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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 차 선사의 말씀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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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 원명 1987년 10월 68호
아잔 차(AJAN CHAH) 스님은 현재 태국 최고의 선승(禪僧)으로서 태국의 동부지방에서 태어나 일찍 출가하여 경율(經律)을 배우고 태국 전통의 수행법으로 선(禪)을 익힌 뒤 금세기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되는 아잔 문(AJAN MUN) 스님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그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현재 40여개의 산문(山門)을 이루고 많은 사찰들이 유럽과 미주내까지 퍼져있다. 그의 가르침은 실제의 선 경험에서 우러나온 단순함이 특징이고 특히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스님이 된 아들을 찾아 온 프랑스 부부를 위해 1977년 10월 10일 어느 수도원에서 설해진 아잔 차스님의 법문을 소개한다.

꽂이 만발한 과일나무에 바람이 불면 어떤 꽃은 떨어져 흩어지는가 하면 어떤 봉오리는 남아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바람 속의 꽃과 열매처럼 사람도 저마다 다른 삶의 상태 속에 떨어져 버리게 된다. 어떤 생명은 태(胎) 안에서 죽는가 하면 태어난지 며칠 또는 몇년이 안되어 죽기도 한다. 바람 속의 과일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경우도 매우 불확실하다.
사물의 이런 불확실한 면은 사원 생활에서도 볼 수 있다. 승려가 되기 위해 절에 왔다가 이내 마음을 바꿔 떠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이미 삭발까지 하고서도 떠나버린다. 행자로서 떠나기도 하고 승려로서 한 철을 지내고도 마치 바람 속의 파일처럼 떨어져 버린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비슷해서 많은 상념들이 일어났다가는 사라진다.
부처님은 일찌기 사물의 이같은 무상을 이해했었고 무상을 자각하고 있는 이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필요없는 것을 아셨다. 부처님은 전생에 차노코문이라는 왕으로 있을 때 특별히 많은 공부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다만 필요했던 것은 망고나무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시종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던 차노코문왕은 잘 익은 망고나무들이 가지를 무겁게 드리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코끼리를 타고 가던 왕은 돌아가는 길에 그것을 따가리라 마음먹었으나 뒤에 따라오는 시종들이 망고를 다 따 버릴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뒤따라오던 시종들은 장대로 나뭇가지를 치고 마구 꺾어 망고 열매를 다 따가버렸다. 저녁 무렵, 망고열매의 단맛을 기대하며 되돌아온 왕은 나무에 열매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없어진 것을 보았다. 그뿐아니라 가지와 잎이 마구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매우 실망한 왕은 문득 근처의 다른 망고나무 한 그루가 말짱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으나, 곧 그 나무에는 과일이 아예 열리지 않았던 것을 알았다. 과일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열매를 따갈 이가 없었고 따라서 잎과 가지가 상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교훈은 왕을 깊은 사념에 잠겨 궁전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좌란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골치아프고 어려운 자리다. 전쟁의 위협이나 왕위를 빼으려는 자가 있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왕은 편안히 쉴 수도 없었고 잠도 꿈으로 설쳐야 했다.
왕은 다시금 과일이 달리지 않아 해를 입지 않은 망고나무를 떠올렸다. “만약 사람이 그 망고니무와 같이 된다면, 사람의 ‘잎’과 ‘가지’도 해가 없을 것이 아닌가.”
왕은 자신의 방에 앉아 명상에 잠겨 그 망고나무에서 암시를 받아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을 망고나무에 비교해 보았고, 결국 사람이 세상살이에 말려들지 않는다면 진실로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걱정과 어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후로 그는 어디를 가든 그의 스승이 누구냐고 물으면 언제나 ‘망고나무’라 대답했다. 그는 더 이상의 많은 가르침이 필요없었다. 한 망고나무가 그를 진리를 깨닫게 한 원인이 되었고 본질로 이끈 가르침이 된 것이었다. 이 깨달음으로 그는 출가해서 세상의 근심을 끊고 조용히 수행하는 승려가 되었다. 왕위를 포기한 그의 마음은 마침내 평화롭게 되었다.
이렇듯 부처님은 전생에 보살로서 이런 수행법을 계속하였다.
