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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안거의 또 다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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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성원 2002년 06월 244호
불법을 불멸의 진리라고 말하지만 과연 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당장에 제행무상諸行無常과도 상충되는 것도 같고,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했는데 불멸의 본질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많은 전적들을 뒤척여보지만 웬 설명들이 그리도 길고 지루한지. 또 다시 본질의 단순함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우리는 괴로워한다.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화엄경》 어디엔가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 이르면 뭔가 답답함이 풀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혜안慧眼이 열리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는가?
불변의 진리는 그렇다 치고 여러 가지 제도들은 많이 변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초기의 안거는 지금의 분위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결제는 마치 결사決死의 장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산철 만행하던 몸과 마음을 추스려 다시 공부인의 자세로 돌아가 마음을 챙긴다.

최초 안거도 부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시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다. 부처님 당시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율장》에 따르면 결제의 시작은 당시 다른 교단들이 한결 같이 안거라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을 보고 많은 신도들이 ‘부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건의를 하자 부처님께서 받아들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훗날 많은 논사들은 부처님께서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충분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많은 타당한 많은 이유를 내세웠다.
우기인지라 만행하면 본의 아니게 많은 생명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과 범람하기 쉬운 강물로 인해 수행자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등이다. 물론 이러한 것을 논지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따르긴 한다. 후기 대승경전에 부처님께서 직접 이러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깊은 이유를 숙명통으로 꿰뚫어 보시고 받아들였겠지만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안거제도를 받아들였다는 사실보다 이러한 제도를 승단운영에 매우 적절하게 유용하신 데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원죄설과 속죄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여타 종교와 달리 많은 불자들은 어떻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참회해야 하는지, 어떻게 죄가 소멸되는지 모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여기에 관해서 많은 이론이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잘못을 저지른 경우 참회하려면 여러 사람 앞에서 고백하고 낯 뜨거워짐을 당하는 것이다.

수행자들에게 있어 모든 죄가 고백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일생을 두고 돌이킬 수 없는 바라이죄같이 무거운 죄도 있지만 대부분의 과오는 여러 스님들에게 고백하고, 그 스님들이 거짓 없는 고백임을 받아들이고, 또 스스로 부끄러워함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물론 대승의 심지계心地戒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겠지만 초기 율장에서 보면 최소한 그렇다. 그러나 죄를 아무 스님, 아무 곳, 아무 때나 이야기한다고 참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가벼운 범법행위는 한 명의 스님에게 고백함으로 해결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충분한 인원을 요구한다. 구성인원의 수를 매우 중요시하여 해당 범계한 조목을 용서받는데 필요한 인원에서 단 한 명이라도 부족하면 그 죄를 용서받은 것으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기 안거는 수행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함께 모인 많은 스님들 앞에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시간이요, 자신의 청정을 새롭게 하는 시간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결제 중에 행해지는 포살과 자자에 대한 규정은 매우 세밀하고 엄격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수행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 사문들은 수행이 일과의 전부요, 삶의 전부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결제기간에 특별히 수행을 강조하지 않은 이유는 결제를 하든, 유행遊行을 하든 간에 수행은 물과 공기처럼 늘 출가자들과 함께 했던 것이다.
훗날 사원의 운영에 전력해야 하는 승려가 생겨나고, 사회적인 활동에 치중해야 하거나 경전 공부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문이 생겨났고, 무엇보다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중요시하는 선종이 풍미하면서 지금과 같은 의미로 결제가 굳어진 것 같다.
벌써 결제가 다가 왔다.
이번 결제는 대중 앞에서 나를 참회로 한 번 더 자신을 추스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