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신흥 종교의 특징과 발생요인
우리나라는 흔히 ‘종교백화점’ 이라고 할만큼 수많은 종교가 뒤섞여 있다. 그리고 그 수효는 계속 늘어가고 있는데, 1975년에 252 가지이던 것이 1978년에는 315가지로 1980년에는 404 가지가 되었다. 특히 1980년 이후에는 신흥 종교가 예전의 깊은 산속에 은거하던 폐쇄적, 도피적 신앙 형태에서 벗어나 대도시 속으로 파고들어 공개적인 포교 활동을 벌이는 양상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이는 산업화, 도시화의 추세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으로, 도시에 집중된 오늘의 신흥 종교들은 일반 서민의 정신적 불안 의식을 이용하여 그 기반을 넓혀 가고 있다. 한국신종교 실태조사보고서(’85.12, 한국 종교학회)에 의하면, 신종교 228개 단체(조사 대상)가운데 72개가 서울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대부분 심령과학 연구원과 같은…연구원, …회 등의 명칭을 붙여 마치 일반 사회단체 같은 색채를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독립된 종교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신흥종교를 모두 사이비(似而非)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흥종교의 80% 이상이 근거없는 사이비 유사종교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전문가들은 사이비종교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 기성 종교가 보이지 않는 사후(死後) 세계를 말하는 것과 달리 직접 볼 수 있는 지상천국론을 주장하거나, 둘째, 우리만이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선민사상을 강조하며, 세째, 시한부 말세론을 주장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헌금을 강요하거나 재산을 탈취하고, 넷째, 성경이나 경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신도들을 미혹하고, 다섯째, 교주를 비롯한 간부들이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따라서 사이비 종교꾼들의 포섭 대상은 소외계층이다. 곧,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채워지지 않아 신음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포섭 대상이 된다.
32명의 동반 자살극을 연출할 수 있었던 박 순자의 경우도, 기독교 모 교파의 교리와 생활을 답습하여 말세론을 내세운 맹목적 신앙과 폐쇄적 고립 상태의 집단생활을 통해 신도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놓고는, “돈을 많이 끌어들이는 사람만이 은혜와 복을 받는다” 또는 “이웃의 재산은 성령으로 차입하라. 그래야만 그 사람도 구원받는다”라고 하여 1백억원이 넘는 사채를 끌어들여 유용하는 사기 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기 행각은 급기야 집단자살로 이어졌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러한 일들이 의외로 우리 주변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다. 이들 사이비 종교는 특히 ’80년 이후에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고대 사회학과 노 명길 교수는 사이비종교단체를 포함한 신흥 종교의 발생 요인으로 급격한 변화에 따른 사회구조의 불안정과 물질 우선의 지나친 경쟁,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절대적, 상대적 박탈감 및 기존의 공동체와 가치체계, 규범, 권위의 붕괴 들을 지적한 바 있다. 곧,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신흥 종교의 발생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거꾸로 생각하면 급증하는 종교의 수효는 바로 사회 불안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고 볼 수 있다.
확실히 종교의 수효는 60년대, 70년대 이후로 꾸준히 증가하여 왔다. 급격한 산업화 정책에 따라 빈부격차를 비롯한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장기 독재정치로 말미암아 만연된 불신감을 비롯한 사회구조 상의 제문제는 사람들에게 소유로부터, 정치로부터의 소외감을 증대시켰고, 소외 극복을 위한 ‘도피심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부쩍 종교에 의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그에 편승하려는 사이비 종교가 깊숙히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사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현실에 비교하여 확실한 미래-천년왕국등-의 제시와 집단적 공동체의식의 주입은 환상적일지는 모르지만 일시적인 안정에는 그처럼 주효한 것도 없다.