우리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의 스승 아님이 없다. 나무 하나, 풀 한포기에서도 우리는 배울 수 있고 자연으로부터 충분히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법 아님이 없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뿐 아니라. 마음 속의 것도 그러하다. 생각은 마음에서 일어나 변하고 사라진다. 변하고 사라지는 사물의 본성을 바로보지 못한다면 진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이를 바로보는 자는 부처님이 말한 대로 법을 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될것이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
부처는 법(法) 가운데 있다.
법은 어디에 있는가?
법은 부처 안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승은 어디에 있는가?
승은 법 가운데 있다.

불·법·승은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그저 별 생각 없이 이렇게 말한다. “그야 불·법·승은 내 마음 속에 있지.”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수행은 여실하지 않다. 진실로 마음이란 ‘법을 아는 마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 법이라는 관점으로 상기한다면 세상에 진리는 존재하며 따라서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등의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화가 나면 이것이 나타났다가 다시 바뀌어 사라지고 행복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서는 머물다가 결국은 사라진다. 그것들의 본 모습은 본래 비어 있으며 어떤 것도 아니다.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것은 변화한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다.
나무든 산이든 짐승이든, 이들은 모두 법이다. 모든 것이 법이다. 법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곧 본성이다. 본성을 보는 자는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자는 본성을 본다.
석존께서는 제자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참된 법은 수행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법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부처를 보며 부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했다. 싯다르타고타마가 법을 깨달고 부처가 되었고 우리가 법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 법은 세상에 영원히 존재한다. 그 법은 마치 지구에 영원히 존재하는 지하수와 같다. 우물을 파려고 하는 사람은 물이 나올 만큼 충분히 깊게 땅을 파야 한다. 지하수는 원래부터 거기 있으므로 물을 새로 만들 필요없이 그저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법을 발명하거나 명하지도 않았다. 부처님은 다만 명상을 통해 있는 것을 드러내보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깨닫은 이라 하고, 깨닫은 것을 법을 안다고 한다. 법은 세상의 진리이다. 진리를 봄으로써 싯다르타 고타마는 ‘부처’ 라고 불리운다.
그 가르침을 수행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안이비설신의의 감각을 모으고 억제할 것을 가르쳤다. 모든 것이 이 여섯 가지 감각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감각의 통제가 수행의 근본이 된다. 모든 선악도 이 여섯 감각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는 이 감각기관을 잘 활용하여 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제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부처님에 의해 다 준비되어 있으므로 공부는 어렵지 않다. 마치 부처님이 과일나무를 심어 놓고 우리를 초대하여 그 열매를 따 먹도록 하는 것과 같아서 우리가 다시 과일나무를 심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정·혜(戒定慧)는 다시금 만들거나 결정지을 필요가 없고, 우리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 행운과 복을 가진 이들이라 할 수 있다. 과일수는 이미 심어져 있고 과일도 이미 익었다. 모든 것이 이미 완전하고 완벽하다. 이이 필요한 것은 파일을 수확할 사람이고 수행을 해 나갈 신심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장점과 행운을 가진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주위의 다른 중생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개나 돼지나 뱀과 같이 악업의 결과로 짐승의 몸을 받은 것들은 법을 공부할 기회도, 법을 알 기회도, 법을 수행할 기회도 갖지못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행의 희생물로 만들어 바른 태도와 수양의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불행의 희생물이 되지 말라! 그는 열반에 이르는 자유의 길에 들어설 희망이 없는 자요, 선을 계발할 희망이 없는 자이다. 또한 우리가 이미 그런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희망을 버리면 다른 중생들과 마찬가지로 불행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부처님의 감응력 속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미 충분한 복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가 현재의 생각과 지식과 이해력을 바로잡고 계발하고 공부한다면 현세에 법을 보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중생들과는 달리 바로 성불할 수 있는 존재이다.
부처님은 법이 바로 이 순간, 우리 앞에 있다고 가르친다. 부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시 부처를 구할 것인가? 바로 지금 생각하지 않고 지금 수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축생이 되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아귀의 상태로 떨어질 것이다.
다만 그대의 마음을 주시하라. 화가 나면 성냄을 주시하고 망상이 일면 또 그것을 주시하라. 탐욕이 일어도 탐욕 자체가 무엇인지 그저 주시하라.
이렇게 정신 상태를 바르게 인식하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마음은 인간 존재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바뀐다. 모든 상태는 변화하기 마련이고 이 변화는 현재 상태에 의해 결정되어 태어나거나 변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의해서 우리가 결정되어지고 변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