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불교 소설, 인간에 관한 존재론적 물음의 뜻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송희복 1993년 04월 134호
불교 소설은 가능한가. 이 질문은 소설이면 소설이지 또 불교 소설은 무엇인가라고 달갑잖은 반응과 더불어 이따금씩 제기되어 온 회의적인 문제였다. 흔히 불교 함은, 이광수의 「원효대사」처럼 구도자의 수행적 삶의 내력을 전기적으로 서술한다든가. 하니면 김동리의 「등신불」처럼 성자적 위용이 번득이는 출세간적 인물이 계율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불교 소설이라고 해서 일반 소설과 특별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일상적이고, 풍속적인 삶의 경험적 현장 속에서 인간 구원의 새로운 가능성을 문학적 미학의 가늠자를 통해 미세하게 조명하는 것이다. 불교 소설이 굳이 초월적인 삶과 호흡하는 세속주의로 환원될 때 한결 문학적인 형상력을 성취할 수도 있다. 비약적인 설명을 가한다면, 불교 소설이 오늘날처럼 다원화되고 속화된 사회에서는 특히 제한적 의의밖에 갖지 못하더라도 그 세속주의를 통해 종교 문학의 한 범례로서 독특한 양식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불교 소설로는 신상성의 「목불 木佛」과 「사이공의 니르바나」가 우선 눈길을 끈다.
「목불」은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전시된 국전 조각품인 반쪽의 목불을 우연히 보게 됨으로써 구도자의 길을 선택한 젊은 승려 탄공이 은둔 조각가 달노인의 죽음을 통해 장인의 예술 정신이 종교적 환상을 초월하여 삶의 본질적 의의를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사찰을 순례하던 탄공은 산세가 유난히 돋보인 지리산 쪽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다가 어느 토굴 속에서 반쪽이 잘려 나간 목불을 발견한다. 그는 이것이 표범이 되어 자신의 얼굴을 물어 뜯는 악몽에 시달린다. 달노인의 느린 동작 가운데에는 격렬한 몸부림 같은 것이 있었다. 오 년 뒤 달노인은 필생의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곤 달노인은 가부좌 자세로 열반에 들었다.
탄공이 찾고자 했던 것은 정신이 아니라 물신이었던 것이다. 즉 삶의 본질은 불후의 명품과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 그것을 추구하고 수행하는 정신의 과정에 있다는 뜻을 작자는 넌지시 던지고 있다.

내가 찾으려는 목불이란 바로 그 반쪽 이었구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목불을 밖에서 찾는게 아니고 바로 그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을 ...... 목불은 불에 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영원한 목불이란 사물이 아니고 정신이 아닌가.

「사이공의 니르바나」는 숨가쁜 월남전 상황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월남에 참전한 애인 서찬을 따라 무용수로 함께 온 내가 애인을 잃고 쓸쓸히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져 있다. 전시의 사이공은 자조와 자학의 여인들이 몸값을 흥정하면서 낯뜨거운 동물성이 횡행하던 곳, 거기에는 휘황한 조명과 기묘한 섹스와 자포자기의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 온갖 죄악으로 오염된 탁세이다.
서찬의 아버지는 일제 말기 남양군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끌려갔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따르려고 일본군 간호원을 자원했다. 남편이 죽자 찬의 어머니는 태국과 홍콩으로 전전했다. 월남에 있을 것이라는 풍문을 입수한 아들은 어머니를 찾으려고 월남 파견 부대에 지원했던 것이다. 내가 거기서 만난 레유안 스님은 찬의 어머니였다. 아들 찬의 죽음에 그녀는 분신 열반을 선택했다.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이 그어지는 순간에 “평∼”하는 화염과 함께 뜻모를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정치적 항거, 피비린내 나는 광장의 이념과는 또 다른 목적의 분신 자살이었다. 단순히 아들의 피살에 대응한 사사로운 보복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그녀는 분신 열반으로써 아수라장인 탁세를 초월하고자 했을 것이다. 상당히 반전의 파토스를 자극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남편을 찾아왔으나 나중에 남편을 잃어버렸던 여인과, 애인을 찾아왔으나 월남전에서 애인을 잃어버렸던 여인. 어쩌면 고부간이 되었을지도 모를 두 여인은 타국의 전쟁에 의해 참담한 비극을 체험한다. 대물림의 악연의 굴레를 초월하려고 나는 비구니로 입산한다.

