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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을 위한 비판불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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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석자명 1987년 10월 68호
얼마 전에 일이 있어 모 신문사에 있는 사람과 어느 암자에 며칠 동안 함께 머물면서 지낸 적이 있다. 그 또한 불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터여서 밤이 이슥하도록 우리 절 집안의 문제를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금의 불교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교육의 부재에서 야기된다는 점에 함께 동의하면서, 이러한 우리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비판이 활발히 일고 그래서 정법에 의한 새로운 가능성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내가 말하자, 그가 매우 걱정스레 하는 말이, 근근히 걸어가는 병든 말에 무리하게 채찍질을 하여 쓰러뜨리기보다는 그래도 조용히 지켜보면서 잘 되기를 비는 마음이 좋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나는 일견 그의 의견에 수긍하면서도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이건 안으로 자기 생활을 충실히 하는 비판 정신이 살아 있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우며 결국 소멸하는 비운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오늘의 한국 불교는 발전하고 있는가? 몰락하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냉철하게 눈을 바로 뜨고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왕조의 몰락 이후 우리 민족은 많은 역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분단 상황에 처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쪼가리나마 꾸준히 발전의 길을 걸어 왔다. 숱한 눈물과 피로 얼룩진 역사의 대가라고나 할까? 그 결정적인 계기의 한 모습을 우리는 6.29 선언에서 볼 수 있다. 6.29 선언은, 어느 한 개인의 정치적 결단이기 이전에,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온 대중의 목소리가 뒷받침된 것이며 그 격앙된 목청이 외쳐 온 민주주의의 수용이라 할 것이다. 그 평가는 뒤에 새롭게 내려지겠지만, 어쨌든 대중의 힘에 의해 스스로의 선택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 전기로서 의미가 깊다 하겠다. 한편 이러한 성과는, 크게 보아 서구 문화의 도전에 대한 우리의 부단한 응전의 노력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 하겠다.
누가 뭐라 해도 한국 사회는 이제 교육 수준이나 경제력에서 어느 정도 중산층이 형성되어 가고 있으며, 이 중산층에 의해 한국 사회의 앞으로의 진로가 선택되고 결정되리라고 본다. 물론 저간의 여러 가지 구조적인 모순과 갈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생들의 극단적인 의식화 경향, 아직 불이 다 잡히지 않은 노-사 문제의 대두 따위의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이제 중산층이 두껍게 형성됨으로써 자유 민주주의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소득과 분배의 평등함을 어느만큼 이룩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는 교육이 주도한 힘이 절대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 후의 교육 세대들이 중산층을 형성하면서 그들의 건강한 비판 의식이 살아 있어 어느 정도 갈등과 충격을 해소하며 사회가 발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바탕을 이루는 것은 바로 합리적 정신이라 하겠다. 합리적 정신은 서구에서 이성을 바탕으로 하여 계몽주의가 성취한 근대적 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물론 그밖에 동서고금을 통하여 합리적 정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보편적인 사유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 서구의 계몽주의 운동으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 절 집안을 돌아볼 때, 우리 사회가 그와 같이 변화하고 발전한 것에 견주어 불교계는 그저 옛것을 답보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보이지 않냐 싶다. 잊그제 아침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해설자가 나와서 한국의 종교 분포 현황을 말하는데, “아직까지는 불교 인구가 제일 많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 문득 그의 말 중에 ‘아직까지는’이라는 말에서 묘한 뉴앙스를 느꼈다. 예상 밖에 불교가 많다는 말인지, 아직까지는 많지만 앞으로는 뒤집혀질 것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아직까지는 많아서 안심이 된다는 말인지, 그 말을 곰곰히 되씹다 보니 오늘의 복합적 상황을 잘 말해 주는 말로 여겨졌다. 어느 사람의 말을 들으면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상황이 불교의 처지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때라고 한다. 타종교의 호전적 태도와 확산의 속도가 가히 위협적이라 할 만하다는 것이다.
