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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의 땅을 점령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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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02월 96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욕계(欲界)라 한다. 온갖 욕망이 가득한 세계다. 욕망을 크게 잡으면 세 가지로 대별된다. 성욕(性欲)과 식욕(食欲)과 수면욕(睡眠欲)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명예욕(名藝欲)과 재물욕(財物欲)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오욕(五欲)의 세계라고도 한다. 부처와 중생의 영역이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욕망의 세계에서 판가름난다. 부처의 영역은 이들 욕망을 초월한 곳이요, 중생의 세계는 이들 욕망에 집착한 곳이다. 초월은 버림도 떠남도 아니다. 다만 집착하지 않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음을 초월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욕해(慾海)다. 욕심이 가득한 영역이다. ‘욕(欲)’은 소유하고자 하는 심리다. 아름다운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예쁜 여자를 예쁘다고 느끼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아름다우니까 꺾으려 하고 예쁘니까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인 것이다. ‘넌 예쁘니까 내꺼야’ 하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꽃이구나, 그러니 꺽자’ 하는 마음이다. 놔두고 보는 게 아닌, 갖고자 하는 마음이다. 소유욕이다. 도대체 소유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죽을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왜 소유하려는가?
백운(白雲)이다. 그저 흰구름처럼 무집착·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백운무근(白雲無根)이라 했다. 흰구름은 뿌리를 내리지 않는 법이다. 뿌리가 없으니 자유롭다. 자유롭다는 것은 어떠한 틀을 거부한다. 그러나 방종하지도 않다.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인 백운선사(白雲禪師)가 었다. 법호처럼 무집착으로 사신 분이다. 큰스님의 법명은 경한(景閔)으로서 자연에 순응하면서 걸림없고 한가히 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법호처럼 매우 무애자재(無碍自在)하다.
서기 139년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태어나 1375년 취암사(鷲岩寺)에서 입적한 분으로 세수는 77세였다. 고려말 고승인 태고(太古)와 나옹선사의 큰 그늘에 가리어 빛을 보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의 법향(法香)은 그러나 온누리에 가득하였고, 그 광명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찬연히 빛나고 있다.
백운화상 어록에 의하면 이구(李玖)선생의 서문에서처럼 중국에 유학, 석옥 청공(石屋淸共)에게서 심인(心印)을 전해받고 나옹의 스승인 지공화상(指空和尙)에게도 법을 물은 것으로 되어 있다.
황해도의 해주 신광사(神光寺)는 나옹스님이 머물던 절이다. 큰스님께서 처음 주지로 부임하면서 하신 법어를 통하여 그의 진면목올 엿볼 수 있다.

산문(山門)에 이르러 주장자를 치켜 드시고는 “온 대지가 그대로 해탈문(解脫門)이다. 들어가고 들어가 속이 없는 지극히 미세한 곳에 들어가고, 나오고 나와 한없이 넓은곳, 거죽이 없는 데에 벗어난다. 여기에 이르러 어떤 것을 산문이라 하는가. 즉 어떤 것을 삼문(三門) 중의 중문이라 하고 어떤 것을 주방과 곳간이라 하며, 어떤 것을 중[僧]이라 하고 어떤 것을 속(俗)이라 하는가? 일러보라.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시고는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시고 일갈(一喝)하신 뒤, 곧 문으로 들어가셨다.
큰스님온 주장자를 들어 보광명전(普光明殿)을 가리키시면서 대중에게 말씀하시었다. “아까 내가 삼원에 이르러 온 대지가 다 법신[懶脫門이라 하였음]이라 했는데 그것은 불법지해(佛法知解)를 그릇되이 가졌던 것인 바 지금은 다르다. 불전(佛殿)올 보고는 다만 불전이라 부르고 주장(柱杖)을 보고는 다만 주장이라 부르며, 이것은 유나(維那)의 방(房)이요 저것은 전좌(典座)의 방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중은 중이요 속인은 속인이다. 자, 다들 일러보라. 이 노승이 어떤 도리에 의해 이렇게 말하는가 알겠는가? 모른다면 상방(上方)에 아주 높은 곳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노승은 그대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그러고는 주장자를 버리고 소매를 떨치며 방장으로 가셨다.
큰스님은 방장의 선상(線床)에 기대어 주장자를 세워 한번 내려치시고는 말씀하셨다. “이 세 간(間)의 방장암은 비록 작으나 법계를 포함하였고 자연각자(自然覺者)가 그 안에 살고 있다. 말해보라, 자연각자가 어떤 것인가?” 하시고는 다시 “당처를 떠나지 않고 담연(湛然)히 항상 고요한 것으로써 바라보면 앞에 있다가 어느새 뒤에 있다. 이를테면 마치 사람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변화와 같이 방위를 정할 수 없다. 일러 보라. 도대체 이것은 어떠한 존재이기에 이처럼 해괴망칙한가?”하셨다. 그리고 다시 “작년에는 손님으로 있더니 오늘은 주인이 되었네. 별로 기특한 것은 없고 당당한 여섯 자[尺] 몸이 매우 분명코나” 하고 주장자를 한 번 세워서 내려치고는 자리에 앉으셨다.
법당에 들어가 수미좌(須彌座)를 가리키시고는 “모든 법은 공(空)으로써 자리를 삼는데 저것은 무엇인가?”하시고, 계단을 밟아 오르시면서 “한 층, 두 층, 세 층, 네 층…무엇이 어려운가?”하시고 자리에 오르시었다.

