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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관판 대장경의 조성 과정과 사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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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허흥식 1987년 11월 69호
머리말
13세기 전반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커다란 변혁의 시기였다. 고려, 금, 송으로 세발솥을 이루었던 세력 관계는 북방에서 일어난 몽고족의 침입으로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남송과 고려는 다같이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치하여 2대 전선을 형성하면서 금을 정복한 몽고에 저항하였다. 고려와 남송은 농업경제에 기반을 두었다는 공통점을 가진 국가로서, 유목민족인 몽고군의 기병전술을 수성전(守城戰)과 수전으로 저지하면서 지구전으로 버티었고 그 무렵의 상황에 일치하여 무신의 실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고려는12세기 후반부터 무신집권에 의하여 문신문벌이 위축된 틈을 타서 각 신분 계층과 각 지역의 요구가 분출되는 격동기를 겪었다. 13세기 전반에 강력한 통치력을 확보한 최씨 집권은 무신 집권 시대의 절정기를 이루면서 남침하는 몽고에 대항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을 무릅쓰고 이루어진 대장경의 조판은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깊이 주목될 소재라고 생각된다. 이 대장경은 오늘날까지도 거의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문화사의 특기할 문화재로서 세계적으로 깊은 애착과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 대장경의 조성과정, 참여자, 장소, 이전(이운)에 대해서는 충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거국적인 사업이면서도 극히 단편으로 남은 기록들을 확대, 연결시켜 체계화할 수 있을 뿐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전기의 초조(初影) 대장경은 현화사의 비에서, 그리고 속장경은 대각국사비와 고려사에서 그 조조 경위가 비교적 소상하게 실린 점과 비교할 때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고종 관판 대장경의 조성 경위를 당시 참여자·장소·동가 동을 통하여 사회 상황과 관련시켜 규명하고자 한다.

1. 조성의 동기
현존하는 대장경판을 조성하게 된 동기는 이 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版君民析告文)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은 판각을 착수하면서 군신이 고유(告諭)한 글이므로 여기서 그 동기를 찾는 점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또한, 같은 문집 속에, 그보다6년 앞서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받고 강화로 천도할 때에 군신이 몽고를 규탄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이어진다. 곧, 한결같이, 몽고의 침입은 불교를 모르는 야만 족의 소행이라 지적하면서, 종교를 이용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국민총화를 꾀하려는 호국의 의도가 반영되고 있다. 그것은 그 무렵 위기에 몰린 국가의, 외세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서 단일 국교를 믿던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강화로 천도한 뒤에, 소설된 불교문화재를 복구하는 구체적인 작업으로서 현존 대장경을 조성한 것은 그로써 국민의 신앙심을 고취시켜 장기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었으므로 경제적 손실에 못지 않게 호국을 위한 장기적인 저항을 가능하게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륙에 비하여 국력이 약한 그 주변의 민족들은 국력의 약세를 민족의 지속성으로 만회하고 또 침략으로 인한 파괴를 회복하는 꾸준한 반작용을 통하여 민족적 각성을 강화시키곤 하였는데, 고종 관판대장경의 조성 동기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찾아질 수 있다. 고려가 국교인 불교를 내세워 통치자에 대한 피지배자와의 동질성을 호소한 예는 거란의 1차 침입 뒤에도 경험한 바 있다. 곧, 그때 왕이었던 성종은 고려의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불교를 억제하고 불교 제전을 통한 국민의식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하였으나, 거란이 침입해 오자 국민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존의 불교와 그 제전에 대한 정책 방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선례를 남겼던 것이다.
