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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일불승을 설하신다-방편품(方便品)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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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0년 02월 96호
ㄱ. 삼승의 깨달음의 부정
방광 따위 서품의 불가사의한 조짐들은 부처님이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에 들어 계신 중에 일어났거니와, 마침내 삼매로부터 조용히 깨어나신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을 상대로 법을 설하기 시작하셨다.
“부처님네[諸佛] 지혜란 심히 깊어 한량 없어, 그 지혜의 문이 이해키 어려우며 들기 어려우니, 온갖 성문·벽지불의 능히 알 바 아니니라.”
부처님의 지혜가 절대적인 것이어서 우리들 범부의 추측을 불허할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그 지혜로 들어가는 문’이라면 지금껏 설해 오신 가르침이 그것일 텐데, 어째서 이해키 어렵다고 하신 것인가 더구나 다음에 이어지는 게송에서는 성문·벽지불뿐만이 아니라 새로 발심한 보살은 말할 것 없고,
“불퇴전의 자리에 든 여러 보살이 그 수효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아 한 마음 다 같이 생각한대도 또한 알 수는 없으리로다.”
라 하여, 불퇴전의 위계(位階)에 이른 대 보살까지도 이해 못하는 부류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인정한 예외는 신심이 견고한 보살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지혜의 문’인 이제까지의 가르침을 성품·벽지불과 보살들이 다 이해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만다.
생각컨대 성도하시고 나서 오비구(五比丘)를 상대로 사제(四諸)를 설하심을 시발로 하여, 부처님께서는 수 없는 경전을 설해 오셨다. 그 내용은 자못 다양하지만 크게 나누면 대승·소승이 되고, 좀더 세분하면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의 삼승(三乘)이 된다. 성문이란 출가하여 집단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요, 연각은 성문보다 지혜가 뛰어나므로 부처님에게 의존함 없이 자력으로 깨달음을 여는 사람들이니 독각(獨覺)·벽지불( 支佛)이라고도 한다. 이리하여 성문·연각이 소승에 속하는 데 대해, 성불을 추구하는 대승의 구도자가 보살일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부처님의 온갖 가르침은 삼승이라는 말로 요약되고, 그런 과정에서 부처님은 “할 일을 마쳤다”고 그들의 깨달음을 인가해 모셨었다. 그런데 법화경에 오자 그 서두에서 너희들은 지금껏 나의 가르침은 이해하여 깨달은 듯 알고있었지만, 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은 것이라 하신 것이므로, 이는 일단 용인했던 깨달음을 송두리채 박탈하신 것이 된다. 굶주린 자에게서 밥을 뺏는다는 파주(把住)의 수법이시다.

ㄴ. 근기를 따르는 설법
그러고는 성문·연각·보살들로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같이 밝히셨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 일찍이 백천만억 무수한 부처님네 가까이 해 온갖 부처님의 한없는 도법(道法) 모두 행하며, 용맹정진해 이름 널리 들리며, 심히 깊은 일찌기 없던 법 성취하여서 근기를 따라 설한 바이기에 뜻이 이해키 어려움이니라.”
이해키 어려운 이유로서 먼저 제시된 것은 부처님의 지혜인데, 그것은 온갖 부처님의 세계에 합일(合一)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우리는 흔히 보리수 밑에서의 성도를 석가여래 개인의 체험인 듯 여기기 쉽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이라 할 때에는 그 체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필경은 개별성을 면치 못할 것이 뻔하니, 그것이 어떻게 절대성을 지니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절대적 깨달음이란 ‘무수한 부처님네 가까이해 한없는 도법 모두 행하는’ 일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신 것이니, 석자라는 개체가 사라지고 제불(諸佛)의 세계에 용해될 때 석가여래의 성도는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절대적 보편성에 승화되는 일이니, 석가여래의 깨달음이 따로 있고 아미타불의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네가 무엇을 깨달았느니 이해했느니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지다. 그렇다면 그런 경지는 이해키 어렵다해도 어째서 ‘근기를 따라 설하신’가르침마저 이해 못하는 것이 되는가.
