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이라는 화두를 풀기 위하여 먼저 ‘상생’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생존에 매달려왔을 뿐 생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존을 생명으로 잘못 알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명보다는 생존이라는 단어가 더 친숙합니다. 생존을 지탱해 주는 것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질 풍요에 대한 욕망입니다. 생태生態의 최상위인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생명은 나의 욕망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부정不定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들은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낮은 것은 낮은 대로 각기 그 곳에 마땅하게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물며 풀 한 포기, 미물 하나라 할지라도 그것이 생명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들은 세상에 나오면서 각기 살아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들이 갖는 권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집니다. 이러한 관계가 은혜이며,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라면 이보다 더 큰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은혜는 돌덩어리 하나라도 함께 있어야 할 관계이며, 미물 곤충 하나까지 함께 살아가야 할 관계입니다. 그 누구도, 어떤 이유에서도 있어야 할 존재와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해 침해해서는 안 되며, 침해당하여도 안 됩니다. 다른 생명에 대한 침해는 서로 파멸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인간이라는 형상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인간의 소유욕은 많은 생명까지 담보로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생명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은 은혜관계가 깨진 세상입니다. 은혜관계가 없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상생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있고, 생명이 자유롭게 숨쉬고 꿈틀거리는 데에 있습니다. 있을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그것은 바로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은혜로 나타나고, 생명은 다른 생명과 자유롭게 만나질 때 거기서 은혜가 생산됩니다. 이 은혜관계가 바로 상생입니다.
생명운동을 펴고 있는 뜻있는 분들이 땅 살리기에 나선 것은 생명들이 땅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생명에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를 발견하고, 이 은혜를 다른 생명에게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실천할 때 이 땅은 상생세계가 될 것입니다. 상생은 함께 있고, 어울려 사는 세상에 있습니다. 수도와 수행에 정진해야 할 종교인들이 유기농 학교를 세우고, 자연을 살리고자 시중사람들과 맞서는 것은, 인간의 탐욕으로 함께 있어야 할 세상이 깨지고, 어울려 살아가야 할 세상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해원解寃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상생세계로 만들어 가는 것은 지난 많은 세월 속에 맺혔던 원망과 원한을 풀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해원은 진정한 참회와 용서에서 이루어집니다. 참회와 용서는 종교인이 절대자(진리)의 뜻으로 살고,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그러나 절대자에 대한 절대 덕목은 종교 배타주의에 빠져 갈등과 반목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현대문명을 말하는 학자들이 문명충돌을 예견하면서 문명충돌을 종교충돌로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는 많은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중 참혹했던 전쟁들은 종교전쟁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동사태는 뿌리깊은 원증怨憎으로 복수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원망과 원한이 녹아 새 희망이 싹트고 있음을 봅니다.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사회단체와 함께 한 지리산 위령제는 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며 그 영혼들과 함께 죽어 간 꽃들과 나무들과 짐승들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수없이 죽어간 영혼들, 군인, 민간인, 경찰, 빨치산 그리고 풀 한 포기, 짐승 한 마리에게도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참회하지 않으면 진정한 용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도 참회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참회와 용서는 절대자 앞에서는 종교인이어야 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지금 우리는 참회하고 용서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민족은 둘로 갈리어 전쟁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오랜 세월 속에 이념이라는 허깨비로 인해 비통과 원한이 쌓이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몇몇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지역감정은 동서갈등의 앙금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독재와 군사정권에 유린당한 인권은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멀리 남의 땅에서 전쟁을 수행해 준 빚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조국통일이라는 절박한 일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으며, 세계사 속에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여러 가지로 내어놓을 수 있지만 나뉘어 살아온 두 땅의 민족이 하나가 되려면 지난날의 일을 진정으로 참회하고 진정으로 용서하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지난날의 참회와 용서 없이 이루어지는 화해와 협력은 서로 이해가 상충되면 언제든지 다시 그 이전보다 더 깊은 원망과 원한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리산 위령제에서 종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것은 단순히 희생된 영령들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 사회에 던진 진정한 참회와 용서의 메시지였으며, 이 메시지를 통하여 생명경외, 인류평화, 민족화해를 이루겠다는 선시였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산을 함께 오르는 등산객입니다. 등산길은 다르지만 목적지는 같은 동반자입니다. 이제 모든 편견과 배타성의 울을 벗어나 한 큰 권속과 한 큰 살림을 이루기 위해 종교인들은 열린 가슴으로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습니다. 만물의 영성이 조화된 생태적 관계성을 회복하고, 상생과 공존,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생명운동과 해원이 이 시대에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