오대양교의 집단생활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는데, 6세 이하는 육아원에서, 국교생부터 대학생까지는 학사(學舍)에서, 직원들은 기숙사에서 살며 외출도 2주 1회로 제한되었고 그나마 단체외출만 허용하여 외출중에는 서로 상대방의 행적을 감시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학사의 학생들은 세뇌당하여 스스로를 ‘고아’ 라고 하며 “우리의 유일한 부모는 박씨”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부모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된 극단적 사고방식과 또 소속감을 느끼고 싶다는, 홀로서기 불안한 소외인들의 갈증이 그만큼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이비 신흥 종교의 발생 요인은, 첫째 사회 불안이라는 외부적 요건과 둘째 소외감 중대의 내적 요건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후자는 전자에서 파생된 결과라 할지라도 이는 분명 상대적 독립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소속감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이비 종교로만 몰려드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으로 우리 국민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는 점차로 종교에 무관심을 표명하는 서구의 현상과는 대조적인데, 특히 기독교세의 급증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으로 부를 소유하거나 명예를 거머쥔 것의 여부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보니 학교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외로움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모두들 자기 살기 바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경쟁하고, 모함하고, 도저히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다.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찾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기독교 계통의 교회이다. 의지함으로써 안정을 얻고 싶은 것이다.
종교를 찾는 것이, 종교인의 입장에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다른 특정한 종교를 선택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사이비 종교라 할지라도, 비난할 수는 없다.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이것이 아닌 다른 것과 먼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사이비 종교를 포함한 여타의 종교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현실을 벗어난 일시적인 ‘도피심리’ 에서 나온 불안정한 세태의 반영이라는 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사회 불안과 불교의 역할
사이비 종교 문제가 대두되면서 자연스럽게 봉착하게 되는 것의 하나가 기성 종교의 역할에 관한 문제이다. 기존의 거대한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는 몇몇 종교들
이 사회를 이끌고 계도한다는 점에서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들 공공연히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성종교라는 범주에는 분명 불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다종교 사회라는 우리 현실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기성 종교’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개념적 정의의 범위는 어떤 것일까부터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교’와 ‘사교’ 또 ‘종교’와 ‘사이비 종교’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의 ‘사이비’는 ‘곁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기준을 잡을 것인가? 앞에서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의 특정을 몇 가지 예로 들었으나, 이는 공통분모를 추출한 피상적인 것일 뿐, 판단의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다. 엄밀하게 구분하려면, 오대양과 같이, 행동에 의한 결과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결국 판단자는 불자 개인이나 교단의 행동으로 표출된 현상을 통해 결론을 내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떠한 까닭으로 사이비가 아닌 기성 종교라고 일반인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가? 앞에서 열거한 사이비의 특징에 들지 않기 때문인가, 부처님 이래로 2,530여년의 역사때문인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1,600여년 동안 민족과 고락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가? 그래서 민족문화의 찬란한 바탕을 이루었다는 과거 때문인가? 물론 이러한 기득권 덕분에 불교는 어떠한 행위를 하여도 사이비라고 매도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이라는 물음을 던져 보자. 불교는 앞서 기득권이라고 표현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이 민족의 현실을 남의 일 보듯 할 수 없는 민족과의 일체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업적만을 자랑하는 것으로 현재의 무기력을 자위함은 수치이다.
불교가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그것을 우리는 안일하게 방기해 왔던 것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는 서구문화의 급격한 진출로 가치관과 생활에서 큰 혼란을 겪어 왔는데, 불교는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옛날 것을 고집하며 한복 치마저고리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문화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너와 나라는 상대적 개념이 미약한 탓에 지킬 줄 모르고 빼앗겨만 온 것이다. 요즘들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우리것을 되찾자는 소리가 크게 일고 있으며 그와 함께 동양에 관계된 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운을 북돋아주고 지원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오히려 외래 종교인 기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교회 건물을 한옥으로 짓기까지 하는 변화가 일고 있다. 어찌 보면 물을 흐려놓은 당사자가 소독약을 뿌려 정수하겠다는 셈이다.
불교는, 또한, 우리 사회의 산업사회로의 전환 속에서 소외 대중의 안식처 역할도 수행했어야 한다. 한편, 위정자의 독재와 사회 속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거세하려는 적극적인 노력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오늘과 같이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고 혼란이 가중되는 사회 현실을 변모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어야 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사이비 종교를 일소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앞서 기성 종교로서의 불교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32명의 동반자살극은 그들 스스로 저지른 일이고 그 요인은 사회라는 좀더 큰 범위로 돌려진다 해도, 불교가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불교는 사이비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