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의 창건 설화가 신비감을 부추긴 불적
‘다탑봉多塔峰’ 의 천불천탑 千佛千塔으로 알려진 화순 운주사의 불교유적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이 불적은 한 계곡에 석불과 석탑이 있는 신비감이나 토속적인 조형성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 중에서도 문인들이 저마다 작품 속에 운주사를 끌어들여 애정을 쏟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관심을 보여야 할 미술사 학계에서는 문헌 자료의 부족과 조각이 촌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이렇다 할 연구성과를 거두지 못한 실정이다. 다행히 전남대학교 박물관팀이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와 두 차례의 학술 조사에서 부분적으로나마 그 베일을 벗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충분치 못한 형편이다.
그 동안 학계의 조심스러운 연구 태도와는 별도로 문인들은 운주사에 대하여 나름대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소설가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관군에 참패한 길산이 능주로 숨어든 것처럼 암시적으로 유도하여 소설 후미에 운주사를 삽입하였다. 여기에서는 길산이 진도 등 전라도 바닷가 섬들이나 나주 일대에서 일어난 노비들과 함께 도읍지가 바뀌는 새 세삿을 꿈꾸며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실패한 통한의 장소, 곧 역모의 땅으로 설정했다. 또 최근에 발표된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에서는 황진이의 미모에 무너졌다는 지족선사를 급기야는 천불천탑을 깎고 있는 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가들의 문학적 상상력 덕택에 운주사는 여러모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장편 소설 「장길산」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임에도 고려 때에 조성된 천불천탑을 끌어들였다. 이는 「장길산」이 갖는 우리 시대 문학사적 성과에 비할 때 흠집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6세기의 지족선사를 등장시킨 「소설 토정비결」은 한술 더 뜬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다.
운주사의 불적은 많은 탑과 불상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점에서 자주 경주의 남산과 비견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운주사이 불상과 탑은 남산처럼 여러 계곡에 별개의 불사로 나뉘지 않아서 남산의 불적과는 크게 다르다. 일백여 분의 돌부처와 이십여 기의 석탑이 한 계곡에 널려져 마치 석불과 석탑의 야외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데,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유적이다. 굳이 ‘천불천탑을 세우려다 새벽 닭이 울어 공사를 중단했다’는 도선의 설황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운주사는 미완의 도량으로서 영원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못생긴 석불, 석탑이 들어찬 운주사 계곡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결같이 못생겼다. 석불의 경우 눈, 코, 입은 물론 형체 비례가 제대로 맞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정통 불상이 지닌 도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부처의 위엄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 볼 수 없다. 석탑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석 기단과 특이한 장식 무늬, 원반형이나 투가리 같은 옥개석의 석탑은 물론 판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옥개석으로 삼은 경우도 있다. 이처럼 정형이 깨진 파격미, 힘이 실린 도전적 단순미, 친근하면서도 우습게만 느껴지는 토속적 해학미, 또 그것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된 점이 운주사 불적의 신선한 감명이며 특이한 마력이다.
이런 양식적인 독특함은 왠지 역사적으로 소외된 전라도 사람들과 오랜 동안 같이 해 온 정서를 머금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다 이 형식미는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치룬 뒤 더 강렬해진 전라도 사람들의 저항 의식과 변혁 열망을 대변하거나 좌절된 심정을 달래 주는 듯하다. 또 그 집단적이면서 토속적인 단순미는 전통적 민중성의 전형으로서 1980년대 초반 문예 창작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운주사를 소설의 마무리 감으로 다룬 횡석영의 「장길산j이 바로 그 시발인 셈이다. 」
운주사는 遭舟寺, 遭柱寺, 雲柱寺, 雲住寺 등으로 불린다. 운주사가 여러 가지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 후기라는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사상(도참설)에 입각한 행주론行舟論-한반도를 배 형국으로 보고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고자 하는 풍수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나 발굴 조사된 고려 시대 암키와의 명문에 의해 확인되는 본래의 절 이름은 ‘雲住寺’ 이다. 노령의 한 줄기인 무등산이 국사봉과 화악산으로 뻗어 내려가다 보면 운주산 다탑봉에 이른다. 양쪽으로 벌어진 낮은 구릉의 산등성이사이 계곡에는 여기저기 불상과 탑이 우뚝우뚝 서 있다. 운주사의 불상은 군상이나 단독상이 각각 독립된 구조여서 한 무더기 한 무더기가 마치 야외 법당 같은 성격을 띤다. 어떤 돌부처는 몇 분씩 무리지어 암벽에 기대어 있고(여섯개의 암벽불정군), 돌집에 들어앉기도하며(석조불감안의 두 석불 죄상), 암벽면에 새긴 마애불이 있는가 하면, 산정상에 나란히 눕혀져 있는 석불 좌상과 입상(일명 와불)은 좀 색다른 배열이다.
