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왜 10.27법난을 일으켰을까. 불교가 민족종교이니, 외세에 아부하고 잘보이기 위하여 그 민족종교를 압살하려한 것일까. 서세동점 세력들이 한결같이 신부나 선교사를 앞세우고 동방을 침략한 역사가 있는 만큼, 집권을 위하여 기독교국가인 미국 같은 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민족종교를 탄압하였으리라는 논리도 그럴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진실은 후세 사가들의 분석과 평가를 기다리지 않고는, 그들이 본심을 드러내보이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뚜렷한 죄도 없는 공무원들 피리 잡듯이 무더기로 내쫓고, 법에도 없는 일로 사법절차도 거치지않은 채 반사회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몰아붙여 소위 순화교육이라는, 체벌과 감금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러 사회를 공포 분위기로 빠뜨리는 것으로 집권의 수단을 삼았듯이, 10.27법난도 그런 맥락의 충격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종교 탄압은 그 신앙하는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깊디 깊은 상처를 입히며 사회의 기층세력 사이의, 치유할 수 없는 갈등을 형성시키는 것인데도, 공포 분위기의 조성 수단으로 “자, 보아라. 우리는 소위 민족종교라는 불교도 쑥밭으로 만든다”고 과시하는 만용을 부란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무식하고 무지해서 이것 저것 분별할 줄 모르고 저지른 단순히 치기어린 행위였을까. 넌센스도 이런 넌센스는 다시 없다.
불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의 성직자도 민권운동은 벌이다가 투옥과 고문을 당한 분들은 많다. 그러나 종단의 차원에서 이렇듯 철저히 치욕스럽게 짓밟힌 일은 없었다.
l0.27법난이나 최근에 있었던 광주 원각사 법당 난입 최루탄 난사 사건 들을 종합하여 볼 때, 그들의 무지막지한 소행에 대한 풀길 없는 한을 삭이지 못해 앙앙불락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불교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신선한 지도적인 메시지와 강령을 계속 제시하고 공급할 수 있는 민족종교로서의 지도적 위치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불교계가 인식하기를 촉구한다. 생각해 보면, 1.027법난이나 원각사 법당 난입 사건 등은 그 일을 주동한 이들이나 외세 의존적 무리들이 불교를 복고적, 퇴영적, 소극적인 준 천민 집단으로, 그래서 짓밟아도 별탈이 없는 집단으로 하시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감도 없지 않다.
어떤가 현대 불교가 과연 삼국시대와 같은 활기찬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 되고있는가.
속세의 소리를 듣지 않고 속세의 더러움을 보지 않으려는 불교는 산 불교가 아니라 단순히 우상숭배집단에 불과하게 된다. 요즈음의 불교는 관세음보살님이 절에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모두 나가시고, 그대신 눈멀고 귀먹은 목불, 석불만 남은 듯 싶다. 고승이나 대덕이나 대중스님 할 것 없이 소위 불제자라는 사람들은 마치 눈멀고 귀먹는 것이 불제자의 수행인 양 모두 목불, 석불화된 것은 아닌가. 불교가 여말 이후 타의에 의하여 산중으로 밀려들어간 이후 스스로 속세와의 절연을 미덕으로 알고 그것이 수행의 방편인 양 여기며 속세에의 관심을 죄악시하여 온 면은 없는가? 연꽃이 곱되 진흙밭에 뿌리를 박고 잎이 피고 꽃이 피듯이, 불교도 진흙밭 같은 이 오탁악세가 있기에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진흙밭을 떠난 연꽃은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 없다.
시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종교는 결코 그 시대, 그 사회의 스승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의의도 상실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10.27법년을 그 사람들의 무지와 야만성을 탓하기에 앞서, 그렇게 짓밟아도 되리라고 가볍게 여겨질 정도로 쇠퇴한 우리 불교를 하루빨리 중흥시켜 다시는 10.27법난이나 광주 원각사 난입 최루탄 난사사건과 같은 치욕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되뇌어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절에서 보따리 싸가지고 나가선 관세음보살님을 거리거리 헤매면서 찾아 다시 절로 모셔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불교가 이 시대,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끄는 강한 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원효 성사와 같은 분들이 많이 나타나셔서 민중 속에 깊이 파고드는 불교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와 더불어 이 시대의 민중에게 끊임없이 삶의 지침을 제시할 수 있는 전진적이고 신선한 불교학의 발전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면 아무리 외세를 등에 업은 외세의존적 폭압자들의 탄압 행위가 있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다시 불교가 이 시대 문화의 엘리트 집단이 되는 것이다.
끝으로 유미경의 한 귀절을 되새겨 본다.
“거사님, 병은 어떻게 견딜만하십니까? 치료하니 적어져서 더하지나 않습니까? 세존께서 은근히 문안을 많이 하셨읍니다. 거사님, 이 병이 무슨 인연으로 났으며 그 병은 오래 되었읍니까? 어떻게 하여야 낫겠읍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어리석음으로조차 애착이 있어 나의 병이났고 일체 중생이 병이 있으므로 내가 병이 났나니 만일 일체 중생이 병들지 않았다면 곧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므로 생시에 드나니 생사가 있으면 병이 있지만 만약 중생이 병을 여의면 보살도 다시 병이 없읍니다.
마치 어떤 장자가 오직 한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이 병을 얻으면 부모가 또한 병이 나고 아들이 병이 나으면 부모도 또한 낫는 것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 모든 중생에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같나니 중생이 병이 있으면 보살이 병이 있고 중생이 병이 나으면 보살도 병이 낫습니다. 또 이 병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물으시니 보살의 병은 대비심 때문에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