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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노장님 많이 닮아 간다 -명정 / 통도사 극락암 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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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2년 05월 243호
열일곱 살이던 가을에 해인사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 날이 1959년도 시월 스무나흗날, 유엔의 날이었다. 가니까 행자들이 〈초발심자경문〉 중 ‘발심’ 중간까지 보고 있었다. 〈초발심자경문〉이 끝났는데, 경봉 노스님 제자인 연산 스님께서 ‘처음에 선방에서 물이 잘 들어야 한다’며 노장에게 가라는 것이었다. 속가에서도 학복이 없었는데 절에서도 그랬다. 그 뒤로도 강원엘 가지 않고 줄곧 선객으로 살았으니, 그 때 중강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끝까지 본 게 절에서 배운 것의 전부였다.
예나 지금이나 산세가 드센 해인사에서의 행자 뺑소니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새벽예불 드리고 신부락으로 달려나와 첫 버스를 타고 대구로 나왔다. 다음날,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신평에서 내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겨울 해를 뒤로 하고 통도사 삼소굴에 이르니, 노스님께서 유리문을 열고 나오시는데, 아 그 첫인상이라니. 바로 쳐다보기 어려운 큰스님이라기보다 자상한 할아버지나 의사선생님 같았던 노스님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노스님의 세납이 예순아홉. 삼배 올리고 꿇어앉아 있으려니, 노장께선 내 손을 만져보기도 하고 또 시시콜콜 이것저것 물으셨다.
지금 생각하니까, ‘이놈아가 어디 돌아다니다가 이제 왔노?’ 하시는 그런 표정이었던 것 같다. 도를 닦겠다고 찾아온 열일곱 소년에게 주시던, 일견 대견하고 일견 고마워하셨던 스승의 그 눈빛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노스님께 합격점수를 받고 곧바로 스님을 모셨다. 이듬해 여드름 틸틸 나던 열여덟부터 스물둘 군대에 가기까지 다섯 해 동안 삼소굴 밑 선방에서 노스님을 시봉하며 공부했다. 일월 마지막날 입대해서 입고간 옷을 삼소굴로 부쳤더니, 첫휴가 때 노장께서 ‘만약 전시 때였으면 네 옷 받고 울었을 거다’는 도인 스님 같지 않은 말씀을 하셨다. 그렇듯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원래는 행자가 선방에서 대중과 함께 정진을 같이하는 게 아닌데, 어른 스님을 모시는 특권 아닌 특권으로 행자인 내가 선방에 앉아 있으니, 노스님께서 그리 좋아하시며 ‘신심이 있는 놈은 다르구나’ 하셨다.
노장은 아홉 살에 사서삼경을 배우기 시작해 유학儒學을 마치고, 열여섯에 출가해 강원에서 경을 배우다가 《화엄경》 가운데 ‘하루종일 남의 보물을 세고 있어도 나에게는 반 푼어치도 안 들어온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에서 발심하여 선방으로 가신 분이다. 그렇게 선에 뜻을 두신 분이었으니 나이 어린 상좌가 선방 대중들과 섞여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셨을 것은 당연한 것.
새벽에 일어나서 스님 방을 청소하고 요강 비워 드리고, 대중 스님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아침 공양 드리고 또 공부하고 그랬다. 처음 선방에 들어가니까 다리가 아프고 몸도 아프고 그랬다. 혼침에 빠져 있기 일쑤였고 끝없이 올라오던 망상도 굉장했다. 정말이지 화두가 안 잡혀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스님 법문 듣고 조사 어록 보며 기초를 다졌고, 어쨌든 득력得力하리라고 엄청나게 몸부림쳤던 시절이었다. ‘처음부터 호랑이를 그리려고 해야 고양이라도 그린다’고, 엄벙덤벙 그렇게 보낸 시간이 아니었다.
대중이 많진 않았지만 짬지게들 공부했다. 보통 선방에선 밤 아홉시면 방선放禪을 하는데, 우린 꼭 12시까지 참선을 하곤 했다. 12시쯤 되면 삼소굴 유리문이 열리고 다시 선방문이 드르륵 열리며 노스님께서 들어오셔서는 ‘졸음 오는데 하나씩 먹어라’ 하시며 동그란 과자를 나눠 주었다.
그 시절, 옛 스님들 공부하던 얘기와 참선공부에 대한 경책의 말씀도 많이 들었다.
