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 스님은 그 때 수좌 스님들과 함께 기초선원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기초선원의 선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 2월 비록 기초선원장직을 내놓고 금산사 심원암으로 물러앉아 있지만, 기초선원을 말하면서 영진 스님을 빼놓을 수는 없다.
“종단개혁 이전부터 구참수좌들이 기초선원에 대한 논의를 했었어요. 정말 참다운 수좌, 공부인을 길러내자는 것이었지요. 출가자들 입산동기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선발심先發心해서 입산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즘 남자 평균 입산연령이 삼십이삼세이고 여자는 이십팔구세이지요. 이미 속가에서 대학까지 나와 군대 갔다 오고, 직장생활까지 하다 온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학문을 하라고 하면 열정이 식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기초선원에서 수용하자는 것이지요.”강원에서는 2학년 과정인 사집반에서 선어록을 공부하게 되는데, 예전에는 이 과정에서 학인들이 선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스님은 말한다. 큰스님들의 어록을 보다가 신심이 솟은 것인데, 지금은 의무적으로 4년 과정을 마쳐야 하므로 뛰쳐나올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선발심한 수행자들의 열정을 수용하고 증장시켜 줄 교육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4년 과정인 기초선원의 수용인원은 250∼300명 선. 교과안거 때는 한 철에 170명 정도를 뽑는다. 물론 교육내용은 선 공부 위주지만 초심자들인 만큼 경전 강의 등 기본 교육을 하는 것은 강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연륜이 짧은 만큼 아직 완전히 체계가 갖추어져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전 과정의 학생이 한 곳에 모여 생활하도록 해야 하지만 그만큼 큰 도량이 있어야 하는 등 뒤따르는 문제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결제 기간에는 전국 선원에 위탁교육을 시키고, 봄 가을 동화사에 모여 교육을 받는다.
주변에서는 도량 마련이 기초선원의 가장 큰 과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영진 스님의 생각은 좀 다르다. 도량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감화를 줄 수 있는 덕 높은 분이 도량에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3년 전부터 사미니가 합류하였는데 이는 영진 스님이 선원장을 맡고 나서 추진한 일이다. 스님 생각에는 사미기초선원이 아니고 조계종 기초선원이므로 조계종에서 예산이 나오는 사미·사미니 모두의 교육기관인데, 그동안 사미니들이 제외돼 있었다. 여기에는 비구니 스님들의 경우 강원을 졸업하는 체계가 이미 자리잡혀 있었고, 노장 비구니 스님들의 우려가 큰 원인이었다. 사미·사미니를 한 곳에 합쳐놓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생활을 달리 하고 강의만 선별적으로 듣지요. 그래도 노장 비구니 스님들은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포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도 있고, 어차피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해야 할 일이었어요.” 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기초선원을 찾는 입산자들도 늘고 있다. 그러나 수용인원의 한계가 있으므로 부득이 심사를 거쳐 떨어뜨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 수도 상당하다.
“교단의 기본교육과정으로 묶어놓다 보니 거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마치기를 원하는 이도 있어요. 그런 이들은 면접을 통해 대체로 떨어뜨립니다. 과정이 필요하다면 꼭 여기가 아니라도 되잖아요. 꼭 참선參禪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와서 공부하기를 바라죠.”그러나 사람을 가려야 한다는 것처럼 못할 짓도 없다. 영진 스님은 선원장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있었다면 찾아오는 이를 물리치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본의 아니게 사람을 가려야 하는 것, 그게 제일 어렵고 힘들었다.
기초선원만이 아니다. 동화사 금당선원의 선원장까지 맡았던 스님은 일반 선원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한다. 조계종에는 선원이 90개가 있다. 그 가운데 비구선원 60여개 비구니 선원 30여개로, 숫자로 본다면 2천명에 달하는 수좌들을 수용하는데 큰 무리는 없다. 그렇지만 소위 말해 공부할 여건이 좋다든지 큰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수좌들이 몰리기 때문에 가고 싶은 곳에 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화사는 여건이 좋은 편에 속해 수좌들이 몰리는 곳 중의 한 곳이었다.
한철 인원이 50명이라고 하면 기존에 살던 30명 정도가 남고 빈 자리를 새로운 수좌들이 채우는 것인데, 보통 3대1, 4대1의 경쟁이 벌어진다.
요즘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선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실정이다. 시민선방이라든지 산사수련회 등을 통해 불교인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까지도 수련회에 참가하는 예가 많다.
