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가 보는 노사분규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청사자의 소리 - 김유선
1987년 10월 68호
요즈음 일간신문을 보면 사회면에 ‘노사분규’라는 제목 하에 많은 기사들이 보도되고 있다. ‘…파업농성’, ‘임금협상결렬’, ‘무리한 요구 양자가 양보해야…’, ‘폭력시위 과격양상’ 등 수없이 쏟아지는 이런 기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무덤덤해지게 만들 정도이다. 그런데 이른바 ‘노사분규’라고 말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 불자는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사분규는 사실 그 말 자체가 틀린 말로서, 사업주와 정부의 처지에서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투로 쓰이는 말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계 유지와 권익을 위해 사업주와 정부에게 요구하는 ‘노동쟁의’가 옳은 말일 듯싶다. ‘임금인상’이나 ‘처우개선’과 같은 것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자에게 베푸는 커다란 시혜나 동정으로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대로 인간이 모두가 평등하므로 공존공생(共存共生)하는 차원, 곧, 사업주와 노동자가 동등하며 서로 공생(共生)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빈익빈 부익부, 이윤의 불평등 분배가 심화되어 온 우리의 경제 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은 저임금에다 세계 최장시간 노동으로 힘들게 살아왔으며, 정부의 정책은 언제나 사업주 위주의 정책이었다. 이같은 노동 현실 속에서 ‘양보’라는 말은 사업주나 정부에게는 해당되지만 더 이상 양보할 것이 없는 노동자에게는 언어도단인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여러 경전-능가경, 오불정삼매다라니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재화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곧, 보시에 의해 모든 악덕의 근원이 되는 빈곤을 없애야 하며, 여기서 말하는 재화는 집착하지 않는 참다운 보시불(布施物)임을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경제관이 분배방식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은 현재의 노동 현실에 비추어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설범망경(佛說梵網經)에 나오는 십중대계(十重大戒)의 여덟번째 계율은 “제것을 아끼려고 남을 욕하지 말라. 제가 아끼거나 남에게 제것을 아끼게 해서는 안 된다. 보살은 가난한 사람이 와서 달라 하면 무엇이든 주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또 같은 경전의 사십입경계(四十入輕戒)에서는 “세력을 믿고 무엇을 얻으려 하지 말라”(17), “혼자만 이양(利養)을 받지 말라”(26), “중생을 손해보게 하지 말라”(32)와 같은 계율이 있어,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재물을 구하거나 부정한 재물을 모으려 하지 말고 오로지 베풀라고 가르치고 있다. 곧, 불교의 경제적 관심은, 육바라밀(六波羅密)에 첫째가 보시가 나오듯이, 베풀고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에 있다. 법구경을 보아도, “탐욕에서 걱정이 생기고(食欲生憂) 탐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貪慾生畏) 마음에 탐욕이 없으면(無所食欲) 걱정과 두려움이 어디 있으리(何憂何畏)”라는 말씀이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는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로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모든 행위는 따라서 탐욕에 기인한 행동일 따름이다. 경전에 나오는 위의 말씀들은 사업주들이 재고해야 할 경구들이겠다.
인간의 생활에서 ‘노동’은 모든 발전의 원동력이므로 이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대우는 곧 현 사회의 불평등 구조의 해소이며 노동쟁의를 해결하는 첩경이다. 인도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쿠마라파는 노동의 평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일의 본질이 정당하게 평가되고 적용된다면, 그것은 인체와 식량의 관계처럼 고도의 기능을 가질 것이다. 그것은 영양분을 주고 활력을 주어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만들 것이다.” 곧, 노동쟁의의 해결은 노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선행되는 데에 있다. 아울러, 재화의 평등한 분배가 보시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복을 쌓아 두는 복전(福田)을 일구는 사업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재화는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이고 분배되느냐에 따라 선악이 판가름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오늘의 노동쟁의는 정부와 사업주의 각성에 의한 평등 분배가 이루어져 노동자들에게 적어도 최저생계임금이라도 보장되어야만 진정한 해결이 가능하다. 우리 불자들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말고, 이것을 곧 나의 아픔으로 알고 그 해결을 위해 여래의 사도로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