한 반발로 거론되기 시작한 말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굳이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신들에게 바쳐진 희랍연극의 기원을 들지 않더라도’ 불후의 명작이라 불리우는 대개의 예술들이 거의가 다 왕실이나 신에게로 향한 헌사에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사실주의 연극 사조가 연극의 전통적 뿌리가 아니라 단지 낭만주의에 반발해 생겨난 새로운 주의이듯이 예술지상주의 역시 그 뿌리는 박약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불교만 놓고 이야기하더라도 애초부터 모든 불교 예술은 왕실이나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불교가 핍박을 받던 조선 시대에도 민중은 자유로이 사찰을 드나들 수 있었는데, 그곳에는 신의 중개자로서 우리에게 은총과 죄사함을 함께 주는 사제가 아닌, 그저 수행자로서 우리와 고락을 함께 하던 승려가 있을 뿐이었다. 더우기 사찰이나 불상, 탑파, 탱화의 제작에서도 신에게 또는 왕실이나 승려들게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작 및 참여 행위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구도자적 의미가 더욱 컸었다.
여기서 불교의 모든 예술행위를 참여 또는 순수로 정당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교적 사상과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 만나는 분리될 수 없는 연기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왜곡되고 단면적이며 편협한 서구 예술론의 관점에서 해방되어 좀더 정확하고 총체적인 우리의 시각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강조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굳이 연극적 입장으로 이름짓자면 ‘공(空)의 연극론’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공’에 대해 부언하자면, ‘공’이란 단순히 비어 있음(無)이나, 또는 물질(色)에 반대되는 정신적인 개념이 아니며, 불변하는 순수 독자 영역도 아니다. 공이란 변화와 관계로써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존재양상일 따름이다. 여기서는 성(聖)과 속(俗)으로 고정화된다든지 선과 악으로 분류된다든지, 아니면 미(美)와 추(醜)로 나누어질 수 없다. 차라리 이러한 분별의 망상에서 벗어나 이 모두가 환(幻)임을 인식하는 연극적 통찰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의 연극론’은 기존의 연극이론이나 종교극의 관습이 주는 제약에서 탈피하여 이들을 더욱 폭넓게 수렴하려는 불교적 연극해방론이지, 새로운 이상적 굴레가 될 수는 없다.
차제에 이러한 ‘공의 연극론’이 존립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비교적 계보적 흐름이 분명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서구의 연극사조와 대비해 보는것도 좋은 참고가 되리라본다. 물론 서구의 연극사를 언급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이나 희랍비극, 로마희극, 그리고 중세의 종교극 및 르네상스 연극기를 간과할 수 없지만, 이는 이 글의 목적에도 부합되지 않으므로 편의상 19세기 이후에 전개된 다양하고도 풍성한 연극적 흐름에서 그 출발을 심어본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연극계는 일대 전환을 맞게 된다. 종래의 인간 정서 중심의 낭만주의 연극에서부터 좀더 사회적인 것으로 관심을 옮겨 예술가들은 사회에 뛰어들어 그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노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들은 여지껏 아련히 베일에 감춰져 있던 자연의 질서를 과학으로 풀어보려 하기도 하고 신분과 계급이라는 껍데기를 벗긴 적나라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형상화해 보기도 했다. 이는 상당히 혁신척인 움직임에는 틀림없지만, 공(空)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여전히 개혁하려는 또는 형상화하려는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고 오로지 그 의지만 전대의 ‘선(善)’ 이라든가 ‘미(美)’에서 ‘사회구조’ 또는 ‘집단’으로 전환시켜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 절대가치를 두었으며 그것만이 실재라 여겼는데,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 것이 자연주의 연극이다.
그러나 곧 그들은 자신들이 실재라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회의와 무지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와 더불어 대두된 것이 바로 상징주의 연극이다. 그들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사실주의 예술가들의 실패를 인정하며 과학적 실험이나 증명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신비한 내면 세계에의 접근을 꾀했다. 그러나 그들의 접근 역시 여전히 감춰진 어딘가에 위대한 실재가 존재하리라 믿는 전대의 태도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또한 역사의 흐름을 개혁이 가능한 하나의 거대한 실재로 보고 연극을 정치의 도구로 삼아 민중의 계몽을 꾀하려 했던 일부 사회주의 연극론자들의 입장도 변화와 관계를 말한다는 점에서 일면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과 유사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변증법적 미학체계는 존재계를 몇 가지의 기본적 실체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空)의 세계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한편,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개성을 앓고 소외된 개인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무대에 던진 부조리연극 사조가 있다. 신, 인간, 물질, 쾌락 등 어디에도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이들 움직임은 외형적으로 상당히 공의 세계관에 접근하고 있다. 적어도 그들에겐 어딘가에 막연히 존재하리라 믿는 실재에 대한 환상은 없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긍정도 부정도 없는 건조한 그들의 사고는 자칫 허무주의나 회의주의로 빠질 염려가 있다는 것이 공의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대별되는 점이다.
공(空)의 연극론 역시 실재를 거부하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 태도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라는 가상적 실재 내에 변화와 관계의 법칙을 도입함으로써 다양한 창조와 시도를 수용하는 긍정적인 방편을 갖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계몽적인 성격으로, 또는 오락화된 모습으로 얼마든지 형식을 달리하며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러한 공(空)의 연극론을 통해 오늘날 연극계가 당면한 갖가지 과제들-즉, 서구적인 것과 동양적인 문화의 접합 및 전통의 현대화 작업에 따르는 문제점, 연극적 형식을 통한 현실참여 등-에서 사회적 현실과 미학적 문제 간의 갈등 해소에 새로운 시사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