자, 이러한 일련의 개당보설(開堂普說 : 주지 진산식 법어라는 표현이 적절)을 보면서 우리는 조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진산식 법어가 한곳-특히 법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거기서 많은 대중들이 운집하면 첫 법문을 시작함이 평범한 예다. 그런데 백운 큰스님은 산문을 들어서면서 수미초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거기에 알맞는 법문을 설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렇다. 삼라만상 모두가 법의 당체(當體)임을 증명함이다.
현실 세계의 부당치는 모든 사건, 모든 존재가 다 불법과 함께 하기 때문인 것이다.
온 대지가 그대로 진리의 영역[法身]이다. 삶의 생생한 현장 그대로가 진리가 숨쉬는 곳이다. 이른바 해탈문이다. 온갖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대자유의 세계다. 아니, 해탈문이란 어떤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상대적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부의 공간, 일정한 영역이 아니라 온 대지가 온통 그대로 해탈문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너의 공간, 나의 영역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방장이 법계를 포함하고 있고, 그 법계 안에서 자연 각자가 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주인도 객도 존재치 않는다. 모두가 객이요 모두가 주인이다. 주인이니 객이니 하는 것은 시간을 격해서, 장소를 바꾸어서 방편상 표현될 따름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모든 존재는 각자의 개성을 지닌다. 개성을 지니기에 작용이 다르다. 작용이 다르므로 입히는 덕·화도 갖가지다. 큰스님의 사상은 두루뭉수리에 떨어지지 않는다. 줏대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뭉뚱그리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 불전, 주장자, 유나, 전좌, 산, 물, 불, 중·속인, 산문, 방장, 보광명전, 법당, 수미좌 등이 제각기 제 개성을 지니기에 그 작용이 뚜렷하다. 큰스님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허나 보라. 공(空)과 색(色)의 경계가 어떻게 큰스님의 세계에서는 녹아들고 있는가를. 모든 것이 다 공이다. 그러나 한층, 두 층, 세 층, 네 층…모든 계단이 분명하다. 분명하지만 어려울 게 없다.
우리가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죽음을 놓고 또한 그의 일생을 생각하는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큰스님의 임종게(臨終偈)를 보자. 이는 유언이니까.

인생 칠십은 고래희라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일흔일곱해 동안 살아오면서(살다가)
일흔일곱해 동안 살아간다(이제 떠난다).
(그러나) 곳곳이 다 돌아갈 곳이다.
모두가 다 인연처요 고향이다.
무엇하러 배와 노를 장만하여
고향에 돌아가려 하는가.
내 몸은 본래 존재치 않았으며
마음 또한 머물 곳 없었나니
이제 재를 만들어 흩어버리되
시주(施主)의 땅을 점령치 말라.

이는 스승이었던 석옥 청공화상의 사세게(辭世偈) 내용과 일치한다. 한 번 보자.

주검의 시해는 청산을 집착치 않네
죽은 뒤 어찌 땅 파고 묻히겠는가.

나옹화상이나 태고화상과 함께 임제선맥을 잇기는 했으나 백운 큰 스님은 간화선이 아닌 무심무념선(無心無念禪)을 주창하였는데 여기에도 큰스님의 무소유, 무집착, 무애사상이 깃들어 있다. 화두(話頭) 그 자체도 일종의 걸림돌, 즉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큰스님의 임종게에 나타난 무소유의 세계다. 너 나 할것없이 부동산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이즈음에, 죽음에 이르러서도 시주의 땅을 점령치 말라고 한 것은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기타태자의 큰마음, 그 넓고 넓은 대지를 부처님께 아무런 바램도 욕심도 없이 희사한 그 장한 마음이 아쉬운 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