근기를 따라 설한다는 것은 중생의 자질과 능력에 맞추어 법을 설해 오셨다는 뜻이므로, 의당 그것에 해당하는 근기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근기 따라 설한 것이기에 뜻이 이해키 어려우니라”고 했는가. 물론 근기를 따라 설하실 때 이해가 이루어질 것은 뻔하다. 그 이해의 정도는 근기에, 맞추어 설하신 선(禪)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이해에 한계가 있게 됨이니, ‘이해키 어려운’뜻이란 근기에 맞추어 설하시는 그 배후에 있는 부처님의 뜻이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을 때,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다면 그 뜻을 바로 안 것이 못 되듯, 근기에 맞추어 설하시는 가르침을 듣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부처님의 뜻을 이해 못한다면 이는 그 가르침도 바로 안 것은 되지 못한다.
이를 다시 방편과 진실의 관계로 파악해도 좋다. 곧 근기를 따라 설하신 가르침은 방편의 법이었고, 그 배후에 있었던 부처님의 참뜻은 진실의 법이었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에는, 지금까지 있어온 온갖 가르침을 방편으로 돌리고, 이제부터 밝히고자 하는 진리를 진실이라 하여, 그 진실을 모르기에 방편의 법도 제대로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밝히신 것이 된다. 왜냐 하면 부처님의 방편은 그 진실에서 나온 것이므로, 진실을 알 때에만 그 방편을 아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진실과 방편의 관계를 살피기에 앞서, 진실에 대한 부처님의 해설을 들어보자.

ㄷ. 일불승(-佛乘)
먼저 부처님은 삼천년에 한번 된다는 우담발화를 들어 법화경이 아주 드물게야 설해지는 묘법(妙法)임을 강조하고 나서, 이르는 바 방편의 정체에 대해 다음 같이 밝히셨다.
“사리불아. 부처님네 근기 따라 법을 설하심이 취지 이해키 어려우니, 무슨 까닮이어뇨. 내 무수한 방편과 여러가지 인연과 비유와 언사(言辭)로 여러 법 설했으되, 이 법이 사고·분별로 능히 알 바 아니라. 오직 부처님네들만이 아실 수 있기 때문이니라.”
곧 방편의 가르침의 배후에는 오직 부처님들만이 아시는 진실이 도사리고 있기에, 방편의 가르침의 취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는 해명이시다. 그러고는 그 부처님들의 진실에 대해 이같이 설하셨다.
“모든 부처님들께오선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해 세상에 나오시느니라. 사리불아. 어찌해 모든 부처님들께오서 오직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나오신다 이름인가. 모든 부처님이 부처의 지견(知見) 열어 청정하게 하려하시므로 세상에 나오시며,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을 나타내 보이려 하시므로 세상에 나오시며, 중생들로 하여 부처의 지견을 깨닫도록 하려 하시므로 세상에 나오시며, 중생들로 하여 부처의 지견의 도(道)에 들게 하려 하시므로
세상에 나오시나나, 사리불아 이를 일러 모든 부처님들께오서 일대사인연으로 하며 세상에 나오신다 하느니라.”
일대사인연이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유일한 목적이다. 골 부처님들께서는 유일한 목적이 있어서 출현하셨는 바, 그 목적은 부처님의 지견을 열며·보이며·깨닫게 하며·거기에 들게 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이어서, 이 개시오입(開示悟入)에 대하여는 천태대사에 의해 자세한 해석이 시도되기는 했지만, 한 마디로 말해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요직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셨다면, 그런 목적을 지니신 부처님의 교화가 성불의 가르침에 있을 것은 자명하니, 이것이 일불승이다. 곧 모두를 똑같이 성불로 이끄는 유일한 가르침이어서, 단순히 불승(佛乘)·일승(一乘)이라고 표현되는 수도 있으나 뜻은 같다. 이리하여 가르침에 이승(二乘)·삼승(三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불승만이 존재한다 할 때, 성문·연각이 부는 것도 아니어서 부처님의 교화의 대상은 모두가 보살이며, 수행 또한 모두가 성불을 목표로 하는 일불승의 수행인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금껏 삼승이 설해져 온 것은 무슨 까닭이냐는 의문이 생기고, 그것을 설사 진실을 위한 방편이었다고 이해한다 해도 방편과 진실의 관계가 어떤 상황으로 이루어지느냐는 과제가 남으므로, 다시 점검해 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