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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사찰과 불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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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야 - 이상해 2002년 06월 244호
사찰건물과 자연의 조화
이른바 개발이 가장 우선이던 때에는 별 반응이 없다가, 이제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우리나라도 환경 및 생태에 관한 문제를 현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환경이나 생태 문제에 관해 언급한다면 불교사찰만큼 자연환경을 중요하게 여겨 터를 잡고 건물을 세운 예도 드물다. 그만큼 산중에 위치한 우리 나라의 불교사찰은 말 그대로 주어진 자연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여 자연과 조화되는 건축을 하였다. 그것은 곧 자연을 제대로 읽고 이용할 줄 알았던 옛 고승들의 지혜였다.
자연과 조화되게 터를 잡아 건물을 배치하는 외에, 사찰의 전각들을 경사진 터에 앉힐 경우 옛 고승들은 가능한 한 터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땅을 파내어 절토를 해서 축대를 쌓지 않고, 딴 곳에서 흙을 가져와 성토를 해서 축대를 쌓았다. 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았고, 땅의 생명체적 특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대지는 밝은 햇볕이 잘 드는 양명한 터가 된다. 우리 나라의 모든 사찰 전각들은 앞이 트이고 양명한 곳에 터를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들어선 서로 크기가 다른 많은 전각들은 일정한 질서체계를 이루며 사찰 전체를 하나로 어우르며 군群을 이루고 있다. 축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집합시킨 방법에서 해인사는 돋보이는 사찰이다. 해탈문, 구광루, 대적광전, 장경판전 앞의 축대가 그러하고, 그 주변의 전각들 역시 서로 조화를 이루며 군群을 형성하고 있다.
커야 될 건물은 크고, 상대적으로 작아야 할 건물은 작게 조영되어 해인사라는 하나의 큰 사찰을 이루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해인사는 그러하다.

건축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건축 행위를 가지고 흔히 시대에 비유해서 말을 한다. 그 중에서도 ‘건축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는 말을 자주 한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대를 살며 어떻게 건물을 세우느냐에 따라 세워지는 건물의 모양과 격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졸부일수록, 물욕에 눈먼 사람일수록 무조건 큰 것, 화려한 것을 선호한다.
이와 달리,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삶의 가치에 대해 비중을 두는 사람은 꼭 화려하거나 큰 것만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지나간 역사가 증명한다.
‘건축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는 말에는 또 다른 뜻이 담겨 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건축을 하여야 한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에 소용되지 않는 건축은 무의미한 건축이다. 불교사찰만 보아도 그렇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각 사찰은 그 시대에 소용되는 불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사찰들은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 이는 어느 시대의 사찰건축이 더 낫게 더 크게 조성되었다는 것과는 뜻이 다르다. 익산 미륵사, 경주 황룡사, 양양 굴산사, 개성 흥왕사, 양주 회암사 등등은 비록 지금 터만 남아 있지만 모두 그 시대를 반영하는 사찰들이었다. 그 시대 스님들은 그 시대에 필요한 사찰을 그렇게 조성한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러한 사찰 터에 오늘날에 와서 옛 전각들을 ‘복원’하려고 하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심한 실망과 회의에 빠진다. 종교를 종교 본연의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하나의 다른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저의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정말 불사가 필요하고 또 예산이 수립되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불사를 하여야 한다. 종교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시대와 함께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개인의 구원과 내적 수행에 못지 않게 사회적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불사를 위한 고언苦言
나는 21세기를 여는 이 시대에 한국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불사가 오늘날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조선시대에 들어 도심에 있던 사찰들은 모두 사라지고, 산중사찰만 남아 있는 것이 한국 불교사찰의 현주소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21세기형 한국 현대 도심사찰과 산중사찰은 어떻게 제대로 조성되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기존의 산중사찰은 어떻게 유지, 관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은 창건 당시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의상 스님의 부석사, 순응 스님의 해인사, 진표 율사의 금산사 등등 많은 사찰들은 모두 창건 당시의 연기가 있다. 중심되는 신앙이 있었다. 나는 창건 당시의 연기를 살려야 할 사찰은 다시 살려 그러한 신앙의 중심이 되는 도량으로 만들고, 또 현대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리를 펼 사찰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에 필요한 사찰은 현대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새로 터를 잡아 창건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조건 큰 절을 짓자는 것과도 다르고, 무조건 터만 남은 곳에 옛 전각을 지금 ‘복원하자’는 것과도 다르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이제 현대 한국사찰과 불사문화를 거론할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좋은 실례를 석굴암 앞에 지으려는 ‘석굴암역사유물관’을 가지고 이야기할까 한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들은 종교신앙의 기본 도량으로서 그 기능을 충족하기에 많은 애로사항을 가지고 있다. 사찰들의 많은 전각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국보,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원형으로 보존되어야 할 것을 강요 받고 있고, 또 사찰들은 이러한 ‘문화재’가 있는 명소이기 때문에 많은 탐방객들이 찾고 있다.
