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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이 백운을 덮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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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2002년 06월 244호
결제가 되었습니다.
해제기간 동안 청산만이 지키고 있던 큰방은 결제가 되니 백운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청산과 백운이 어우러지니 불법佛法의 적적대의的的大意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흔히들 청산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주인의 의미로, 백운은 움직인다는 뜻으로 객을 비유할 때 사용합니다.
그럴경우 백운은 이理요 청산은 사事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청산은 변치않는 체體이기 때문에 이理, 백운은 늘 변하는 용用이기 때문에 사事라고도 하며, 또 정正과 편偏 즉 평등과 차별 의미로도 쓰입니다.
어쨌거나 이사理事가 잘 어우러져야 불법佛法의 적적대의的的大意가 그대로 드러나게 됨을 결제일에 더욱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선문禪門에서는 백운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오고가면서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는 수행자에게 비유합니다.
하지만 겉모양만 머물러 있다고 모두가 청산이요, 자유롭게 걸림없이 나다닌다고 해서 백운인 것은 아닙니다. 몸은 머물러 있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는 사람은 몸은 비록 청산이지만 마음은 백운인 것입니다.
몸은 걸릴 것 없이 다니지만 마음이 어느 한 곳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몸은 백운 속에 머물러 있겠지만 마음은 청산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느 때건 백운이 될 수도 있고 청산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운과 청산은 늘 함께 연기관계인 중도를 이루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운이 없는 청산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설사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청산이 없는 백운은 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제는 밖으로는 청산과 백운이 함께 어우러져 주객을 구별하지 않는 경계를 말함이요, 안으로는 내 마음 속의 청산과 백운 즉 주객을 나누지 않는 것 입니다.
또 결제란 가르치는 선지식인 주主와 배우는 납자인 객客을 주객으로 나누지 않고 치열하게 서로 탁마하는 회상會上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하여 청산은 무엇이며 백운은 또 무엇인지 이 산승이 한마디 하고자 합니다.

청산과 백운을 가지고 법거량한 경우는 먼저 동산양개洞山良价 선사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남전보원南泉普願과 위산영우山靈祐 선사에게 참학하였고 운암담성雲巖曇晟 선사의 법을 이었습니다.
문하에 운거도응雲居道應 조산본적曹山本寂 소산광인疎山匡仁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 오가의 일파인 조동종曹洞宗의 고조高祖가 되는 것입니다.
그 동산 선사에게 어느 납자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청산과 백운의 아버지입니까?”
“빽빽이 우거지지 않는 자이다.”
“무엇이 백운과 청산의 아이입니까?”
“동서를 분별하지 않는 자이다.”
“백운이 종일 의지한다 함은 무엇입니가?”
“떠나지 못함이다.”
“청산이 아무것도 모른다 함은 무엇입니까?”
“둘러보지 않는 것이다.”

동산 스님은 청산과 백운의 아버지는 빽빽이 우거지지 않은 자이며 어머니는 동서를 분별하지 않는 자라고 하여 청산과 백운을 한묶음으로 묶어 버립니다.
또 청산백운의 아버지와 청산백운의 아들이라는 대구對句를 세웁니다.
그리고는 청산과 백운을 다시 대구對句로 나누어 백운의 의지처는 청산을 떠나지 않는 것이고 청산은 늘 백운을 살펴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산과 백운은 하나이면서 또 둘이며 그리하여 둘이면서 또 하나라는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임제의현臨濟義玄 선사는 청산과 백운을 통하여 주객主客의 경계를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청산을 주인으로 백운을 객으로 비유한 것이 그 내용입니다.
특히 선사께서는 주인만을 위하려다가는 불법이 가라앉는다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빈중주賓中主 즉 객 가운데 주인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주중주主中主 즉 주인 가운데 주인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그러자 어떤 납자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그대 스스로 말해보라.”
“제가 말한다면 객 가운데 주인이 됩니다. 무엇이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그러자 게송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차견금시학도류嗟見今時學道流하니 천천만만인문두千千萬萬認門頭로다.
흡사입경조성주恰似入京朝城主이러니 지도동관즉변휴祗到潼關卽便休로다.
아! 요즈음 도를 배우는 부류들을 보면
누구나가 문 앞만을 알 뿐이로다.
서울에 들어가 성주께 조회하려 하면서
동관에 이르러 그만두는 것과 같구나.

또 임제 선사는 선지식과 납자가 만날 때 4가지 양태를 주인과 객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먼저 객간주客看主입니다.
객으로 주인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이 그저 그렇고 납자가 뛰어난 경우를 말합니다.
둘째 주간객主看客입니다. 주인으로 객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뛰어난데 납자들이 그저 그런 경우입니다.
셋째 객간객客看客 객으로 객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과 납자 둘다 그저 그런 경우입니다.
넷째 주간주主看主입니다. 주인으로 주인을 보는 것입니다. 선지식과 납자가 함께 뛰어난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결국 마지막에는 가르치는 선지식인 주主와 배우는 납자인 객客을 나누지 않고 치열하게 서로 탁마하는 것이 제대로 된 청산과 백운의 관계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과 납자가 모두 근기가 수승하다면 주인으로서 주인을 보는 주간주主看主가 됩니다.
주객이 분별되지 않고 주객이 하나가 되는, 그래서 모두가 주인인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용산龍山 선사에게 동산洞山 스님이 묻는 주객문답이 있습니다.
용산龍山 선사에게 동산洞山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주중주主中主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장년불출호長年不出戶니라. 여러 해 동안 문 밖에 나서지 않았느니라.”“어떤 것이 주중빈主中賓 주인 가운데 손님입니까?”
“청산부백운靑山覆白雲이니라. 청산이 백운을 덮었느니라.”“손님과 주인의 거리가 얼마입니까?”
“장강수상파長江水上波니라. 큰 강물 위의 파도이니라.”“손님과 주인이 만날 때는 어떤 말을 합니까?”
“청풍불백월淸風拂白月이니라.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스치느니라.”
이 말을 듣고서 천동정각天童正覺 선사는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염拈하였습니다.
주야운장정상主也雲藏頂相이요
빈야설압미릉賓也雪壓眉稜이로다.
상거야문사유한相去也門司有限이요
언설야옥진금성言說也玉振金聲이로다.
주인이란 구름이 정수리를 덮음이요,손님이란 백설이 눈썹을 덮는 것이로다.
서로의 거리란 문지기의 권한에 한계가 있는 것이요, 손님과 주인의 이야기란 옥소리 금소리로구나.

그렇다면 이 산승이 시회결제대중에게 묻겠습니다.
천동정각 선사의 이 네 글귀가 옛선지식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총림에 결제를 하려고 온 눈 푸른 납자들은 이 한 철 동안 잘 가려보시길 바랍니다.

억喝!□

2546(2002). 하안거 결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