국민학교의 경우에 한 반에서 불교를 믿는 학생 수가 한 둘에 불과하다. 또 어느 아파트의 경우에는 타종교를 믿는 어린이들이 불교를 믿는 어린이와 놀아주지조차 않아서 부모로서는 그 고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미세한 문제는 우리 스님들이 피부로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절에서 신도들이 받드는 대로 큰스님 노릇이나 하고, 속에 든 것은 없으면서 마음만 높아 야만에 꽉 차 큰 소리나 텅텅 치는 이의 눈에는 현실의 실재적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확실히 요즘은 안팎으로 문제가 산적해 있는 점으로 보아 역경계라 하겠다. 어느 때나 인간의 삶에는 문제가 따르기 마련이고, 문제가 없기를 바라기보다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일 터이다.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순경계보다 역경계에서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힘있듯이, 오늘의 우리 역사적 현실도 많은 어려움의 도전을 받고 있는 역경계인 만큼 그러한 도전을 극복함으로써 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내 개인의 이야기를 하자면, 출가 후 선방에서 정진도 했지만, 사실 학문적 관심이 더 많았기에 전통적인 강원 교육과 현대적인 학교 교육을 죽 받아왔는데, 적어도 출가 수행자의 교육을 통해 한 인격을 성취시켜 내기 위해서는 별도의 승가대학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승려들의 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승가대학의 설립 문제는 말이 나온 지는 벌써 몇십 년이 넘었건만 아직까지 종내 무소식이니 그것만 보아도 이 절 집안의 되어가는 모습을 알 만하다. 앞날에 크게 기대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교육의 제도화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꾸준히 함께 걸어왔다. 오늘날에 와서 국가가 교육을 독점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고 비판할 점도 있지만, 강력한 제도적 뒷받침이 없이는 교육을 온전하게 성취시켜 나갈 수 없기에, 우리는 종단적 차원에서 하루 빨리 출가 수행자의 인격 완성이라는 교육 지표를 확실히 설정하고 그에 따라 전통과 현대적인 것을 조화시킨 합리적 토대 위에서 교육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교육적 풍토가 조성되지 못한 때문이리라. 이를테면, “젊은 중들학교 보내면 다 환속한다”느니, “똑똑한 후배를 두면 자리가 위험하다”는 따위의 비교육적 발상 내지 사고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중들 학교 보내면 다 환속한다”는 생각이야말로 교육이 뭔지 모르는 어리석음의 소치이며 또 교육을 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방패막이일 따름으로 그 속에 감춰진 저의가 퍽이나 의심스럽다. 우리의 비판 정신을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리라. 삶의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인간성에 대한 최고의 신뢰성을 회복한다는 면에서 불교만큼 철저한 종교가 어디 있었던가? 왜 우리는 아직 무지 몽매한 잠 속에서 이토록 편협하고 어리석게 헤매고 있는가?
또 하나 중요한 문제점은 세대 사이의 갈등이다. 이것은 비단 절 집안의 경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어느 시대보다도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온 50대, 60대 계층의 가치관의 혼란 및 무주체성은 엄격하게 비판되어야 할 문제점이라 본다. 그들은 젊은 시절에 해방과 6.25를 비롯한 사회 변혁기를 겪는 동안에 일관된 가치관을 견지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현재 우리 절 집안에서 승단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이들 50대, 60대들이니 그로 파생되는 젊은 세대들의 갈등과 불만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얼마 전에도 있었던 사찰의 주지 자리를 둘러싼 자리다툼과 같은 낯 뜨거운 사건들은 그동안 우리가 진절머리가나도록 겪어온 일이며, 현재의 우리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런 악순환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한 악순환을 일으키는 파벌주의, 금력주의. 폭력주의, 모사주의 등 온갖 악덕을 극복하고 새롭게 우리가 살아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철저한 자기 반성적 사유를 통해 비판 정신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죄악이 나 자신과 무관할 수없으며 그러기에 비판 정신은 자각에 의한 자기 정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밖에서보다 안에서부터 풀어 나가야 할 것이기에 사회에 앞서 불교 종단이 먼저 새로와져야 할 것이며 또 나 자신부터 철저히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정법 회복은 가능하리라 본다. 차제에 정법에 입각한 불교의 비판 운동이 일어나 대내외적인 도전을 수렴하여 자기 성숙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여기에 이러한 비판적 태도의 근본 토대를 제시하자면, 첫째 인격주의(人格主義), 둘째 대중주의(大衆主義), 셋째 정법주의(正法主義)라 하겠다.
인격주의란 인간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힘을 말한다. 이 점은 인도나 그리스의 인간관의 전통과 맥이 그 궤를 달리한다. 오늘날 팽배해 있는 물신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인격이 오염되어 있음을 모두 깊이 반성하고 비판해야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인격체로서 올바른 대접을 받을 때에 우리의 참다운 삶은 회복되리라 본다.
대중주의란 민주 정신과 통하는 이야기다. 요즘 여건이 좋은 주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추태를 보이는 풍토 자체가 대중 정신의 결여에서 오는 잘못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대중의 원융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승가의 이념이고 우리는 다시 이러한 대중 정신의 회복을 통해 오늘날 땅에 떨어진 불교 집안의 모습들을 다시 제 위치로 끌어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절 집안의 풍토가 그 어떤 권위주의나 카리스마적 독단에 의해 이끌려 힘센 자들의 독무대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대중의 각성이 요청된다.
정법주의란 말 그대로 정법에 입각한 수행의 면모를 일신하자는 말이다. 결국 인격이나 대중 정신 모두 정법 정신과 다른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바른 법에 의해 마땅히 그러함을 성취해야 하고 타당성의 검증은 정법에 의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역경계의 않은 풍파는 모름지기 보펀적 사유를 통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판을 이룸으로써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폐쇄적이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 오늘의 우리 집안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구하며, 그 한 계기를 마련하는 토대로 비판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