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집은 그 자리로 보아 가히 명당이라 할 만하다. 명당이라 할 것이, 북악산이 마주보이는 인왕산 자락에 있는 이 곳은 지대가 높아서 공기도 맑으려니와 시야기 탁 트여 서울 사대문 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전망을 이루고 있어서이다. 또 옆으로는 남산이 멀지도 높지도 않게 건너다 보이고 이 나라 최고 통치권자가 사는 청와대도 눈 아래로 빤히 보인다.
청와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을 차지한 덕분에 ,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동네는 오랫동아 적잖은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원부지로 묶여 곰짝달싹 못하게 되었고 또 바로 집앞에 경찰 초소가 생겨 집을 드나들 때마다 검문을 받아 온 것이다. 통제가 심하던 한때는 청와대 쪽을 향한 시야를 아예 차단당했는가 하면, 또 언젠가는 전경인지 의경인지 그런 경찰부대- 우리는 꼬챙이부대라고 불렀다.-가 혹시나 폭발물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가 해서 무리지어 꼬쟁이를 들고 다니면서 온 동네 땅바닥을 두들기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도 겪었다.
시절이 좋아져 김영삼 새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그 동안 막혀 있던 인왕산 쪽 길이며 청와대 주변 길이 통제가 풀려서 우린 동네는 주말이면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연신 지나다니고 청와대를 구경하려는 승용차로 부적거리는, 서울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새 정부가 잘한 일로 청와대 주변의 개강을 첫전째로 꼽으며 좋아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요란스레 칭찬할 일까지는 못 된다. 너무나 마땅한 조치를 두고서 떠들썩하니 칭찬하는 모습에서 온갖 모순과 질곡의 세월에 익숙해진 우리네 삶을 새삼 실감하여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쨌든, 우리 집 주변은 예전같지 않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그 행인들 대부분이 인왕산에 있는 악수를 뜨려고 물통을 들고 다니는 이들이다. 나도 이제껏 통제되어 다니지 못하던 산길을 자유롭게 오가는 즐거움도 누릴 겸 아울러 오십 줄의 나이에건강도챙길 겸해서 남들처럼 인왕산을 오르곤 한다. 그리고 또 남들 하듯이 인왕산 약수도 마셔 보았다. 물맛은 기대 밖으로 나빴다. 그래도 인근의 사람들은 그 물을 귀하게 여겨 부지런히 떠간다. 하기사 서울 사람들은 그 맛도 없고 좋을것도 없는 물이라도 떠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디 비단 우리 동네의 인왕산뿐인가. 서울의 이산 저산에서 아니 전국 곳곳에서 대도시 부근의 산골에서마다 물통을 길게 늘어 놓고서 물 떠 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곤한다. 꽤 오래 전부터 일상사로 굳어진 이런 정경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쉬이 읽어 내릴 수 있다. 바로 집 안에서 언제라도 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그 편리한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요 불안이다.
얼마 전, 변호사 출신의 신임 환경처 장관이, 국민들의 이런 불안감을 익히 헤아려, 무엇보다도 먼저 서울의 수돗물을 마음놓고 마실 수 있게 하겠노라 장담하였다. 나는 솔직히 그 자신감의 구체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퍽이나 미심쩍다. 지금까지도 그랬을 테지만, 그의 장담이 보장한 앞날에도, 그 스스로가 과연 수돗물을 먹을지는 더더구나 의심스럽다.
나는 사진 찍는 일을 업으로 삼은덕에, 한 주일 사이에도 여러번 우리나라 곳곳을 종횡으로 다니며, 행복스럽게도,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좋다는 물을 마음껏 떠 마시며 살고 있다. 그렇게 해서 마셔 본 물 가운데에서 물맛이 가장 좋기로는 강원도 오대산 북대의 우통수 물이 단연 최고이다. 물맛이 차고 시원한 것이 여간 훌륭하지가 않다. 얼마나 차가운가 하면 물을 담아 서울 집에 올 때까지도 물통에 서리가 차 있을 정도이다. 사실, 맛의 좋고 나쁨과 그 물의 깨끗함 여부는 서로 다른 문제이겠지만, 사람인지라 입에 달고 맛난 물을 먼저 꼽게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물맛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오대산 북대 물 말고도,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 내원암이나 통도사 백련암, 그리고 설악산도 물이 썩 좋은 곳이다. 반면에, 지리산은 산이 크고 좋은 데에 견주어 물맛은 아주 떨어진다. 그곳 물은 거센 흑수인데, 산에서 직접 마실 때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집에까지 떠오면 영 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세치 짧은 혀로 물맛을 이러니 저러니 하고 쉬이 단정하는 것도 어리석음의 소치가 아닌가 싶다. 물이란 게 참으로 묘하고 재미있어서이다. 이를테면 다같이 높은 산 속의 물이라 해도 오대산 북대 물은 시원하고 맛있는데 해남에 있는 대흥사 일지암 물과 설악산의 영혈사 물은 미지근하고 맛도 없다. 그런데 그냥 마시면 맛없는 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차 맛이 유난히 달고 좋다. 실제로 차를 잘 아는 이들은 북대 물처럼 찬 물은 꺼리고 대흥사 일지암 것 같은 물을 높이 친다고 한다.
