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에는 천추의 달이요
낙동에는 만리에 파도로다.
저 고깃배는 어디로 가는고
예처럼 갈대밭에서 쉬는구나.
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船何處去 依舊宿蘆花
이 오도송은 뒷날 대각교를 주창할 때 종지천명(宗旨闡明)의 구(句)로 삼았다.
전후 3차에 걸쳐 오도를 체험한 선사는 그 뒤에도 보림과 정진에 매진했으며 내전(內典)의 열람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선사는 40세 때까지 운수생활(雲水生活)로 전국을 주하면서 선(禪)을 중심한 한국 불교의 종맥을 확고히 했으며 당시의 선지식들의 병폐를 선사의 저서 「각해일륜(覺海日輪)」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럴 뿐만이 아니라 스님께서는 상비로암(上毘盧庵)에서 납자(納子) 접인의 선회(禪會)를 열어 내부적으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때에는 나라 안팎이 혼란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침략하여 을사보호조약 등이 체결되기에 이르렀으며 천주교, 기독교 둥 서구 강대국들의 힘을 업은 서양 종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아무리 산중에서 납자를 접인하고 선맥을 소중히 이어온 선사라 할지라도 시대적 상황을 못본 체하고 자신의 수행에만 전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사는 그 때의 답답한 심정을 망월사(望月寺)에서 설법하면서 표현하신 적도 있다.
1906년 3월에는 임상궁(林尙宮)이 시주한 6천원을 해인사에 보내어 부식이 심한 고려대장경판 장식을 모두 보수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1909년 46세 때는 해인사 원당(願堂)에서 미타회(彌陀會)를 창설하여 염불 수행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이와 같이 선사에게 있어서 해인사는 너무나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즉 출가한 곳도 해인사이고 열반 후 사리탑까지도 해인사에 모시고 있으며, 선사본인 스스로도 해인사의 승려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사의 산중생활은 47세까지 계속되었고, 선(禪)을 중심한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종맥을 확고히 했으며, 제방(諸方)의 납자들의 접인과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또 44세 되는 해에는 중국의 북경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많은 선지식들을 만나고 거량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결과로 세계의 정세와 시대의 변천을 냉철히 간파하게 된다.
특히 이때 많이 느낀 것이 기독교의 세력이며 여기에 대한 자극은 대단히 컸던 것 같다. 그러므로 47세 때는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기독교를 교리적으로 논박하게 된다. 아마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하여 교리적으로 논박한 저서로서는 이 책이 최초일 것이다. 선사에게는 이 때를 계기로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생활에서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서울에 상경하여 신도 집에서 선회를 열며 본격적인 대중교화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지금도 종로 3가 봉익동에 소재하고 있는 대각사를 창건하여 선도량을 개설하여 포교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3년만에 3천여명의 신도를 교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대각사는 뒷날 1919년 삼일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대각사에 주석하면서 만해 한용운, 손병희, 오세창, 선길주 목사 등과 함께 삼일운동을 모의하였으며 33인 중 불교 대표로 4번째 서명하므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출옥했을 때는 제자들은 대각사를 팔아버리고 말았으니 어디 한곳 갈 곳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가회동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곧 대각사를 다시 인수하여 새로운 포교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선사에게 있어서 서대문 감옥에서의 생활은 많은 자극과 새로운 불교의 민중운동에 대한 나아갈 비를 제시해 주었던 계기가 된다.
선사는 1921년 3월 출옥과 더불어 가회동에서 삼장역회(三臟譯會)률 조직하여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 등 30여종의 저술과 「금강경」, 「화엄경」등 30여종의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새로운 민중불교운동의 핵심을 대각교(大覺敎)라고 주장하면서 불교혁신운동을 꾀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선사의 중심 사상이요 한국에 있어서 민중불교의 조직적인 활동의 시초가 아닌가 여겨진다.
여기서 민중이란 일제에 서러움 받고 짓눌린 우리 국민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전개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재하려고 하여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면서도 한국 전통 불교의 근본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했으며 또한 일제와 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해 가는 승단, 왜색화되어 가는 한국불교의 버팀목이 되었으며 꺼져가는 법등(法燈)을 지켜왔던 것이다.
때로는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함양에 화과원(華果院)과 만주에 대각교당을 개설하여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장하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61세 때는 왼쪽 이에서 치사리(齒舍利) 일과(一顆)가 나왔다. 이 사리는 오늘날 해인사 서쪽 기슭에 탑으로 모셨으니, 이가 바로 용탑(龍搭)이다.
그러던 중 1940년 2월 24일 새벽에 목욕을 재계한 뒤에 제자들을 불러두고 “그동안 수고들 했다. 나는 간다”는 말씀을 남기고 입적하셨으니, 세수는 77세요 법랍은 61세였다. 그렇게도 갈망하던 이 나라의 독립과 불교 중흥의 과제를 남겨둔 채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선사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 민족 누구나 겪어야 했던 민족적 시련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련을 좌시만 하지 않고 그 시련을 극복하는 길을 불교적 입장에서 보여주었던 이정표였다. 나라를 빼앗긴 국민은 어떻게 하여야 하고 풍전등화(風前燈火)격으로 불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도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보살의 화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때에 용성선사와 같은 어른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전통 한국불교 종단인 조계종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고 반문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