“수행자는 마음과 행을 닦으려면 먼저 마음을 비울 줄 알고 크게 발심해야 한다. 크게 발심하는 것은 마치 집을 짓는 데 주춧돌을 놓는 것과 같다. 아무리 그 집이 웅장하더라도 밑에 깔린 주춧돌이 약하면 마침내 그 집은 전복되고 만다. 이와 같이 생사를 해탈하고 인천人天의 안목이 되고 우주의 빛이 되려면 큰 원력과 대신심이 첫째인 것이다. 천하에 지극히 큰 것은 도道며, 지극히 공公적인 것이 진리다. 도와 진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 법法, 불성 이 세 가지가 모두 한 이치인데 이 도리를 깨치려면 여러 가지 난관이 있으니 이것을 돌파하자면 대용맹심이 있어야 한다. ‘예전 성현들도 대장부요, 나도 대장부인데 나는 과거 몇 만겁 동안 내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생사에 윤회하여 온갖 고통을 받아 왔구나’ 하고 대분심大憤心을 내어야 한다. 화두에는 의정疑情이 고귀한 것이니 옛 도인들도 대의정을 일으키라고 하였다. 대신심, 대분심, 대의정은 솥의 세 발과 같아서 참선에는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노스님의 이러한 고구정녕하신 말씀들이 그리운 걸 보면 나도 이제 늙어가는 게다. 또 하나,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던 말씀은, ‘여자를!
경계하라’는 것. 아마도 한창 사춘기인 내가 염려스러우셨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든 따끔하게 한 마디만 하시면 될 텐데 대충 넘어갈 만한 일도 이래라 저래라 주의를 많이 하셨다. 나는 그 때 어른의 나무람이나 주의도 길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내 생각을 아셨는지 ‘너는 어른이 되어도 잔소리 한마디 안 할 놈이다’ 하셨다. 하긴 어른 스님이 아이들을 보면 ‘저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 왜 모르시겠는가.
그런데 스물일곱 살 때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 모시고 여름 결제를 날 때, 칠불사 통광 스님이 ‘니, 애들한테 그리 잔소리 많이 하냐?’ 하고 핀잔을 주었다. 훗날 벽안 스님께서도 ‘너, 노장님 시봉 오래 해가지고 노장님 많이 닮아 가는구나’ 하신 걸 보면, 사람은 이리 자꾸 변하는가 보다.
선방생활을 하면서 문학, 철학 책 등을 거의 다 읽다시피 했다. 물론 책을 읽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눈치껏 알아서 읽었다. 그런데 그것이 노스님 문집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다 인연인 것 같다.
내가 스물네 살 되던 해 불국사 석가탑 도굴사건이 있었다. 석가탑 사리 봉안식에 가시려던 스님께서 ‘야, 네가 내 시자로 가자’ 하셔서 따라갔다. 유리병 속에 모셔져 있는 사리 46과를 친견하는데, 아 정말이지 신심이 저절로 올라왔다. 금오· 효봉 스님 등 노스님들과 많은 사부대중이 함께 한 봉안식에서 경봉 노스님께서 한 시간을 설법하시는데, 법문의 내용이 기막혔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으나 온 사부 대중이 미동도 않고 들었던 그 날의 법문이 끝나고 두어 달 뒤 구산 스님 시봉인, 전 송광사 주지인 현호 스님이 ‘야, 어른 스님 살아 계실 때 자료 챙겨놔라’ 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던 차에 그 날 불국사에서 들은 법문을 적어 스님께 갖다드리며, ‘문집 정리해야겠어요’ 했더니, 자료를 다 내주셨다. 그 옛날에 무슨 녹음기나 있었는가, 그저 그 날 들은 대로 기억해내 적은 내용이 스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스님 어록과 문집, 서도집 등을 다섯 종류로 나누어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경봉鏡峰 스님 말씀〉은 1975년부터 지금까지 260만부를 찍어 불자들에게 읽혀졌고, 군법당과 교도소 등에 배포되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 있는 법문으로 남았다.
군대 갔다 와서 스님 밑에 살다가 선객이랍시고 한 군데에 붙어 있지 않고 이 선방 저 선방을 떠돌다가, 상원사에서 마지막 한 철 살고 마흔에 노스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삼년 뒤, 1982년 양력 7월 17일 저녁 4시 25분 스님을 보내드렸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때문에 실컷 울어보지도 못하고 소변 보러가 눈물 한 방울 찍어내곤 그렇게.
젊어선 힘도 좋았고 기억력도 좋았건만 예순이 넘은 요즘 여기저기 몸이 시원찮다. ‘목표선정을 뚜렷이 하고 성불할 때까지 뒷걸음치지 않으리라’던 저 행자시절의 원대한 꿈은 어디 갔는가. 처음 나를 보고 대견해 하시던 스승의 눈빛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요즘 나는 그리 생각하고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몸을 일으켜 세우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