현존 대장경의 판각은, 초조 대장경의 조판과 마찬가지로, 국교였던 불교와 피지배자의 연결을 추구한 국가적 차원의 효용성에서 그 동기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국적으로 내세운 표면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고, 좀더 구체적이고 내면적인 동기는 당시 조판에 협력한 종파간의 이해와 조성의 담당자, 경비의 조달방법, 그리고 조성 장소 들에 관련지어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리라 생각된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이므로 선종보다 교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초조 대장경은 현화사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는데, 이 사원은 고려 초에 확립된 3대 종파 가운데 유가종의 사원으로서 왕실의 후원을 받은 진전으로 부상하였다. 그 무렵 화엄종파가 광종 후기부터 융성하였고 신라말부터 광종초기까지 주도적 불교세력이었던 조계종(선종)은 남중국에서 법안종(法眼宗)의 영향을 받아 선종과 교종을 절충한 천태학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선종보다 교종이 우세해지는 불교계의 변화와 더불어서 초조 대장경이 간행된 점은 법보사(法寶史)에서도 간파할 수 없는 사상적 연관성이 있다.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3대 종파는 안정됨과 더불어 폐쇄성이 강해진 사회 기반에서 각각의 고착된 계층을 대변하면서,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가 불교계에서의 대립의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일반 관료와 연결된 화엄종, 왕실 외척과 연결된 귀족 세력을 기반으로 한 유가종, 그리고 지방 토호 및 무신과 연결된 조계종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의 미래를 일찍부터 우려하였던 의천은 학파 불교로 돌아가 이를 통합적으로 융섭함으로써 종파 불교를 극복하려 했던, 보편주의와 국제주의의 사상가였다. 그는 기존의 불교 종파의 국수성과 폐쇄성을 비판하고 단계적인 교학의 완성을 내세우면서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가 계획한 대장경과 교장(敎藏)의 소(疏)는 부분적으로 간행되었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더불어 조성되지 못한 채 고종 관판 대장경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의천의 죽음과 더불어 불교계의 종파 극복은 좌절되고 그의 이상을 추종한 선승들에 의하여 천태종이 형성됨으로써 4대 종파의 시대를 맞았다. 무신 집권 직전부터 불교계는 조계종의 등장이 두드러졌고, 무신 집권 초에 있었던 승도의 난은 주로 왕실이나 왕실 외척과 연결되어 있던 화엄종이나 유가종과 같은 교종 측에서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승도의 난이 좌절되었음은 곧 이들 교종의 약화를 의미한다. 무신들은 대체로 조계종과 밀착되어 있었으며, 무신 집권의 절정기를 이룬 최씨 집권은 공공연하게 조계종을 지원하였다. 최 충헌은 광명사, 보제사, 창복사 등을 3대 선종 사찰로 삼아 담선법회(談禪法會)를 지원하였고 그 가운데 창복사는 사후 그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몽고의 침략를 피하여 강화로 천도시킨 최 우는 집권 초에 국민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동안 소외되었던 교종에 대해서도 후원할 필요가 있었다. 화엄종 승려인 각훈이 해동고승전을 관찬으로 완성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무신난 전의 잔존 문벌과 교종승들에게 다소 복고적 회상에 잠기게 하였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교종승 가운데서도 특히 화엄종승의 활동이 되살아나고 있었으나 유가종에서는 그러한 활동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의 불교 종파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의 순서로 번영을 누렸고 유가종은 가장 침체해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의 집권자인 무신 세력이 선종인 조계종과 가장 밀착하였지만, 경전은 교종과 더 밀접한 속성을 가졌으므로, 오로지 조계종의 힘만으로는 대장경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비록 조계종의 선원사가 중심이 되어 조판을 주관하기는 하였으나, 경전 판각의 이론적인 면은 수기(守其)를 비롯한 화엄종승의 협력을 받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초조 대장경이 교종의 하나인 유가종의 현화사 승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속장경도 교종의 하나인 화엄종의 흥왕사 승의 힘으로 이루어졌듯이, 고종 관판 대장경도 그 이론은 교종의 하나인 화엄종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점에서 서로 상통한다. 다만 고종 관판 대장경의 조판이 앞의 장경 사업과 다른 점은 조계종의 정치, 경제적 주관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조계종이 무신 집권과 밀착되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크다고 할 수 있다.

2. 선원사와 분사도감(分司都藍)
무신 집권자들은 단순하고 실천적인 선에 좀더 흥미를 느끼는 속성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주관적이고 행동 지침을 바탕으로 하여 풍미한 간화선(看話禪)은 무신 집권자들의 취향과 일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 충헌으로부터 최 우에 이르는 50여년의 무신 집권 절정기에 조계종이 극성기를 이룬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강화로 천도한 뒤의 중요한 조계종 사원으로 떠오른 선원사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선원사는 강도에 창건된 선종 사원으로, 대장경이 이곳을 중심으로 조성되고 조선 초에 해인사로 이전하기까지 이곳에 보존되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때의 여건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대장경의 조판을 총괄한 대장도감이 선원사에 설치되었으리라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선원사는 대장경의 주조를 열성적으로 지원한 최 이의 뒷받침으로 창건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죽은 다음에는 항(沆)에 의하여 대장경이 완성되면서 이곳을 아비인 최 이의 진전으로 삼아 국왕에 대한 예우와 동등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수선사의 5대 주지였던 원오국사 천영을 법주로 삼았는데, 법주란 주지보다 우위에 있는 조실과 같은 위치였다.
