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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ㆍ부처ㆍ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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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10월 68호
사제님에게
벌써 가을입니다. 단풍물든 산자락엔 소슬바람이 우수수 불고 계곡에는 푸른 물빛이 가득 고여 있읍니다. 지난 봄 피 고 지던 꽃잎이랑, 더위와 태양 아래 꿋꿋하게 푸르던 잎새는 이제와 생각하니 모두가 변화하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 내내 ‘깨달음”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했지만 중요한 점은 그물에 새어나가 버린 것 같아 마음 한구석 허전합니다.
우리 불교는 이천여년에 걸쳐 다양한 문화권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교리적인 풍부함이나 첨예함을 얻게 되었지만, 그런 한편 정통적인 태도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이질적 요소들도 수용하게 되었읍니다. 그 중 우리로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교가 한문 문화권으로 유입되면서 본래의 투명하면서 질긴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자연주의적 색채가 너무나 짙은 중국인의 세계관 속으로 용해시킨 일이었읍니다.
이를테면 선종에서 자주 인용하는, 유명한 승조법사의

천지는 나와 동일한 바탕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切

라는 설법은 이해하기에 따라 중국의 도가(道家)사상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문맥 자체도 장자의 ‘제물론’중

천지는 나와 함께 태어났고 만물은 나와 하나이다
天地與我보生 萬物與我爲一

라는 귀절과 유사하지만 승조스님이 본체(体)나 현상(用)의 이원적 사고의 틀을 가진 도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고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불교가 한역화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중국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한편으로 중국인들은 기존의 중국적 사고 방법으로 불교를 왜곡되게 받아들인 바가 적지 않으며, 이 점 이 후세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되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점들이 철저히 비판되지 못한 채 은연중에 불교 속에 깃들어 오늘에까지 수행과 실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입니다.
특히 도가 사상은 불교에 가장 많은 혼란을 주었습니다. 도가 사상에 의하면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有)는 없음(無)이나 비어 있음(虛)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곧 현상세계의 모습은 갖가지 변화와 차별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들의 밑바닥엔 보편적인 무(無)가 꿰뚫려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상의 여러 가지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주체적인 존재를 성취하기 위해선 이러한 무의 경지로 되돌아갈(復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현상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무의 심연에 다다라 그곳으로부터 현상의 참된 뜻을 통찰하자는 것이지요. 정통적인 도가 사상가인 왕필(王弼)은 다음과 같이 말했읍니다.

하늘과 땅은 넓고 크지만 그 마음은 무(氣)이다…, 그러기에 나날
하늘과 땅은 넓고 크지만 그 마음은 무(無)이다…. 그러기에 나날이 복귀(復歸)하여 깊이 생각하노라면 하늘과 땅의 마음도 뚜렷하여진다…. 사심을 없애고 몸을 없애면 세계는 잘 다스려져, 먼곳에서도 따르고 찾아오지만 자기를 앞세우고 편견을 품게 되면 스스로의 몸 하나도 옳게 지킬 수 없다…. 만물은 귀중한 것이기는 하나, 무(無)에 의해 비로소 일을 이루는 것이며, 무를 외면하면 형상조차 잡을 수 없다.