박정효의 「수륙재」는 심인성 발병으로 이상한 환각 증세를 보이는 미혼 여성이 칠 년 전 사건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심리적 상황을 ‘의식의 흐름’으로써 보여주고 있다. 일인칭 화자인 나는 칠 년 전에 유산시킨 아기를 천도하려고 수륙 방생 법회에 참여하여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한 아기의 영혼을 위로하며 ‘낙태 영가’를 되뇌었다.

나는 십오리나 되는 학교길을 함께 다니던 죽마고우가 있었다. 그는 좋은 성적으로 개교 이래 지방 대학에 처음으로 진학했고, 나는 학교장의 추천으로 서울의 은행에 취직했다. 서로의 변화를 탓하여 진심을 숨기는 데만 열중해 오던 우리의 묵계는 우리가 어느새 성인이 다 되었음을 몇 번이나 확인함으로써 무너져 내렸다.
그는 칠 년 전 실종되었다. 도청 앞에 모이기로 한 날, 남녀노소 안 가리고 휘갈겼다는 그 공포의 얼룩 방망이에 쫓겨 함께 담을 넘었다는 친구를 만났다. 그는 하필 개 있는 집의 담을 넘다가 콩볶듯 날아오는 총알 사이로 지붕을 탄 그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했다.


단지 대학생 차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무차별 사격을 퍼부으며 지붕으로 쫓았다는 사람들에 대한 적의 때문에 얼마나 몸서리를 치며 그 도시를 헤매고 다녔던지 나는 한동안 어깨, 허리는 물론 손마디, 발가락, 심지어 목뼈까지 들쑤시는 이상한 통증에 시달렸다. 곤봉에 까지고 대검에 난자된 시체들을 트럭에 포개 싣던 사람이 휙휙 돌아보는 것 같은 환각에도 시
달렸다.


나의 환각 증세는 칠 년 전 잃은 애인과 얼굴도 알 수 없는 아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한과 광기만 훈련받은 듯한 우리 시대의 폭력에 대한 충격 때문이기도 했다. 이 소설의 불교적인 주제는 폭력과 방생이라는 모순된 삽화가 드문드문 되풀이되는 과정 속에서 찾아진다. 불교적인 사색의 흔적이 문학적 장치 안에 철저히 감추어져 있다.

노명석의 「돌불」은 수행자의 파계와 격렬한 참회를 통해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화자인 내가 상좌 늑명으로부터 혜암스님이 입적했다는 급보를 듣는다. 내가 혜암을 처음 만난 것은 일곱 살 때였다. 그때 그는 왼손에는 조그만 정(釘)을, 바른손에는 망치를 들고 바위에다 무언가 열심히 새기고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 할머니의 주선으로 입산을 했다. 과거 어느 날, 혜암은 그의 사타구니에 있는 성기를 삭도로 지른 사건이 벌어졌다. 그 뒤에도 혜암은 부지런히 바위석불을 새겼다.

석수의 외이들이었던 그가 몇 해를 떠돌다가 미륵암의 상좌로 눌러앉게 된 지 며칠 지나서였다. 다른 스님들이 시주를 하려고 혼자 빈 절간을 지키던 해거름에 한 여인이 남편의 위령제를 지내러 왔다. 우물에서 목욕을 한 여인이 법당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그가 어쩌다 문구멍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절을 해대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물방울이 그의 욕망을 부채질 했고, 그는 그만 법당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일이 끝난 뒤에야 흐느끼는 여인을 둔 채 자기 방으로 간 그는 격렬히 고뇌한다. 다음 날 그 여인은 우물터 위쪽 비탈의 큰 소나무 가지에 새끼줄로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다. 그는 눈을 제치고 언 땅을 파서 그녀를 묻었다.