일반인을 위한 선원도 여러 곳이 개설돼 있는데, 얼마 전 열반하신 혜암 종정 스님이 원당암에 일반인 대상의 선원을 열어 놓으셨고, 진제 스님이 계시는 부산의 해운정사, 송담 스님의 인천 용화사 등에서 일반인들 결제가 있다. 또한 호흡법이나 명상법의 보급도 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의 선방은 물론이고 기초선원에서도 조계종의 정통수행법인 간화선 이외에 다른 명상법이나 관법은 일절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수행법들이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면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일반인들은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물론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제불조사와 경계를 같이 하려면 간화선을 참구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지요. 이는 조계종이 사활을 걸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달마 스님으로부터 발달한 참구법이고, 당·송시대에 묵조선과 간화선이 첨예하게 대립한 적이 있지만 수많은 선의 종장들이 간화선으로 정진을 했거든.”“간화선은 너무 어려워 스님들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어렵다고 하지요. 그런데 일반인들도 보면 불교를 어렵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뭐가 어렵더냐고 물어 봤어요. 혹 책은 읽어 보았냐고. 그러면 고개를 흔듭니다. 책 한 권 안 읽어 보고 어렵다고 한다는 거지요. 간화선도 마찬가지예요. 공부는 안해 보고, 다 해달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남이 밥먹는다고 내 배가 부른가?”질문자가 무식하다 보니 용감해진다.
“그래도 근기가 안 되는 이들에게는 여타의 수행법을 가르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요?” “근기 차원이 아닙니다. 선의 입장에서 보면 근원적으로 다르지요.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합니다. 화두란 말머리 언어 이전을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위빠사나 같은 것은 생각이 일어났을 때 그 생각을 따라가며 풀어갑니다.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하여 꽉 막혀야 하는데 자꾸 풀어가려 한다는 거지요. 수행법 자체가 다릅니다.”“막혀야 한다고요? 그러다 아주 꽉 막혀 버리면 어떻게 하나요?”“더 좋지. 아주 꽉 막혀 버리면 완전 직통이지요. 선은 알음알이로 알아지는 공부가 아니고 툭 터지는 공부거든요. 그러니까 막힐수록 좋은 거예요. 은산철벽처럼 막혀야지요. 한 생각으로만. 한 생각으로 막힌다는 겁니다. 여러 생각이 들어오면 안 돼요.”
영진 스님이 기초선원장직을 내놓고(동화사 금당선원장직을 겸했으나 역시 내놓고) 이 곳 심원암으로 거처를 옮긴 지는 채 두 달이 안 됐다. 겨우 기초가 다져지려는 시기에 스님은 많은 주위사람들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과감히 이 곳으로 돌아왔다.
수좌들에게는 수좌병이 있단다. 걸망 메고 떠나고 싶은…. 남들 한철 끝내고 걸망 메고 떠나는 것을 보면서 늘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 3년 같은 선원에 살다보니 그 수좌병을 다스리는 데도 한계가 왔다.
“솔직히 말하면 수행이 익지 못했다. 모습으로 생활에서 감화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옷이 너무 크고 짐이 너무 무거웠단다. 물론 겸손의 말씀일 터.
스님의 세수가 48세라고 하니 그 맡았던 직책으로 볼 때 무척 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다 회상이 있는 탓에 당시 할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했다고 말하지만, 원칙이 분명하고 원칙대로 삶을 살고, 종단과의 관계에서 행정력도 인정받는 관계로 주변 스님들이 기초선원의 기초를 다지는 데 적격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믿음과 대접이 영진 스님을 무척 부담스럽게 했던 것 같다.
“사실 대접받는 자리라고 할 수도 있지요. 모두 와서 인사하고 절하는 자리지요. 그래서 타성에 젖기 전에 대접에 익숙해지기 전에 나와야겠다 생각했어요.”‘나 아니면 안 된다’가 늘 탈을 불러온다고 스님은 생각한다.
돌아오는 결제 때는 오대산 상원사에 방부를 들이기로 했단다. 그동안 방부를 받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방부를 들이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그쪽에서 인원이 다 찼다며 떨어뜨리면 떨어져야지요.”스님들을 만나는 기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홀가분함. 앞뒤 좌우 재지 않는 무대책, 명분이 서지 않으면 낭떠러지인 것을 알면서도 발길을 옮기지 않는 꼿꼿함. 알 수 없는 통쾌함을 느끼게 된다. 출세간인이 아니라면 이런 자유인의 기질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님 역시 공부중인 수행자인지라 조급해질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허 스님은 57세에 열반하셨고, 성철 스님은 56세에 해인사 방장이 되었어요. 이제는 나도 뭔가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라고 스님은 털어 놓는다.
어영부영 지내다 깨닫지도 못하고 세월만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스님들에게는 있는 것같다. 그래서 내년쯤에는 무문관을 생각하고 있다. 뭔가 결말을 내리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는 대결단을 내릴 참이다.
모든 빛과 모든 소리가 차단된 산 깊은 산사의 밤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산사라 해도 큰절은 이와는 달랐다. 한밤중에도 창문으로 새어드는 밝은 빛과 대책없이 덮쳐오는 엔진소리에 익숙해진 도시인에게 고요는 순간, 안락보다 낯선 두려움을 몰고 온다.
은산철벽과도 같은 짙은 어둠을 뚫고 실낱 같은 빛이 내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