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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성보(聖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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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7년 10월 68호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오백나한도는 중국 청나라 건륭황제(乾隆皇帝, 1736-1795) 시대에 살았던 궁중화가 정관붕(丁觀鵬)의 그림이다.
정관붕의 생몰(生沒) 연대는 잘 알 수 없으나 도석화(道繹畵)와 인물화(人物畵)에 정통하였으며, 유작(遺作)으로는 자유중국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평춘시도(太平春市圖)나 설어도(雪漁圖) 등 여러 명품을 남겼는데 특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오백나한도는 그의 대표작임에 틀림없는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이 오백나한도는 대작은 아니지만 섬세한 필치와 은은하면서도 화려한 색채가 종교화에서 느낄 수 있는 법열이 담겨져 있을 뿐더러 모두 보리수 잎에 그려져 있어 더욱 불교적이며 우아하다.
이 오백나한도는 화첩(畵帖)으로 되어 있는데, 총27장으로 각 장마다 보리수 잎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병풍처럼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총 길이는6m 61cm이며 한장의 크기는 높이가 31.5cm, 폭이 2,415cm이다. 이 화첩은 건륭황제가 직접 구한 보리수 잎에 당대 최고의 명화가 정관붕에게 오백나한을 그리게 한 것으로 보아 궁중의 보관용이었거나 그 당시의 고승(高僧)이나 큰 사원에 황제가 직접 기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화첩의 내용을 보면, 첫장에 푸른색 바탕에 보리수를 배치하고 연꽃 위에 42수(手)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을 그렸는데 한눈에 그의 필치를 알 수 있는 명화이다. 그 뒤의 25장에서는 보리수 잎 하나하나에 스무 분의 나현상을 그렸으며, 맨마지막 별장(別張)에는 사천왕(四天王)상을 그렸다. 그리고 각 장마다 그림의 좌편에 10줄로 된 발문(跋文)을 쓰고 있다.
이상의 관세음보살상, 오백나한상, 사천왕상은 화첩의 우편(右便)에 그렸고, 좌편에는 첫장에 은자(銀字)로 반야심경을 쓰고 또 금자(金字)로 금강경을 정성껏 사경(寫經)했으며 표지에는 ‘어제정관붕오백존나한책(御製丁觀鵬五百尊羅漢冊)’이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다.
이 화첩은 해인사가 고래(古來)로부터 보관해 오던 보물은 아니고, 세계 제이차 대전 중에 일본인이 가지고 있던 것인데 해방 뒤에 시중에 나타난 것을 1947년에 그 당시 해인사주지였던 환경(幻鏡)스님께서 구입하여 사중(寺中)에 보존해 온 것이다.
흔히 이 그림의 작자가 정운붕(丁雲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정운붕은 명나라 만력(萬曆) 때 화가이며 오도자(吳道子)의 화풍을 따라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많이 그렸지만 정관붕과는 별도의 인물임을 참고사항으로 밝혀둔다.

희랑(希郞) 조사 목각 조상
해인사의 구광루(九光樓)는 본래 재식시(齋式時)에 법요(法要)를 행하던 곳으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인사의 각종 성보(聖寶)를 전시하는 보장전(寶藏殿)즉 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곳에는 크고 작은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지만, 그 전시 상태가 극히 불량할 뿐 아니라 좁아서 유물을 보관, 전시할 새로운 공간의 확보가 시급하다 하겠다. 옷이나 종이류로 된 병풍과 같이 습도유지를 요하는 많은 물품들에는 특별히 보관상의 세심한 주의와 배려가 기울여져야겠으며, 물품 수효에 견주어 전시 공간이 너무 좁기 때문에 앞으로 해인사와 각 말사의 문화재급에 속하는 탱화와 불상 등을 더 훼손되기 전에 모아서 보관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여 근대화된 박물관이 세워져야 하리라고 본다.
이러한 문화 공간이 불교계에 결여된 관계로 중요한 불교문화재의 상당수가 국립, 시립 박물관에 보관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며, 아울러 수많은 성보들은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전달해 주는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이 없는 탓으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한갖 구경거리로 전락하여 있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사원의 유물 전시관뿐 아니라, 귀중한 자료를 한곳에 모아 전시할 불교 성보 박물관 건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실정이다.
각설하고, 보장전에는 중앙에 이 보장전의 주불(主佛)처럼 희랑(希郞)조사의 목각조상(彫像)이 버티고 앉아 계시다.
이 목각 조상은 희랑스님 자신이 조각하였다고 전해져 오는데 참으로 잘 만들어진 명품이다. 그 살아 있는 듯한 얼굴표정하며 전체적으로 약간 야위어 보이지만 그것이 이제까지 풍만한 불상과 보살상에 위암되어 온 우리들의 눈에 수도승의 탈속한 모습이 참으로 감명을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무로 만들었으나 목조로 보이기보다는 마치석고로 만든 것처럼 정교해 보이는데, 그 세부 조각이 대담한 생략과 섬세한 면을 고루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조각 수법이 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세조의 영정(影幀)
세조(世祖)는 조선시대의 연산, 광해군과 더불어 패덕(誖德)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단종을 폐위하고 사육신(死六臣) 등 많은 학자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왕으로 악명이 높다. 그런 반면, 정치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또한 불교가 박해받던 그 시대에 불법을 옹호하고 불사를 일으킨 왕으로서 불교계에서는 기억되고 있는데 특히 해인사에서는 세조의 영정(影幀)을 그려서 모실 만큼 대 공덕주였다.
사중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 1458에 어명(御命)을 내려 대장경전 40간을 중창하였으며 세조는 대장경 50부를 인출하고 각 당우(堂宇)를 중수하였다. 그 공덕을 기념하여 영정을 장경각에 봉안했는데 영정의 높이는 109cm, 폭은 72cm이다.
세조는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단종을 폐위시키고 많은 학자들을 죽인 것에 대하여, 야사(野史)에 의하면, 상당히 번민하였고 몸은 또한 괴질(怪疾)을 앓아 오대산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병이 나았다는 일화도 남기고 있다. 그는 전국의 명찰을 직접 찾아다니며 불전에 깊이 참회하는 기도를 쉬지않았으며, 중앙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한 것을 비롯하여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죄업을 씻으려는 노력이 대단하였는데, 해인사의 불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세조의 영정은 왕의 영정으로서는 퍽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영정이라는 초상화의 성격보다는 탱화와 같이 성격이 강하니 곧 시왕도(十王圖)의 형식을 따라 좌우에 협시(腦侍)를 그려 넣은 것이 그 특이한 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얼굴이 지나치게 큰 점을 비롯하여 회화로서의 가치는 내세울 것이 없고 다만 기록화와 같은 성격을 지닐 뿐이다.
이 영정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으니, “天須二年戊寅秋印經 佛事中領中樞院 事尹師路承政院都承旨위萺錫文等奉傳敎造成於御眞奉安干海印寺金塔殿”라고 적혀 있다. 그 뜻을 풀이해 보면, “천순 2년 무인년 가을에 인경과 불사 중에 중추원의 윤 사로와 승정원 도승지 조 석문등이 전교한 임금님의 공덕을 기념하여 임금님의 영정을 그려 대장경판전(金塔殿)에 봉안한다”는 뜻인데, 이것으로 세조의 행적과 조선시대의 불교의 한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세조의 영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