그때부터 번민과 고뇌를 잊고자 망치와 정을 들고 자신의 죄과를 속죄하는 심정으로 석불을 새겨 나갔다. 그녀가 목을 맨 소나무 곁에 있는 바위에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불상이었다. 그는 스스로 성기마저 잘랐고, 석불을 완성시킨 다음에 끝내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석불은 살아 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석불은 평범한 불상 같기도 하면서도 여인상 같기도 한 묘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화자인 나는 혜암의 유서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는다. 한순간의 애욕이 삼켜 버린 그 여인이 자네 어머니라는, 그리고 저 세상에서도 구제 받지 못할 영혼의 죄과에 대한 업보를 받겠다고. 이 소설은 숙명적인 한계 상황을 신심과 어우러진 예술혼, 초월적인 죽음의 세계로써 초극하려는 한 고뇌하는 구도자의 삶이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노명석의 「흐르는 뿌리」는 제 1회 만해불교문학상 당선작이다. 난장이 집안의 삼대가 화류계에 있는 한 여자를 대물림하며 상관하는 추악한 인연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을 부도덕하고 타락한 문제로 여기지 않고, 난장이로 저주받는 기형의 형벌이 대이어 내림하는, 잔혹한 업의 상속을 상징적으로 구원받는 행위로 보고 있다. 인간 조건의 선험적 결함에서 연유하는 본능적인 기형성의 뿌리가 아름다움의 차원을 획득하면서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있다.

할아버지는 난장이 주제에 꺽다리 아내가 품안에 들지 않는다고 난봉을 부렸다. 지금도 밤골 장텃걸에서 술장사를 한다는 여인과 한 때 정을 붙였다.. 그녀는 뭇장꾼들을 호렸을 만큼 미인이었다. 곱게 단장한 색시로 둔갑한다는 늙은 여우처럼 흡사 앙증스런, 한 마리 늙은 고양이처럼 술손님인 젊은 내 앞에서 지금 그 여인은 거문고를 퉁기면서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술잔에 어려드는 환영을 지울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어깨춤, 아버지의 고깔모에 달린 열 발의 상모, 춤꾼들 사이를 누비는 땅개 삼촌의 곱사춤.... 할멈의 춤은 맥이 빠져들기 시작했고, 촛불도 그을음을 피워 올렸다. 만취된 상태였다. 깨어보니, 그 할멈은 내 한쪽 팔을 베고 고이 잠들어 있었다. 정교하게 빚은 대리석 조각품 같은 알몸으로.

근대 이래의 소설은 전통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하거나 인새의 실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인간학(humanics)의 한 영역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라면, 소설은 적어도 인간 현존의 근본 문제를 오늘날의 중심적 과제로 삼고 있는 이른바 ‘철학적 인간학’과 동일한 관심사를 떠맡고 있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할 수 있다는 장점을 배경으로 생동하는 불멸의 인간상과 인간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영역은 사변적 기술에만 의존하는 철학적 인간학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되기도 한다. 미상불, 오늘날의 소설적 인간학은 폭넓고 속 깊은, 다채롭고 독특한 기술을 통해 허구화된 인격의 내면적 반성을 확인하면서 무엇에 의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론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 하고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문명의 위기가 폭등하고 있는 오늘날, 소설적 인간학은 여러 측면에서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관해 되묻는다. 자유의 실천적 근거에 과한 물음, 행동적 양심에 관한 물음, 현존의 내적 근본에 관한 형이상학적 물음.... 이 글에서는, 하지만 인간학의 범주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부상하고 있는 종교 문제에, 이를테면 인간 본질의 초월적 측면을 계시하고 있는 선험적 물음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중에서도 충만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느끼게 하는 가치의 측면보다는 , 공허 속에서 자존 自存 이성을 깨닫게 하는 가치의 측면에 논의의 초점을 한정했다. 즉 불교 소설이라고 이름될 수 있는 것이 함유하고 있는 존재론적 물음이었던 셈이다.
불교 소설이란 그 명칭 자체부터가 어색한 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한국 소설사에서 제기된 불교 소설의 가능성은 단순히 소재주의적 차원을 넘어 인간 구원의 문제로까지 확산해 왔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불교 소설에서 우리가 요청하는 가치의 준거는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현재적 병리현상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오늘날의 인간학을 새로이 정립하는 방편의 하나로, 인간구원의 한 가능성으로까지 꽤 의미있게 확산된다는 점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아울러 불교 소설은 현실의 혼탁함을 초월한 청정한 목탁소리가 되어 동시대의 진실된 혹은 가치로운 삶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적극적인 기능도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이와 관련된 두 장편 소설, 고은의 「화엄경」과 이청준의 「인간인 人間人」은 원고를 달리해 서로 비교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