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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해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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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 1993년 04월 134호
아지랑이에 몸을 실은 듯 둥실거리는 학생들의 경쾌한 걸음을 좇으며 캠퍼스를 가득 채운 봄을 본다. 가벼운 옷차림, 봄냄새 물씬 묻어나는 웃음, 스치는 정겨운 인사말, 겨우내 잠들었던 갈빛 표피를 푸른 생명의 움직임으로 물들이는 크고작은 나무들, 그리고 금빛으로 풍요롭게 빛나는 잔디밭에 서 있는 관세음보살의 미소, 완연한 봄이다. 파르라한 머리를 반짝이며 옅은 재색 법복을 입은 스님들이 학생들과 마주서자 아이들처럼 웃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곳, 동국대학교에는 배우고 노력하는 이들의 서원을 다 안아들일 듯한 따사로운 봄이 온 것이다.
오전 10시. 이른 아침의 서늘함을 벗어버리고 온전한 햇살로 따스해지는 시간이다. “아침 일찍 오느라 힘들었지요? \" 하시며 우리를 맞은 해주스님은 녹차를 내어주며 곱게 웃음 짓는다. 낯익은 음성, 낯익은 침착함 그리고 정갈한 모습의 스님을 대하며 새삼스레 감사하고 기쁠 뿐이다.
해주스님은 우리 일반 불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는 공인(?)이 자리에 있다.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의 해주스님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아 -”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서둘지 않는 침착한 설명과 야무진(?) 말매무새로 초발심자나 배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노보살님들의 가슴에도 쉬이 정법을 알려 준다.

비구니 스님만의 지상함과 세밀함으로 우리 불자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달래 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몰라 어려움을 느꼈어요. 샤머니즘에서부터 심지 법문에 이르기까지 그 질문은 매우 다양했어요. 그러면서 느낀 점은 우리가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과 일반 대중들이 느끼는 불교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입니다
배운 이들의 반성을 요하는 일이지요. 한 일 년쯤 자비의 전화를 했었는데 그때의 보람은 불법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비의 전화 질문에 스님은 다소 겸연쩍어 하며, 현재 우리 모든 불자님 저마다의 역할이 중요함을 더불어 지적한다.

해주스님은 화엄학을 전공하였다. 국내에서 석, 박사 모든 과정을 마친 보기 드문 경력을 가지고 있다. 87년에 첫 강의를 맡았고, 지금은 일 주일에 닷새 강의를 맡아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스님은 청도 운문사로 출가하여 운문사 도감 소임을 맡고 있던 성관스님을 은사스님으로 모셨다 한다. 출가 당시 스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마음자리를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뿐이었단다. 강원을 통해서만 스님다움을 배울 수 있다고 하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도 있었거니와 누구나 강원을 마쳐야만 한다고 하기에 마음을 다지면서 오 년의 강원 과정을 마쳤다. 능엄경과 원각경을 마치면서 선방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일었는데, 화엄경의 ‘일체유심조’ 라는 경구를 대하면서 교학을 통해서도 해탈지견할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들어 동국대학교에 들어와 학승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 ‘일체유심조’ 마음을 다스리는 것, 유심, 일심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교학을 통해서도 평생 공부인 마음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화엄경 경구의 강한 인상 때문에 화엄학을 공부하게 된 것이고요.”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습 탓이 아니겠냐며 스님은 웃는다. 모질고 독해야 학문할 수 있다고 하는데, 쉬어 가고 싶게 하는 넉넉한 부드러움과 크게 격앙되지 않는 경상도 사투리 끝에 묻어나는 정겨움 어느 곳에 그토록 강한 열정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선종 중심의 한국 불교 안에서 교학의 중요성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동국대학교의 불교대학도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리라.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어 안팎으로 외국에 나가 학문을 배워 오는 유학이 어느덧 당연한 코스처럼 되었다. 해주스님은 이에 조심스런 우려를 나타낸다.