이렇고 보니, 물 하나에서도, 미욱한 사람의 머리로는 다 헤아릴 길 없는 그 묘한 자연의 섭리를 느껴 탄복하게 된다. 특히나 산 좋고 물 좋고 땅이 좋아 일찍이 금수강산이라 이름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강에서, 내에서, 우물에서 언제든지 마음놓고 그 맛난 물을 떠 마실 수 있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여느 나라들처럼 물 대신 차나 맥주나 포도주 따위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 우물에서 갓 길어 올린 시원한 냉수나 숭늉 한 그릇보다 더 좋은 차가 또 어디 있었던가.
그런데 어느덧 경제 성장과 현대화 틈을 타고 금수강산을 마구 깨뜨리고 더럽히고 버려 놓아, 이제는 이 나라 사람들도 차를 마실 수밖에 없고 오염이 덜 된 좋은 물을 찾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는 하나, 실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더 많으니 그 정도가 치명적이다. 공장 폐수와 쓰레기와 세제며 농약과 화학비료에 전국이 오염되고, 산을 깎아 길을 내고 집을 짓고 골프장을 만들고 하는 바람에 강산은 치유할 길 없이 생명력을 잃고 있다. 더구나 서울의 입맛 까다로운 이들을 겨냥한 고랭지 채소 가꾸기까지 가세하여, 우리나라의 큰 하천은 그 최상류의 원천부터 깡그리 오염되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에서만 어렵사리 맑은 물을 볼 수 있다. 그 뿐이랴, 농사짓고 사는 마을에서도 마음놓고 우물을 파 먹을 수 없게 된 것을. 역사가 바뀌고 사람은 바뀌어도 산천은 의구하다던 옛말은 이제 죽었고, 목마른 나그네에게 버들잎 띄워 우물 물 한 사발 대접하던 낭만일랑은 아득한 전설처럼 들린다.
단군이래 오천 년 동안 의구하게 보존되어 오던 이 땅이 이렇게 치명적으로 망가진 것은 불과 최근의 몇 십 년 사이다. 고도성장의 삽질에 땀흘리던 사람들, 코앞의 자기 이익이 더 소중한 사람들이 까맣게 잊은 게 있다. 이 땅은 앞으로도 오천 년, 몇 만년을 두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라는 사실 말이다. 어떻게 내 아들이 사랑스럽고 내 손주가 어여쁜 줄은 아는 사람들이 그들이 앞으로 누리고 살아갈 이 땅의 보존에 대해서는 그리 무심할 수 있는지.
만시지탄이라고는 하나,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이 땅을 다시 살리고 잘 지켜나가는 데에 힘써 후손들에게 평안히 살 터를 물려주어야겠다. 신한국 창조니 신경제 정책이니 하는 것도 좋지만, 새정부의 경제 활성화의 일환으로, 편법 아니고는 풀 수 없던 여러 규제들이 내 집 앞길이 그랬듯이 마구 풀려서 공장도 쉽게 들어서곤 하는데, 그런 일련의 행정 속에서 우리 국토가 지금보다 더 급속도로 더 파괴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국토 보존에 관한, 정부의 좀더 사려 깊고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이 단행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의 수돗물 이야기로 돌아가자. 서울의 온갖 하수들이 이렇다 할 정화 과정 없이 곧바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 수도권 사람들은 소독약에 잔뜩 찌든, 또 그래도 오염 성분이 다 씻기지 않은 수돗물을 마시며 살 수 밖에 없다. 나처럼 전국에서 가장 좋다는 물을 집에 길어다 놓고 마시는 것도 일종의 사치 누리는 즐거움 밖에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 밖에 나오면 온통 오염된 물에 둘러싸여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이미 오래 전에 조성되어 있는 이 도시에서 현재의 그런 악 구조를 완전히 개선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른다고 한다. 따라서 그런 문제를 줄이는 방법으로, 기업 하는 사람이나 일반 시민이나 할 것 없이 물을 쓰고 폐수를 하수로 내보내는 일에 조심하며 신경을 쓰는 것도 무엇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눈앞의 편리함과 욕심에 겨워 이 땅과 물을 마구 더럽히고 부수고 하던 파괴의 손길을 거둘 때이다. 이 땅은 지금은 내가 살고 있지만, 내일은 내 아들, 손자, 증손자들이 살아갈 땅임을 늘 염두에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