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사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오대양 사건을 사람들은 신흥 종교의 사회적 비행으로 평가하는 것과 달리, 필자는 이 사건을 기성 종교의,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물량주의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본다. 어찌하였든 이번 사건으로 신흥 종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이에 신흥 종교의 발생 배경, 신흥 종교의 역할, 그리고 신흥 종교의 도전에 대하여 불교를 포함한 기성 종교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흔히 사람들은 신흥 종교를 낮게 평가하거나 그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세계종교를 믿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경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 여기서 세계종교라 함은 세계의 역사와 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는 의미로 세계종교란 용어를 사용하고, 그에 반하여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신흥종교들은 민족종교 또는 민중종교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신흥 종교를 무시하는 그러한 관점은 잘못된 것이다. 불교도 2,500년 전에는 바라문교에 대한 신흥 종교이었으며, 기독교도 2,000여년 전에는 유대교에 대한 신흥 종교이었기 때문이다.
1860년에 최 수운이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이념을 제시하면서 동학을 창시한 이래로,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민족종교들이 발생해 왔다. 이들 신흥 민족종교들은 과거에는 계룡산과 모악산과 같은 특정 지역에 밀집해 있었으나, 최근에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영세민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도시의 빈민은 대체로 일정한 직장이 없는 데에서 오는 생계의 위협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크게 느끼고 있으며, 그러한 그들에게 신흥 종교는 큰 위안처가 되고 있다.
한편, 최근에 부쩍 늘어나고 있는 새로운 종교의 발생은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지난20여년 동안 숨가쁘게 진행된 산업화 과정은 부의 불공평한 분배 및 편재 현상을 가속화함으로써 부의 분배에서 소외된 민중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증대시켰으며, 그와 아울러 산업화 및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파생된 도시화는 친족이나 부락과 같은 공동체 사회를 무너뜨림으로써 소외된 민중이 의지할 권위나 집단마저도 잃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아 정체의 혼란과 상황 정의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농민, 노동자, 도시 빈민들을 대상으로 쉽사리 그 기반을 넓히고 있는 새로운 민족종교가 속출함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들 신흥 종교가 부르짖듯이, 기성 종교는 거대주의, 물질주의, 교권주의, 관료적 권위주의, 외세의존에 빠져 있어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불교를 포함한 기성 종교들이 스스로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신흥 종교들은 사회구조의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찬 현실에 대용하여 기존의 사회질서를 재편성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러한 그들의 의지와 희구는 사회개혁 사상으로 표현된다. 곧, 신흥 종교의 관심은 현존 질서의 타파와 이상세계의 건설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려는데에 있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제약하는 일체의 제도와 체제를 비판한다. 이들에게는 인간이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존재이다. 이를테면, 동학에서는 인간 모두에게 하늘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증산교에서는 천(天), 지(地), 인(人) 가운데 인간이 가장 존귀하다고 주장하며, 대종교에서는 홍익인간을 강조함이 그 대표적 예이다. 따라서 이들 종교에서는 서구 종교에서와 같은 절대신이나 창조신의 개념이 약하고 거꾸로 인간 중심주의의 성향이 강하다.
이같은 신흥 종교의 인간존엄 사상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 및 능력 발휘를 억제하는 빈부, 귀천, 적서, 남녀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고 억압하는 사회제도와 물질적인 빈곤과 자연의 재앙까지도 거부한다.
이들은 그와 같은 이상사회가 우리나라에서 실현될 것으로 신앙한다. 특히 우리나라가 그동안 받았던 핍박과 고난의 과정을 우리 민족이 세계를 주도할 선인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방법을 대립, 투쟁, 증오에서 찾지 않고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곧, 민중의 실존상황을 개선시킴으로써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평화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폭력적 혁명을 거부하고 정신적 혁명을 제창하는 이들이 바라는 이상세계는 해원, 상생, 보은, 조화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러한 신흥 종교의 새로운 가르침과 도전을 너무 소홀히 여기는 것 같다. 불교도들은 기독교의 도전에 대해서는 예민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면서 신흥 종교의 도전에는 무관심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불교는 지금 기독교와 신흥 종교에 의해 이중으로 도전받고 있다. 따라서 이미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신흥종교의 그같은 도전에 대하여 불교가 어떻게 응전할 것인지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근본 정신과 신흥종교가 지적하는 기성 종교의 병폐에 대한 자각과 그 개선에 길이 있다고 본다.
건강한 육체도 일단 절제하기를 게을리하면 병이 나기 쉽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사회적인 육체라고 비유할 수 있는 교단이 조직 내부의 의사소통과 사회적 기능의 탄력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관료조직에서처럼, 오만과 경직화를 초래하여 그 종교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중생의 구제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 교단이 개인과 중생의 신앙에 봉사하는 기능을 망각하고 오로지 교단 그 자체를 목적화하여 신앙을 수단으로 전락시키지나 않았는지, 우리 교단과 불자들은 그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지금 우리는 산업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산업사회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데, 빛이 인간 해방의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그림자는 인간 조정의 가능성이다. 이 산업사회에서는 경제적인 생산력이 급격하게 향상되고 자동화됨으로써 인간의 생활방식도 따라 기계화되어 간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고 행동의 목표와 의미를 반성하는 자율적인 이성은 거의 마비되고 만다. 이러한 산업사회에 사는 인간이 보이는 특징의 하나가 무력감(無力感)이다. 거대한 공장에서 기업체에서 학교에서 군중 속에서, 인간은 작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하다는 고독감과 소외감과 무력감에 젖게 된다.
무력감에 빠진 현대인에게 구제의 가르침으로서 정토 신앙의 길이 있다. 곧, 나는 부족하고 무력하며, 나 자신과 처자를 위하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기자신에 대한 철저한 자각-범부(凡夫)로서의 자각-과 아미타불의 대비원력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정토신앙에 대한 재발견이 요청된다고 본다. 그런 다음에는, 이러한 자기에 대한 자각과 부처님에 대한 적절한 신앙심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이웃과 사회에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이웃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포교와 복지 문제를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회 문제를 외면한 채로 깨달음과 구원을 설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일천만 농민, 일천만 노동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수효는 엄청난 수이며, 그들의 가족까지 헤아린다면 결국 우리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 노동자, 농민인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 불교 교단이나 불자들이 이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불교가 계속해서 그들의 고민과 고뇌, 그들의 요구와 소원을 외면한다면 머지 않아 그들도 불교를 외면할 것이다.
이제 농촌 지역의 사찰은 그 지역 주민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테면, 신용협동금고를 설립하여 농촌에 자금을 대여하고 저축을 유도하며, 농번기에 유아원을 운영하여 어린이에게는 불심을 심어주고 아울러 농촌 아낙의 손을 덜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쌀값 문제, 토지 문제, 소값 문제 등 그들 농민들이 안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없이는 그들을 부처님 곁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동자에 대한 포교도 그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장시간의 노동시간, 높은 산업재해율, 열악한 작업 및 주거 환경 등에 대한 파악없이는 그들과 불교가 공동체가 될 수 없다. 부처님께서도 육방예경에서 노사간의 윤리에 대하여 가르침이 계셨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듯 노사분규가 심화되고 있는 마당에 불교계에서는 노사백서 하나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본다.
신흥 종교와 기독교의 힘찬 도전 앞에서, 우리 불자들도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과 이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이사회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해결해나가는 자세로서 그들 신흥 종교의 활동에 응전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