“폭 넓게 수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찬성입니다. 하지만 우리 것이 부족하다는 인식 아래 우리 것에 대해 연구없이 하는 유학은 반대입니다. 한국 전통 불교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지식을 갖춘 뒤에 더 나아가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역사 자체보다도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사관이 중요해요. 외국의 사관으로 한국 불교를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한국 불교를 왜곡시킬 뿐입니다.”우리 스스로 자신의 자리매김을 확실하고 견고하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전통과 변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말인 듯싶다.

옛날에 어른 스님들은 동국대학교에 가면 중물이 빠진다고 이야기하고, 유학을 가면 속퇴한다고 걱정을 했단다. 비단 환속만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리라 한다. 전통 없는 변화란 뿌리 없이 흔들리는 대로 나부껴 언젠가는 좌초되고 말아 전통을 되돌아보는 법 없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변화에 편승하여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갖추게 됨을 걱정한 것이다. 고지식하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라고 일축할 것이 아니라, 변화와 개혁의 거센 움직임이 가득한 요즘에는 가슴에 두어 밑거름을 삼을 만한 이야기리라. 스님은 전통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요즘 불교 연구 모임들이 과거의 것, 한국 불교의 전통을 찾아 들어간다고 할 때 그 과거가 어느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흔히 조선 오백 년에 이루어진 산중 불교를 우리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전통은 우리의 진정한 전통은 아니지요. 한국 불교가 지향해야 할 전통은 불교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고 당당하게 중생들과 더불어 숨을 쉬었던 신라, 고려에서 찾아야 합니다.”부처님의 말씀이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발현하였던 시대에 한국불교의 전통이 있음은 당연하다는 얘기이다. 전통의 문제로 소급해 들어가는 해주스님의 모습은 담아 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진지함과 열기로 조금 상기된 듯 볼그레하다.