이들 운주사의 석불은 입상과 좌상들로 여러 가지 손모습을 하고 있다. 항마인이나 아미타 구품인식 수인, 합장인, 가사에 가려진 채 가슴에 두 손을 모은수인이나 소매를 교차하는 도포식 수인 등 다채롭고도 변형이 심하다.
이 운주사 불상의 수인은 특히 최근에 본격적으로 조사된 지리산 정령치 마애불상군 중 주존과 양식적인 면에서 유사하여 주목을 끈다. 정령치 마애불상이 있는 절터도 운주사처럼 도선국사 창건설이 있어 홍미롭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자세히 다루겠다.
운주사의 불적 중에서도 중심의 신앙적인 근거는 마애여래좌상과 와불이라 불리우는 석불좌상, 입상 및 돌집 모양의 석조불감, 그리고 칠성바위이다. 두 와불은 십삼 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암반에 부처를 새기고 떨어내는 공정을 채 마치지 못한 미완성 운주사 석불의
제작방법을 추스릴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와불 입구에 서 있는 석불입상(시위불,머슴부처)은 채석자리가 와불 옆이다. 여러 문헌의 운주사를 언급한 기사에서 늘 다루어지는 것은 돌집에 서로 등을 대고 앉은 모습의 두 석불이다. 석조불감이 운주사 불적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신앙처로 주목받았던 증거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찰의 중앙에 위치하는 점이나 돌로 만든 전각 안에 두 부처를 안치하는 정성으로 봐도 알 수 있다. 많은 부분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어서 해체 복원하는 불사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가장 부처다운 모습의 마애불
이들 석불에 비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잘 언급되지 않는 숨은 명보는 대웅전 뒷켠에 있다. 운주사 불적과 일대의 풍경을 시원스레 관망할 수 있는 공사바위 바로 아래 암벽의 마애여래좌상이 명보이다. 얕은 부조아 선각으로 새긴 마애불은 운주사 계곡 안이 모든 돌부처와 석탑가 칠성바위, 그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계곡에 배치된 돌부처 가운데 대형의 주요 석불좌상들과 유사한 자태의 이 마애불은 이목구비와 화염무늬, 광배 등 다른 석불에 비하여 제법 부처로서의 도상적 형식미를 갖추었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마애불 조성 당시에는 천불천탑의 불사를 조망하도록 이 부처를 새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찌보면 이 마애불은 좌우 계곡의 석불군을 협시로
두르고 경내를 굽어보는 위치상의 중심 부처로서, 운주사의 신비를 푸는 데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할 수도 있겠다.
운주사의 석탑은 좌우 산허리에 각각 1열씩, 계곡 사이의 평지에 1열로 모두 3열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그 유형은 전통적인 방형 옥개석의 칠층과 구층 석탑이 주요 위치에 비치된 반면 유사한 예가 없는 독특한 모양의 석탑들이 눈길을 끈다. 정형을 벗어난 원반형 옥개석 석탑(연화탑)과 주판알 모양의 옥개석 석탑은 이색적인 정취를 풍긴다. 더욱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얹어 만든 석탑(동냥치 탑)이나 실패꾸리 모양의 석탑 등은 현대인의 미감으로 보아도 대단한 착상이다. 또 이들 탑신에는 몇 가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네 잎의 꽃무늬, ◇나 Ⅹ모양이 새김, 빗줄기 같은 수직선각 등은 다른 탑에서 볼 수 없는 문양이다.