이러한 도가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존재를 봄에 있어서 외적인 현상작용(用)과, 그 이면에 내재하여 그러한 것들을 가능케 해주는 법칙성으로서의 본체(体)라는 두 부분을 상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와 용’의 구분법은 나중에 불교를 해석하는 데에서도 무분별하게 도입되어 많은 악영향을 낳았읍니다.
대표적인 것이 “존재일반(法)은 무수한 관계와 변화(空)로서 이루어진다”는 말에서 공(空)이라는 말을 ‘관계와 변화’의 뜻으로 파악하지 않고 도교적 ‘무’로 이해하여 모든 현상계의 근원적 모태쯤으로 왜곡되게 생각한 점입니다. 곧, 공이란 말을 탄력적이고 역동적인 관계성의 모습으로 파악하지 않고, 현상계의 배후에 근거하는 본질적인 그 어떤 섬오한 영역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스며들면서부터 불교에서도 은연중에 존재를 봄에 있어서 본 체계와 현상계를 염두에 두게 되었으며, 삼라만상의 이면에는 그 본질적 ‘도’가 있을 것이다 라거나 또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의 추하고 부정적인 모습을제하면 진리의 모습이 구현될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이 배태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현상적인 모습은 본질적인 ‘도’나 ‘진리’의 다양한 나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현상의 다양한 차별상에서 그 본질적 ‘도’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으면 현상 그 자체를 진리의 모습으로 받아들일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엔, 이르렀습니다.
이런 생각의 연장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바로 ‘산빛은 부처님 모습이요, 물소리는 부처님 설법이라’ ‘두두물물이 진리 아님이 없다’등의, 일면 범신론(凡神論)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말자체가 꼭 도교적 세계관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모든 실재의식을 떠난 불교적인 열린 세계관으로 보는 존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일 수도 물론 있읍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불교는 번뇌집착(실재의식)을 떨칠것을 요구할 따름이지, 그후에 나타나는 세계가 본질의 세계라던지, 성스럽다거나 진리라는 등의 표현은 쓰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영역, 진리의 세계, 본질의 부분 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매우 그릇된 사고방식이니까요.
아무튼 이러한 ‘본체와 현상’이라는 이분적 사고형태는 현실적으로 유, 불, 선 삼교에 공유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유교에서도 불교와 도교에 영향받은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라는 또 다른 유사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하려 했으니까요. 개별적인 사상(事象)을 초월하는 강력한 보편적 기초로서의 이(理)를 체득함은 도학자들의 중심과제였읍니다.
한편 이러한 생각은 중국 뿐만 아니라 인도의 브라마니즘에서도 발견할 수 있읍니다. 브라만(梵)과 아트만(我)의 상관관계로서 세상을 설명하는 이 사상은 쉽게 말하면, 모든 삼라만상의 개체들(我)은 창조주요, 본질인 브라만이 시간과 공간속에 나툰 제약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제약이란 미망, 또는 환상이라 불리는 마야(Maya)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의 개체는 하나의 병 속에 든 공기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그 병만 깨뜨려 버리면 병속의 공기는 크나큰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병에 감싸져 있다 뿐이지 본질적으로 병속의 공기와 병밖의 허공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범아일여(梵我-如)사상입니다. 미망, 즉 마야만 깨뜨리면 개체(아트만)는 본질(브라만)로 합일되는 것입니다.
표현하는 것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중국이나 인도나 비슷하질 않습니까? 이러한 세계관은 대체적으로 수정주의(修定主義)적 경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병을 깨뜨리는 작업, 즉 마야(미망)을 벗기는 일, 기도와 요가, 도교에서의 사심을 버리고 몸을 버리는 망아(忘我), 상신(喪身)의 연찬, 모든 사물에 나아가 그 근원적 이치에 계합하려는(格物致知) 도학자들의 양성(養性) 등의 수행법이 그것입니다.
한편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은 너무나 원시적인 소박한 형태로서, 나는 이러한 생각을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에 물든 불교인은 공(空)의 세계를 무(無), 도(道), 이(理), 본질(体) 등의 의미로 이해하여 공(空)을 마치 세계속에, 또는 일신상에 갖추어진 무슨 신비스러운 구슬이나 거울처럼 여겨, 때를 닦아내고 희로애락, 욕망 등을 제거하여 정제하여 드러낼 오묘한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공(空)의 가르침은 변화와 관계성의 가르침으로서, 존재 일반을 어떻게 이해하며 수용해야 하느냐는 점입니다. 또한 이는 구도자가 추구하는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곧잘 우리는 ‘깨달음’이란 말이 주는 뉘앙스 때문에 우리자신의 주관적 영역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난 뒤, 간발의 차이로 다가오는 대상에의 관심으로 몰두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대상존재에 대한 어떤 이해, 즉 ‘~을 인식한다’는 인식론의 차원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일반(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명료한 것은 존재일반에 있어 ‘인식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동시적으로 생성시키면서 그 성격을 규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두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우리 의식의 관행일 따름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존재일반(法)은 단순히 대상적인 존재가 아니며 선험적인 인식의 체계도 아닌 것이며, 주관적인 입장, 즉 ‘나’ 라는 것 까지 모든 존재일반 속에 용해시켜 주관과 객관을 어우러는, 인식과 존재를 동시에 부여잡는 차원의 장(場)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관계성을 일컬어 공(空)의 세계라 하며, 이러한 세계에 온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여 참여함을 ‘혁명적 깨달음(頓悟)’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깨달음의 제련을 거친 ‘존재일반’은 도교에서나 힌두이즘에서 보듯 인식의 틀 앞에 놓여진 일면적이고 자연적인 대상존재가 아닙니다. 이렇게 새로이 태어난(본래로 회복된) 존재일반(法)은 이제 달리 ‘마음’ ‘부처’ ‘중생’ 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수정주의적인 닦음이나 제거 동등 점진적 노력을 통해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존재를 단숨에 싸안아 넘는 혁명적 전환을 통해 깨달아 계합하는 것입니다.

꽃을 따고 잎을 떨어뜨려 그 후에 남는 가을의 앙상한 가지나 겨울의 질긴 뿌리만 나무의 본 모습이라 하는 생각은 결코 찬성할 수 없읍니다.

더욱 정 진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