석굴암 역시 마찬가지다. 석굴암은 현재 불교 신앙의 공간, 국보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유산, 그리고 석굴암을 찾아오는 탐방객들의 관람의 대상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세 가지 차원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종교 신앙의 차원에서 볼 때, 석굴암은 스님들과 참배자들의 신행을 위한 환경이 확보되어야 하지만, 현재 그러하지 못하다. 문화유산의 차원에서는 훼손되어 가고 있는 석굴암과 그 속에 모셔진 본존불을 위시한 부처님들을 온전하게 보존, 관리하고, 일제 강점기에 행해진 원형의 변화로 인한 훼손을 막을 방안을 강구해야 할 긴박한 상황에 있다. 그리고, 석굴암의 보호를 위해 몰려드는 탐방객들로 하여금 석굴암을 제대로 관람하게 하지 못하고 있는 점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불국사와 석굴암측에서는 석굴암 앞 100m 정도 되는 마당 아래 계곡에 ‘석굴암역사유물관’을 지을 계획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그것은 곧 현대 한국사찰이 안고 있는 불사문화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 몇 가지 이유를 들면 다음과 같다.
- 현재 석굴암역사유물관을 세우려고 하는 자리는 그 터 자체로서 어떤 용도의 건물이든 간에 건물이 들어설 터가 아니다. 계곡이기 때문이다. 터가 어둡고 습하다. 음습한 곳에 우리 조상들은 건물을 절대로 세우지 않았다.
- 만약 새로 짓는 건물이 기존의 석굴암을 대신하여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 계획을 하였다면, 신행의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 전각에 모시든, 석굴에 모시든, 부처님은 밝고 앞이 트인 곳에 모셔야 한다. 우리 나라의 모든 법당은 사찰 안에서 가장 양명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석굴암도 마찬가지다. 볼록한 터 위에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음습한 골짜기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다.
- 석굴암이 들어서 있는 토함산은 석굴암을 포함한 그 자연환경 전체가 전시관인 동시에 성보 공간이다. 석굴암은 이러한 정신으로 토함산에 조성되었다. 유현한 기운이 감도는 이 성보 공간에 새 건물을 세워 성보 환경을 훼손하는 행위는 재고되어야 한다. 불국사가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드러난 자리에 세워진 것과 달리 석굴암은 토함산 후미진 곳에 감추어져 세워졌음을 알아야 한다.
- 현재 건립하려는 건물은 분명히 ‘석굴암역사유물관’이고, 그 속에는 석굴암 모형전시실, 석굴암의 과학을 알리는 역사실, 그리고 영상실 등이 들어가도록 계획되어 있다. 말 그대로 이 건물이 전시를 위한 것이라면 ‘문화유산’인 석굴암의 보존을 위한 차원에서도 석굴암 가까운 위치에 들어설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나라 문화유산 보호에 관련된 법률과 규정,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을 위배하는 행위다.