한편 운주사의 석탑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리공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운주사의 탑에는 과연 사리 장치가 들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보통 탑은 한 사찰에 많아야 서너 기 정도인데 반해 운주사의 경우는 유별한 까닭이다. 1989년의 조사에서 사리공을 두 기나 발견하는 성과를 거움으로써 운주사의 석탑이 일반적인 불탑과 기능이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운주사 운주사 불적 가운데 계곡 왼편 산등성이 허리께쯤에 위치한 일곱 개의 바위가 주목을 끈다. 이 바위는 원반형 칠층 석탑의 옥개석으로 보이기도 하나 마치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의 배열 상태와 원반 지름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와 매우 흡사하여 칠성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고려 시대 불교에 수용된 칠성신앙의 사례로서 주요 유적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운주사 석탑과 석불의 제작 시기에 대한 문제를 푸는 데는 현지의 탑과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유시히 관찰해 보아야 한다. 불상과 탑의 모양새는, 크게 보면 비교적 전통성을 유지한 경우와 크게 벗어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불상에서는 크고 작은 돌부처를 암벽에 세우거나 앉힌 불상군이 이채로운 성향이 더 짙으며, 와불과 석조불감의 불상 그리고 마애불 등 각기 독립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예배상 유형이 그런대로 격조를 갖춘 편이다. 탑에서는 백제계나 신라계 그리고 전형적인 고려 탑의 면모를 갖춘 방형 옥개석의 전통시과 원반형이나 원구형의 옥개석을 쌓아 놓은 특이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불상이나 탑의 생김새 차이가 제작 시기의 일정한 경과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어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제작 시기의 문제와 최근의 발굴성과
일찍이 운주사는 도선국사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89년에 시행한 ‘운주사 종합학술조사’ 때 김동수 교수가 새로운 문헌 기록을 찾아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려 승 혜명慧明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동국여지지 東國與地志」 의 기록 ‘운주사 雲住寺 재천불산서 在千佛山西 사구페 寺舊廢 기좌우애학 基左右崖壑 석불석탑 石佛石塔 대소심중 大小甚衆 위지 謂之 천불천탑 千佛千塔 우유일석실 又有一石室 기중이석불 其中二石佛 융벽상배좌 융壁相背坐 언전 諺傳 신라시소조 新羅時所造 혹위 或謂 고려승 高麗僧 혜명 惠明 유도중수천 有徒衆數千 각령조성운 各令造成云’이 그것이다.
이미 알려진 도선국사의 창건설은 기본적으로 「도선국사실록」이라는 기록에 의한 역구전, 이를테면 조상 대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이 아니라 허망한 도선국사실록을 본 식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 구전된 경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다 현재 남아있는 석불과 석탑의 양식이나 가람터의 발굴 결과로 미루어 도선이 활동하던 구세기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 비해 혜명의 창건설은 훨씬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관촉사의 은진미륵을 세운 혜명(慧明)과 운주사 혜명(惠明)은 동일인이 아닐까 추정된다. 慧자와 惠자는 한자에서 서로 통하게 쓰이는 용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일봉암기’의 기사 중 은진에 대인석상과 운주지곡에 천 개의 불상과 불탑을 세운 것을 가리켜 비보처에 불적을 세운 사례로 들고 있다. 두 지역을 병립시켜 서술한 이 기록은 운주사 창건에 대한 결정적인 자료로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운주사의 불적 편년에 가장 근접한 시기이고, 또 고려 초기 괴력을 갖춘 신 이적인 불상 조성이나 불사가 많았음과도 상통하는 사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선의 조형물로 조화를 이룬 도량
이처럼 신비에 쌓인 운주사 불적의 베일을 벗기려면 제작 시기나 기간은 물론이거니와 다탑봉에 천불천탑을 조성하려 했던 세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즉 불사를 주도하는 승려들과 이들의 종교적인 열망에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집단, 그리고 불상과 탑을 만드는 제작자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어쩌면 당시 불교계와는 교리 자체가 다르면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성의 불교계로부터 소외 받는 민중의 정서를 차용하는-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백성과 지방유력자들을 부추기며-새로운 종파 승려들의 개척 포교당 같은 성격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또 나주 남평이나 화순 능주의 넓은 평야에 경제적인 기반을 가진 세력들이 승려의 의도와는 달리 중앙 진출을 꿈꾸며 동조했을 가능성은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신도를 위해 짧은 기간에 대량으로 조성해야 하는 압력에 따라 ‘도중수천(徒衆數千)’의 석공(민중)들의 토속적인 심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지 않을까? 어쨌든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을 보며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거친 석질로는 더 이상의 조각 솜씨가 발휘될 수 없는 최선의 조형물로 조화를 이룬 도량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요즘 운주사는 새로이 절집을 짓느라고 무척 바쁘다. 1980년대 중반까지 허름한 요사채만이 지키던 운주사 일대는 석탑과 석불 주변으로 논과 밭이었다. 그리고 능주에서 혹은 남평에서 운주사로 가는 도로는 비포장으로 논길과 산길이었다. 사림들의 손길에 훼손되지 않은 신비감과 자연미를 간직한 채였다. 그래서 삶을 위한 생산의 터전과 신앙, 종교적 조형물에 자연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사람의 생활 속에 살아 있는 예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감명 깊었던 유적이 새롭게 단장되면서 그 맛을 잃어 가고 있다. 관광지로 개발하려고 도로를 포장하였고, 인근에는 골프장도 들어섰다. 그런데다 경관에 어울리지 않게 크게만 지은 대웅전이나 지장전과 어떤 신도가 세웠는지 절 입구쪽 석불군 옆의 희고 멀쑥한 화강암 석탑과 석동, 또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둘러쳐진 철재 보호망 따위는 본디 유적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깨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