불교에서의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에 스님은 먼저 웃음으로 대답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여성의 위치는 늘 보조 역할자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는 식의 부차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 그러한 편파적인 교리는 자기 점검을 시도해야만 되지 않을까.
스님의 웃음도 같은 의미이리라. 해주스님은 “불교여성학” 이라는 강좌로 첫 강의를 맡았다고 한다. 비구니 스님이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에 따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국적인 불교인 만큼 비구스님이 비구니 스님에게 강의를 듣는다는 묘한 거부감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어느 불교신문에서는 말도 안 된다는 식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의 일을 가볍게 여담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스님은 고운 두 손을 마주잡고 손놀임을 몇 번 하시며 그 무렵의 상황은 놔두고 여성 문제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신다.
스님은 전공으 화엄학인데 여성학 강의를 맡고 이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은 그 분야가 거의 백지 상태였고 인재 또한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관심은 상당히 있어요. 전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연구할 인재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분이 있으니 앞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강의했던 ‘불교여성학’ 강좌가 이미 교과목에서 폐지된 지는 오래되었어요. 당시 기독교에서는 여성 문제가 대단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도 필요없다는 이유로 없어진 겁니다. 학생들이나 모든 이들이 필요하다고 했는데도 그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어요. 이러한 상황은 한국불교의 전통이 잘못된 자리에 있어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남, 녀라는 유교적 전통이 불교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인데 이를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인식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본디 부처님 말씀이 어땠는가에서 문제의 핵을 찾아야만 한다고 설명한다.
비구니 팔경계는 인도 부파말기에 등장하였다. 그 시대 상황이 매우 험악했고, 그러한 가운데 불평등한 계율이 성립된 것이란다. 그리고현재 우리 한국 불교가 고수하는 비구 250계, 비구니 384계도 대승이 아닌 소승불교 가운데서 가장 보수적인 상좌부 계율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한다. 스님은 여성의 문제에 국한시키기 이전에 과연 한국의 대승불교에 합당한 계율인가 하는 과감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정신은 보살행 중심의 대승불교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고 있는 계율은 가장 완고한 아라한과의 증득을 궁극으로 하는 소승불교의 것입니다.
견성을 지향하는 대승이 소승불교에 얽매인 셈이지요. 정신과 행동이 맞물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우리에게 걸맞는지. 그리고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살펴본 뒤에 용기있게 인정하거나 변화를 감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가깝게 문제를 접하는 이는 누구인가 . 여성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움직임도 여성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여성이 피해를 받는 입장에서 시작한다면 끝없는 논쟁만이 있게 될 거예요. 집단 이익만을 고수하는 주장밖에 안 되니까요. \'왜 우리가? 왜 내가?‘ 하는 식의 주장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과연 부처님 말씀에 합당한지, 이 사회속에서 바람직한 일인지 하는 궁극적인 문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일체개공 성불도를 말씀하셨지요. 불교는 만인을 위한 것이지 어느 한정된 이들을 위해 열어놓은 종교가 아닙니다. ’옛날부터 해 왔다고‘ 고 할 할 바에야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지요. 왜 부처님은 인도의 사성 제도를 반대했겠습니까. 모든 중생의 평등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세계의 역사 구조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차별적인 의식 아래 비구, 비구니라는 분리된 의식이 배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의 계율에 대한 전반적인 재진단과 이에 따르는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모아져야 할 듯하다. 그리고 여성의 문제도 피해자라는 감정적인 것에서 벗어나 부처님 법 안에서 해결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일하게 현재의 위치에 머물러 계율의 구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 것인지, 진실된 법안에서 대승 정신과 부합하는 계율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지, 이 문제를 율원에 계신 분들이 먼저 표면화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날이 오리라는 기대는 요원한 것이라 한다. 설사 문제를 인식하게 되더라도 그리 서둘러 해결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좀더 근본적인 인식과 자각으로 정법을 구현한다는 각오로 우리 불교를 이끄는 많은 여성 불자와 스님들이 이를 맡아 주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한국불교의 수레를 여기까지 근실하게 끌고 온 것은 보살님들의 돈독한 신심과 자신보다 남을 더 위하는 마음에 있음은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성불할 날은 까마득하고 부질없는 탐욕으로 업장만 짓는 여성으로 한정지워 놓았습니다. 이제는 여성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 그대로 살고 정진하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
크지 않은 음성으로 되풀이되는 말없이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 가는 스님의 모습에서 비구니 스님의 마땅한 자리를 찾아가는 선구자적인 진지함을 느끼게 한다. 순수한 표정에 힘있는 이야기를 담아내면서도 스님은 따스한 눈빛으로 있다. 감정적으로 여성의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신심과 뭇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행하는 것이 진정한 불교인가 하는 냉철한 자문에 귀 기울이고 과감한 인정과 변화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각자의 지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불교는 화합의 종교입니다.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분열과 대립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사부대중을 하나로 묶어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합니다.”
스님은 재래적 관습과 현재의 개혁 사이에서 존재하는 혼란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진정한 불교를 알리고 분열의 간극을 좁히는 데서 부처님 제자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한다.


연구실 창문으로 스며든 봄볕이 스님의 고운 이마 위에서 반짝인다. 사진 기자가 밖에 나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스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웃으신다. 청에 못 이겨 밖에 나가 사진을 찍는데 스님은 웃으실 줄을 모른다. 개나리 꽃술을 금방이라도 터뜨릴 듯한 파란 하늘에 곱게 승복 여미어 입으시고 두 손 모아 바르고 정직하게 사진기 앞에 있다. 사진에 익숙하지 않아 언제나 그 어색함으로 몸이 저리던 어린 소녀의 모습을 닮았다. 스님은 교정을 함께 지나면서 인사하는 이들을 향해 단정히 합장 답례를 한다.
“성불하여지이다.”
스님의 원력이다.
공덕행을 통해, 부처님의 제자로서 사명을 다하여 성불하여지이다. 스님의 원력이 이루어지는 길에 수천만 불자들의 가슴은 반야등으로 봄날 물오르듯 충만한 환희심으로 빛날
것임을 믿는다.
푸드득 일제히 터져 나올 꽃들, 향기에 취한 듯 너울거리는 나비들이 정문을 나서다 문득 고개 돌려보면 바로 그득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