서울을 강화로 옮긴 동안 몽고에 대한 항전으로 재정이 고갈되자, 개경에 있던 국왕의 진전 사원을 경령전으로 축소시키고, 법왕사와 봉은사 등 태조와 관련된 진전이나 국가제전인 팔관회, 연동회 등을 주관한 극히 중요한 사원만을 재현하였다. 그러나 최씨 집권은 선원사를 진전 가원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창복사도 재현하여 최 충헌의 진전으로 삼았다. 이를보면 대장경 조성의 동기로서 내세운 호국 의지는 권신인 최씨 집권의 미화와 기원을 목적으로 마무리지워지고 있었다고할 수 있다.
대장경의 조판은 최씨 집권의 조상숭배를 미화한 점이 있지만, 이 때문에 이들의 경제적인 후원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완성이 가능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대장경의 조판과 최씨 집권의 관계는 선원사뿐만 아니라 대장도감의 지방 분소로 설치되었던 남해 분사도감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이곳은 남해안에 위치하여 몽고의 피해가 적었고 최씨의 세습적인 식읍이 가까이 있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식읍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이곳 부근의 사원에 최 이의 얼자인 만전과 만종이 주지로 와서 최 이의 권세를 앞세워 관곡을 이용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최 이는 이들의 행패에 대한 지방관의 보고를 받아들여 처벌하려 하였으나, 자신의 계승자가 없고 병세가 위독해지자, 방향을 바꾸어 지방관을 처벌하고 만전을 환속시켜 실권을 세습시키는 역전의 정변을 만들어내었다.
이와 같이 대장경을 조판하는 실질적인 관할자와 경제적 후원 그리고 사원은 당시의 최씨 집권자와 조계종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원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혜심에서 천영에 이르는 수선사의 주지와 최 이, 만천, 만종 등 최씨 집권자들과 그리고 이들과 관련있는 선원사, 수선사, 단속사, 쌍봉사 등 강화와 남부지방에 위치하여 몽고의 직접적인 피해가 적었던 지역의 사원이 주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사상 경향과 침묵된 원인

고종 관판 대장경은 고려의 인쇄소와 서책이 미분화된 그대로 현존하는 셈인데, 방대한 실물이 있는 동안 여러 차례의 인간(印刊)이 행해지고 본판 이외의 언본(印本)이 산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방대한 실물에 반하여 고려 시대에 관한 사서나 문집 등은 그 조성 과정, 참여자, 장소 동에 대해서 매우 소략하게만 전해주고 있다.
선원사에 도감이 설치되었다는 사실도 이곳에 보관되었다가 해인사로 옮겼다는 조선초 실록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하여 유추한 것이고, 분사도감이 설치된 사실도 보판이나 정안렬전 등을 연결시켜 확정지은 것이다. 수기의 교정작업은 판본의 일부인 교정별록에 실렸고 약간의 문집 속에 단편적으로 실렸을 뿐이다. 그리고 최씨 집권의 후원도 선원사와의 관계를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현존대장경의 중요성에 견주어 그 조판 과정이 극히 소략되어 있는 까닭은 그 자체가 불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물론 조선초에 편찬된 고려사는 억불론자들이 중심이 된 관찬이므로 의도적으로 불교사에 속하는 대장경의 조판에 관한 것을 침묵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고려사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불교행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단편적이나마 자주 취급하고 있으므로, 전적으로 이를 수긍하기는 어렵다.
현존 대장경에 관한 이야기가 침묵된 경향은 그 까닭이 권신 최씨 집권의 후원으로 그들의 원찰에서 조성되고 이들이 죽은 다음 진전에 보관됨으로써 그 장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고려사의 편찬자는 중요한 사항이라도 권신과 관련된 사건은 비록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더라도 열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데, 대장경도이 때문에 고려사세가에는 다만 소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이 아닌가 한다.
