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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와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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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 이용범 1990년 02월 96호
마르크스를 발견한 것은 붓다의 제자들이었다. 마르크스는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붓다의 제자들은 깜짝 놀라 붓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붓다 역시 곡차로 목을 축이던 중이었으므로 제자들에게 젊은 마르크스를 자리에 청하도록 했다. 제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붓다를 만류하였다.
“세존이시여, 어찌 저 버릇없는 젊은이를 자리에 청하려 하십니까? 저 젊은이는 간교한 꾀로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필시 저 젊은이와 자리를 함께 하신다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붓다는 입시울에 가벼운 웃음을 머금고 이윽히 제자를 바라보았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바가 있느니, 제자여, 어찌 엷은 두 귀로 그를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를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이 있느냐?”
“한번도 그를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제자의 대답을 꾸짖고 나서 붓다는 다시 마르크스를 자리에 청하였다. 제자들 중 하나가 마르크스에게 달려가 붓다의 뜻을 알렸다. 마르크스와 말을 나누고 있던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의 앞길을 막았다.
“마 선생님, 잠깐 행보를 멈추십시오. 어찌 고루한 사상 속에 헤매고 있는 그들을 만나려 하십니까. 분명 그들은 마 선생님을 궁지에 몰아 이 땅에서 내쫓으려 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나서 가만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분의 생각을 잘 모르오. 만약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나는 그 생각의 부정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야만하오.”
마르크스는 만류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를 따라 나섰다. 붓다는 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붓다는 안으로 들어서는 마르크스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이에 당황한 제자들이 따라 일어나 세존이 자리에 앉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붓다는 그윽한 시선으로 젊은 마르크스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예지에 빛나는 눈이며 정열에 찬 마르크스의 표정에 붓다는 저으기 흐뭇한 얼굴이 되었다. 마르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상호며 명상에 잠긴 듯한 붓다의 눈빛을 보는 순간 마르크스는 허리를 접고 깊은 절을 올렸다.
“예고없이 청함을 불쾌히 여기지 마시오.”
“말로만 전해 듣던 세존의 모습을 이 자리에서 뵙게 되니 더 없는 영광입니다. 청하옵나니 부디 제게 깨달음을 주소서.”
붓다는 수려하게 생긴 마르크스에게 술잔을 권하였다. 마르크스는 머리를 조아려 술잔을 받으며 조용히 붓다를 올려다보았다. 붓다의 제자들과 마르크스를 따르던 젊은이들은 이 두 사람의 만남을 매우 근심스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세존께서는 어인 일로 산을 버리시고 저자거리에 나오셨습니까?”
마르크스의 물음에 붓다는 빙그레 짧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몸이 산에 있지 않고 저자거리에 있으되 어찌 내 마음이 산에 없다 할 것이며, 몸이 산에 있다 한들 어찌 내 마음이 저자에 없을 것인가. 탐욕을 멸하고 나면 몸과 마음의 경계가 있을 리 만무한데 그대는 왜 내가 저자거리에 있다고 말하는가.”
마르크스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속세에 사는 몸으로 어떻게 몸과 마음의 경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중생의 몸은 곧 세속의 모든 일에 조건지워진 것이며 인간의 마음은 바로 조건지워진 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붓다는 청년 마르크스의 말에 귀를 모은 다음 그 자비로운 손으로 술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대의 말이 그르지 않거니, 마음이 물질에 대치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내가 설파한 바와 같도다. 관념은 육체적 경험에서 비롯되고 마음에 의해 인식되나니 마음은 곧 눈이나 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
마르크스는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짓고 나서 입을 열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인간의 삶은 바로 괴로움이며 무상하다는 것이 세존의 가르침이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의 괴로운 삶은 곧 신체에 주어진 조건 때문이며 이 조건을 바꾸어야만 참다운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찌 머리 속의 사념을 잠재우는 것만으로 몸과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붓다의 제자들 속에서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크스는 노려보는 제자들의 시선이 따가왔다. 마르크스를 따르는 청년들도 질세라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붓다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감미로운 미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마르크스 역시 진지한 낯빛이 되어 붓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변적인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일렀거늘 어찌 그대는 그런 말을 내게 묻는가. 모든 악은 무지(無知)와 사념(邪念)에 근원하느니, 바로 그것의 깨달음을 일컬음이니… 내가 가르친 법은 뗏목과 같은 것이요, 일단 강을 건너면 들고 다닐 것은 못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사문들은 왜 산사에 묻혀 있는 것입니까. 깨달음을 얻었다면 마땅히 그것을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어떤 사문들은 세속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 오히려 중생들의 무명(無明)을 조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르크스는 잠시 걱정에 사로잡힌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붓다의 제자들은 그의 무례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씨근씨근 숨을 삭였다. 여차하면 마르크스의 멱살이라도 바투 거머쥘 기세였다. 마르크스 옆에 있던 젊은이들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일전을 겨뤄보겠다는 자세였다. 붓다는 더욱 온화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들을 어찌 진정한 사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나’의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을 없앤다면 생각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느니, 단지 괴로움이 존재할 뿐 괴로와하는 개체는 발견되지 않도다. 행위가 있으되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요, 삶 자체가 곧 행위이며 운동이로다. 인간의 삶속에 해탈의 길이 열려 있음을 그 사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라. 내가 들은 바로는 그대의 생각과 나의 가르침이 상반되지 않을진대,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니 생성과 소멸의 속성을 모든 존재가 그 내부에 가지고 있음이 아니던가. 하여 모든 괴로움이 존재의 내부에 있음이 어찌 그대의 생각과 다르겠는가. 업(業)은 곧 인과(因果)의 법칙이며…”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마르크스는 재빨리 붓다의 말을 이었다. 붓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위에 있던 제자들과 젊은이들은 붓다와 마르크스의 입가에 흐르는 짧은 미소를 영문을 모른 채 멀거니 바라보았다.
붓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마르크스는 따라 일어섰다. 붓다는 홉족한 웃음을 머금고 출입문을 나섰다. 마르크스 역시 문을 나섰다. 남은 것은 붓다의 제자들과 젊은이들이었다. 제자들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끈 솟아올랐다.
“이 버릇없는 놈들 같으니. 세존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아직 피를 본 일이 없거늘 네 놈들이 피를 부르는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젊은이들 쪽에서 술잔이 날아들었다. 까페는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