- 만약 지금 계획한 자리에 ‘석굴암역사유물관’을 건립한다면, 관람객은 현재보다 훨씬 더 증가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현재의 석굴암은 신앙 공간의 확보와 문화유산의 보호에 더 불리해진다. 많은 관람객들이 역사유물관에 와서 모형으로 조성된 ‘가짜’만 보고 ‘진짜’를 보지 않고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조품만 보고 진품을 보지 않고 돌아간다면, 석굴암의 이미지가 왜곡되고 폄하될 위험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복제한 문화유산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한 문화유산에는 그것을 조성한 장인의 혼이 들어가 있다. 거기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것을 현대과학과 기술로 아무리 잘 재현한다하더라도 석굴암에 깃든 정신과 본존불이 주는 감동을 살리기 어렵다. 현재 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는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석가탑과 다보탑 복제품이 이를 증명한다. 석굴암과 그 안에 모셔진 부처님을 똑같게 복제할 수는 없다.

불사는 실험이 될 수 없다
이상 언급한 몇 가지 문제점들을 충족시키며 석굴암을 보호하고 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는 일을 상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는 것이 현재 ‘석굴암’이 직면한 초미의 현안인 동시에 현대 한국사찰이 안고 있는 불사문화의 한 가지 현안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 ‘석굴암역사유물관’은 현재 결정한 곳보다 더 좋은 위치에 새로운 설계안으로 세워져야 한다. 이와 동시에 석굴암은 신행 공간 본연의 자리가 되어야 하고, 또 지금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던 석굴암 원형 파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는 기회도 마련되어야 하며, 나아가 석굴암의 원형을 회복하여 석굴암에 모셔진 본존불을 포함한 여러 부처님들께 죄송스런 마음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여야 한다.
불사는 실험적인 것이 되어도 안 되고, 더구나 반대가 있는 가운데 진행되어서도 안 된다.
불사는 사부대중의 지지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 현 위치에 ‘석굴암역사유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이 건물이 현재 결정한 곳보다 더 좋은 위치에 세워져 더 바람직한 불사가 되어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루어지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석굴암이 ‘신행공간’ 본연의 자리를 회복하고, 동시에 ‘문화유산’으로서도 우리 후손들에게 교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방안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찬반 대립을 불교가 가진 원융과 화쟁 정신으로 풀어 더 높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그것을 이 기회에 보인다면, 역사유물관 건립 문제의 해결은 현재와 같이 혼탁한 우리 사회에 불교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역할은 최근 들어 사찰 주변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이로 인해 사찰의 수행 환경이 위협받는 데 대해 불교계가 수행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움직임에도 엄청난 설득력을 갖게 만들 것이다.
‘석굴암역사유물관’ 문제가 타산지석이 되어 참다운 의미의 현대 한국사찰이 탄생되고 불사문화를 보여주는 계기가 됨은 물론, 기존의 많은 ‘불교문화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떨칠 수 없다. 거기에는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대장경과 장경판전에 대한 연구도 물론 포함되어야 한다.

참다운 불사정신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가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은 현대 서구 공업문명을 그 근저에서부터 비판하고 있다. 유한한 자원을 무작정 써버리는 일, 인간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일, 대규모 조직을 무조건 선호하는 일 등이 비판의 중요한 대상이다. 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달려왔던 우리 경제개발도 그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 체제에 속박되어 있던 인간을 다시 주역의 자리로 끌어올려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슈
마허는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써서 인간을 파멸의 길에서 구해내려고 하였다.
물질 문명을 반성케 하고, ‘작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의 본질인 것을 나는 한국 현대불교가 참다운 불사문화를 통해 보여 주었으면 한다. ‘올바른 생활(正命)’은 불교의 ‘팔정도’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백장청규〉에서 말하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 뜻하는 바를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활력을 주며 최고의 능력을 끌어내도록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번영하기 위해 사찰 전각이 커야 하고 조직이 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사문화를 지배한다면 그것은 21세기 시대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생활 수준, 자기 실현, 자기 완성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물질세계의 충족에 이르는 것과 다르다. 그러한 현실 세계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불교와 사찰을 찾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것들이 불사문화에 반복되는 것을 보인다면 현대 한국불교는 중요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르네상스, 갈릴레이,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 물질문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빠른 변화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간직되어 온 것들을 급속하게 사라지게 하였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객관적이고 양적인 크기로만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의 삶을 내포하는 경험적인 것과 질적인 것이 배제되어 있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반성이 대두되는 시대가 21세기다. 그 일을 하는 것을 한국 현대사찰과 불사문화에서 볼 수 있다면, 그건 이 시대
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참다운 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