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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사유 방식과 시의 관련상 - 최근 시의 불교적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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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유임하 1993년 04월 134호
최근 우리 시에는 불교의 ‘선’을 하나의 기법으로 활용하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이와 같은 점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당연히, 왜 그런 경향의 시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간혹 시의 정신적 경향이 지니고 있는 모호함에 대한 선호가, 현실에 대한 무비 판적 태도나 정신적 위안을 구하는 안일한 자세와 관련될 수도 있다는 평자들의 경계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시의 불교적 경향이 우려할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자산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가령 시의 전통을 좀더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그보다 훨씬 전에 불교적 신심을 서정적으로 엮어낸 월명사(月明師)의 「제망매가(際亡妹歌)」처럼 시대의 질곡이나 누이의 죽음이라는 생의 참담함 앞에 굴복하지 않고, 불교적 상상력으로 피워 낸 빛나는 표현들을 우리는 쉽게 떠올릴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산시」의 세계로부터 삶의 자세를 가다듬은 정지용의 시집「장수산」은 자연을 전일적으로 이해하는 평정심과 무아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는 모두가 종교적 힘에 바탕을 둔 문학이 정신적 깊이에 천착한 소산들이라 생각된다.

본래 ‘선’은 불교의 종지 가운데서도 가장 풍부한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 문학이 선에 대해 그처럼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실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치열하고도 자유로운 정신이 문학의 지향하는 바에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선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에는 오경웅의 표현대로 “숨막히는 전환, 눈부신 섬광, 귀를 찢는 고함, 경악할 돌발사, 신비한 수수께끼, 머리로는 이해할 길 없는 저쪽 세계로의 비약, 유머와 기이한 행동,…우주적인 농담” 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선이란 구도적 삶을 사는 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것은 구도의 열정을 가지고 세계에 대해 끊임없는 화두를 던지는 자가 아니면 발견하지 못하는 빛나는 상징이다.

시인들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언어의 구도자이다. 이들은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는” 별스런 사람들이다. 바슐라르는 시를 가리켜 ‘언어의 장엄한 실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시는 일상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언어에다 독특한 문법과 향취를 부여하면서, 독자에게는 ‘위엄있게 위반한 언어행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곧, 시에서만큼 시인은 독자를 대상으로 자신의 구도적 삶과 사물에 대한 창조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선사(禪師)’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오늘날의 시는 왜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간명하다. 독자는 자신의 일관된 통념으로만 시를 이해하려 들기 때문이다. 마치, 선 행위에서 던져진 화두에 답하기 위한 대가를 치루지 않듯, 전환된 시의 정신과 기법에 대해 자신의 인식을 전환하지 않고 그저 통념으로만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월의 시를 보던 눈으로 요즈음의 시를 읽으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적 사유만큼이나 독자 자신도 끊임없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Ⅱ

요즈음 시인들 가운데에 황동규는 자신의 고백대로 불교적 사유에 많은 부분을 활용하는 축에 속한다. 그는 먼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몰운대는 꽃가루 하나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엿보이는 그런 고요한 절
벽이었습니다. 그 끝에서 저녁이 깊어 가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습니다.

새가 하나 날다가 고개를 돌려 수상타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모기들이 이따금씩 쿡쿡 침을 놓았습니다. (날 것이니 침을 놓지!) 온몸이 젖어 앉아 있었습니다. 도무지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몰운대행」 중에서

그의 평정심은 인적 없는 ‘몰운대’ 절벽에서 ‘저녁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고 앉아’ 있는 것으로부터 얼굴을 드러낸다. 이것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그대로 내놓는 (물론 일상적 삶
가능한 모습일 것이다) 상태이자, 자연과의 친연성을 회복하려는 시인의 노력이다. 명백하게 드러나는 불교적 사유는 비록 아니라 해도 , 새가 화자를 낯설게 바라보는 눈길(눈길의 느낌은 평정심이 아니면, 놓칠 것이 뻔하다.)과 모기의 등살(육체에 부여하는 매운 자극)에서 세속에서는 얻지 못하는 존재의 외로움을 벗어나는 경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외로움이 군중 속에서 또는 일상의 무력감에서 일어나는 단절과 좌절에서 연유한 시인의 감수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정녕 구도적 자세에서만 얻어지는 값진 자각이다. 화자는 세계와의 내밀한 교섭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적막한 절벽 아래에 와서야 비로소 평정심을 찾고 작은 회통 會通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여행을 통해 얻는 하나의 작은 깨달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일상에서 약간 벗어난 가벼운 것이라 해도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이란 시인의 즐거운 수행 방식임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에게는 여행에서 얻어지는 감각이 하나의 화두처럼 극명한 이미지로 와 닿는 경우도 있다.

묏비(山雨) 막 개인 다음
되살아나는 매화꽃 냄새
깊이 마시면
머리 속 해골이 환해진다.
잠시 환등이 켜진 것처럼
꺼져도 한참 환한 환등처럼
「매화꽃2」


산에서 만난 비가 그친 다음 피어 오르는 매화꽃 냄새가 코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나타난 등불처럼 환하게 와 닿는다. 이는 동산 양개의 오도송의 한 구절인 “눈으로 들어야 하네(眼處聞聲方得知)”와 같은 느낌을 준다. 동산 양개는 본래의 형상에 접근하는 투명한 감수성의 차원을 이렇게 표현했지만, 황동규의 경우은 안구에 다가오는 상큼한 매화꽃 냄새를 ‘환한 환등처럼’ 눈으로 본다고 말하고 있다.
‘냄새를 보는’것은 매화를 냄새로 인식했다는, 존재이 참모습을 파악해 내는 선적 깨달음에 비유된다. 그는 본질의 전모를 얻는 순간 얻는 깨달음조차 언어로 ‘번역’해 내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상상력은 선적 사유와 매우 흡사하다. 요컨대 있는 그대로의 체험은 매화의 본래 형상을 텅 비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구체적인 모습인 것이다.
‘허무를 느낀 다음에야 세계의 아름다움을 본다’고 한다. 그것은 삶에 대한 참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고통과 그 고통을 극복한 다음에야 비로소 본질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얻는다는 경구이다. 황지우는 이 같은 예를 경전과 일상 생활을 교차시켜 파격적인 이미지 - 이것은 할 할喝에 해당될 수 있다-로 구현하고 있다.