또 한가지 추측은 대장경의 내용자체에도 문제점이 있지 않은가 한다. 현존대장경은 초조, 속, 송, 요본 등 여러 대장경을 두루 참조하여 이룩된 가장 모범적인 대장경이지만, 의천에 의하여 추구된 국제주의와 보편주의적 불교사상이 그대로 계승됨으로써 조성 당시의 현실성이 배제되지 않았는가 한다. 특히 정판은 의천이 추구했던 국제주의경전만이 수록되고 있다. 정판보다는 보판에 의천에 의하여 배척된 균여의 저술이 실리고, 조당집(祖堂集), 종경록(宗鏡錄), 증도가사실(證道歌事實), 선문염송집(禪門括煩集) 등 보판에는 선종관계의 저술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조판을 주도한 조계종과 실무적인 협력자인 화엄종승 수기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정판에 비하여 보판에서는 유가종과 관련된 저술이 제외된 것도, 유가종승의 참여가 실제로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해인사에는 사판 또는 잡판으로 불리는 정판과 보판 이외의 여러 산판에 현존하고 있다. 이들은 정-보판을 조성한 다음 몽고 압제 아래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실용성에 의하여 현실성을 반영한 판본이다. 이들은 대체로 사변적이기보다는 실천 위주이고, 이론이기보다는 신비 사상을 반영한 간단한 경전이며, 선종 관계의 저술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판본들은 마모가 심할 정도로 인본이 자주 행해진 반면 정판이나 보판은 극히 마모가 적으므로 인본이 자주 행해지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이를 보면 대장경도 신앙적 장엄의 의미가 더 컸고, 당시의 사상가들에 의하여 이미 현실적인 관심을 상실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맺음말
고종 관판 대장경은 실물이 그대로 현존할 뿐 아니라 세계 대장경시에서 한 구획을 긋는 중요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중요한 문화재를 조성하고도 이에 대한 조성자, 장소, 과정, 그리고 이동 등에 대해서는 허술한 점들을 종합해 보면서 그 까닭을 밝히려 하였다.
이 대장경은 초조 대장경이나 속장경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차원에서 조성되었고 진전 사원에 장엄으로 보관된 점에서 상통하였다. 또한 이를 교정하고 이론적인 체계를 확립한 승은 수기로서, 그가 조계종이나 천태종이 주도적인 종세를 유지하던 당시에 화엄종승이었던 점은 교종과 대장경의 상관성이 컸던 이전의 조판 과정과 상통하는 점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현존 대장경의 조성 과정이 그처럼 이전의 대장경과 많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곧, 하나는 재정적 지원이나 장소가 모두 선원사, 수선사를 위시한 조계종 사원이나 최씨 집권과 관련성이 큰 것이니, 이 점은 이전의 대장경이 전적으로 교종에 의하여 조성된 것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다음은 비록 국가적 차원에서 호국을 내세워 착수하였다 하더라도, 실질적인 추진과 보관은 모두 권신인 최씨 집권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그들의 원당을 장엄하게 하는 사적인 용도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왕실로 대표되는 국권을 능가한 권신의 실권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대장경은 시작 동기와 후원자의 목적이 일치하지 않는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굴절된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곧, 국가적 대사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시간과 침묵만이 그를 가능케 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현존 대장경은 고려 말의 사상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방대한 국간의 대장경은 인본을 만들기조차 막대한 비용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이론보다 실천, 논리성보다는 신비성, 사변성보다는 행동성, 교종보다는 선종이 중심이 된 그때의 불교계에서 가까이하기 어려운 거리를 느끼게 하였다. 이 때문에 단순하고 신비적이며 이용하기 쉬운 경전이 뒤이어 조성되었고, 그러한 경전이 그 무렵의 사상계에 부합하면서 유행하고 있었던 것도 고종 관판 대장경이 소외된 이유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고종 관판 대장경은 동아시아의 문화유산을 응축시킨 국제적 보물이고, 이를 어려운 여건에서 조성하고 보존시켰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조성된 이후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이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교계는 대장경에 담긴 이론과 저력을 현대 사회에 연결시킬 원효와 의천의 재출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