무릇 경전은 여행이다. 없는 곳에 대한 지도이므로 ,
누가 아빠 찾으면 , 집 나갔다고 해라.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내가 군대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은 위장의 사생성 死生性 이었다.
요즘은 종일 집구석에 있소.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무릇 도는 교환과 방황을 위해 있다. 아니, 도는 약탈이다.
방광에 가득찬 한숨-게야, 바다 한가운데를 가 보았느냐!
「산경 山經」 전문


황지우는 최근 동양적 정신과 불교적 세계로 귀환하여 성과를 얻고 있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는 주로 「산해경」과 같은 신화적 어법을 빌어 세계를 풍자하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문제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용시에서 없는 곳이란 이를테면 지상의 일상적 삶에서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이다. 그의 자의식은 그 ‘없는 곳’ 곧 근원에 대한 갈구와 삶에 대한 반성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같은 점은 물론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인의 치열한 노력의 일단이다. 가령 경전을 읽으면서도 화자는 손님의 내방을 거절한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화자가 가고 싶은 곳은 이 세상에는 없는 곳이다. 그래서 화자는 “게야, 바다 한 가운데를 가 보았느냐!”는 할喝을 준비한다. 물론 ‘게’ 는 갯벌이라는 세상에 사는 중생이며, ‘바다 한 가운데’는 경전의 세계, 혹은 일상 너머에 있는 본질의 세계임을 알아 차릴 수 있다. ‘가 보았느냐’ 는 존재의 본질을 자각하는 화두와 같은 인식의 전환에 대한 발언이다. 결국 이 시의 특성은 일상에서 절감하는 한계(이것은 구도적 삶의 형태가 아닐까)를 결국 불교적 발상에서 접근하고자 한다는 점일 것이다.
「산정묘지」의 시인 조정권 역신 불교적 사유를 자주 활용하는 예이나, 그의 시는 극히 소품적이다. 소품은 작은 목소리로 나타나는 시적 탄성이다. 곧, 그것은 일상에서 얻어지는 생각의 조각들 일 수도 있다. 」

저 아래 골짜기 잔설들은
무슨 수심 있어 제 혼자 응달을 이루는가
능선을 넘었다가 되돌아올 때
그 뜻 물을 필요 없어졌다.
「응달의 뜻」전문

‘단행시편’ 이라는 부제 안에 실린 이 작품은 선어가 지향하는 해독의 불가능성을 얼마쯤 담고 있다. 그것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음에 대한 대답의 불필요’ 라는 의미 구조는 이미 물음의 차원을 깨달음 안에서 융화시키고 있다. 또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공간이라든지, 자그마한 현상에까지 주목하여 그것이 자신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모습은 다르지만 얼마든지 화자의 삶과 상통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광대 무변한’ 사유보다는 ‘세심한’ 정관靜觀에 가깝다.

Ⅲ

지금까지 우리는 이 짧은 글에서 왜 요즈음의 시가 불교적 경향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양상은 무엇인지 황동규, 황지우, 조정권 등 몇몇 시인의 작품을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불교에서의 세계 인식은 근원과 현상을 둘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현상은 근원의 그림자이지만. 동시에 근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와 파도의 관계처럼. 이 같은 사고는 시에서 매우 유용하다. 현상 뒤에 담겨 있는 본질의 의미를 캐는 것은 선사들의 몫만은 아니다. 그것은 형태를 달리 해서, 오늘날의 시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황동규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여행을 통해서 세계와의 관계를 기쁘게 확인하고 있으며 , 황지우는 현실에서 얻어지는 한계의 절감을 경전이라는 바다로의 방황과 구도적 모험으로 일관하면서 할을 던진다. 조정권은 세속의 번다함에서 벗어나, 존재의 의미를 고결하고 강인한 정신주의로 형상화 시키고있다.
이제 우리는 왜 시에 정신적 취향과 근원에 대한 탐색과 여행에서 얻는 깨달음의 기쁨 등이 나타나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현대의 일상적인 삶이 인간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게 만들지 못하는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비판에 가담하는 자들의 항변은 숱한 사회적 문제와 고통을 뒤로 하고 정신적 문제로 물러서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1980년대의 값진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백가쟁명의 상황 안에서, 우리는 급박한 현실의 문제가 이데올로기의 외침과 정열에 의해 해결될 수 없음을 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닌 본질의 문제로 돌아서는 것은 개개인들의 작은 깨달음이 다시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불교적 사유는 유연한 정신의 힘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편견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 현상 속에 숨어있는 본질의 옷자락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

문명의 거대한 힘 안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작은 깨달음들이 이제 시인의 눈을 밝게 만드는것이다. ‘선’혹은 ‘선적 사유 형태’가 시에서 발견되는 것도 실상은 사고와 발상의 대전환이라는 시 정신과 기법의 창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