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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의 참의미 /동욱 / 칠곡 보덕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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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2년 04월 242호
“남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보다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사람이 되거라.”맨 처음 출가하려고 해인사 백련암에 갔을 때 은사 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출가인이 행해야 할 일이 어디 이 하나뿐이었겠는가. 해서 그날 여러 말씀을 하셨을 텐데, 열 몇 살 어린 나이에도 그 한 말씀이 마음에 꼭 박히어 그 후 내 인생에 중심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남을 돕는다’는 말을 많이 하고 산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남에게 주어서 자신이 기쁘기 때문에 베푸는 이기적인 보시가 대부분이다. 남에게 베풀면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건 벌써 무주상無住相 보시에서 멀어진 것이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위치에 있거나 군림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모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스승의 가르침은 훗날 내가 절을 지을 때도 어디건 신도들의 이름이 적힌 곳은 없었고, 보시한 이의 이름이나 금액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게 했다. 지금 몇몇 학생들에게 주고 있는 장학금을 직접 주지 않고 통장에 넣어 주고 있는 것도 행자시절 가슴에 담아 두었던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은사 스님의 부처님께 공양올리는 모습이었다.
선사이셨던 내 은사 도원 스님은 어찌나 극진히 정성 들여 공양을 올리시는지, 보는 이들을 숙연케 할 정도였다. 그랬으니 공양물을 올리는 데 소홀히 한다거나 시줏물을 낭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채소밭에서 따온 고추 하나라도 반드시 부처님 전에 올렸다가 대중과 함께 먹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간 날벼락이 떨어졌다.
어느 해 여름, 백련암 원통전 불면석 앞 자두나무에 매달린, 채 익지 않은 자두 하나를 무심코 따먹었다가 어찌나 호된 꾸지람을 들었는지 모른다. 스님의 말씀인즉 ‘그게 어디 네 것이냐’는 것이었다. 도량 안에 있는 것은 곧 부처님의 것이요, 대중의 것이라는 말씀이었는데, 그 이면엔 무엇이든 내가 우선이 아니라 ‘부처님과 대중’이 먼저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스님의 그러한 가르침 또한 평생 내 삶속에서 실천되어졌다.
백련암에서 두 해 반 동안 했던 행자생활 중 어느 해 겨울의 일이다. 신부락에 내려가 정초에 먹을 가래떡을 빼오다가 그만 눈이 퍼부어 산길에서 몇 번이나 넘어지는 바람에 걸망 속에 넣어 짊어지고 오던 떡이 그만 엉망이 되고 말았다. 걸망 안에서 서로 들어붙어 먹을 수 없게 된 떡을 보시고 은사 스님께서 ‘떡을 버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부처님께 올리고 대중에게 올릴 것을 그리 무슨 짐짝 짊어지듯이 했느냐. 앞에다가 안고 왔으면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게야’ 하고 나무라셨다. 섭섭하고 야속한 생각보다는 어린 마음에도 꾸중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마 평생 모든 것이 내가 우선이 아니고 ‘부처님과 대중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고 어느 곳에 있든 극진히 공양물을 올리게 됐던 것 같다.
출가자에게 있어 스승은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스승만큼 삶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내 경우는 어렸을 적에 출가를 했으므로 스승의 언행이 그대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의 가르침은 그대로 내 살림살이가 되었고 평생을 지배했다.
내 은사 스님은 평생 참선을 하신 선사이다. ‘곰수좌’라는 별명을 갖고 계실 정도로 한 번 좌복에 앉으면 일어설 줄 모르고 정진했던 분이다. 용성 스님 계맥을 이어 받은 율사이시기도 했는데, 그 분이 지녔던 계행은 무서우리만치 철저했다. 다섯 해 전 세수 일흔일곱으로 입적하실 때까지 양말 한짝 시자에게 빨게 하는 법 없이 당신이 손수 했던 분이다.
은사 스님의 ‘시줏물을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은 철저했다. 하루는 행자 셋이 둘러앉아 식은 밥에 이것저것 나물을 넣고 프라이팬에 밥을 비벼먹었다. 은사 스님께 꾸중을 듣기까진 아주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를 보시곤 은사 스님께서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가라는 것이었다. 프라이팬에 밥을 비벼먹어 기름 먹은 프라이팬의 기름을 낭비했다는 것이 우리들의 죄목이었다.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스님의 태도는 너무 단호하셨고, 우리는 참담한 마음으로 보따리를 쌀 수밖에 없었다. 보따리를 싸들고 스님 앞에 가서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제서야 스님은 ‘너희들이 깊이 참회했으므로 용서해 준다’ 하시며 나가라는 말씀을 거두시는 것이었다. 자칫 쫓겨날 뻔했던 이 일은 행자시절 가운데 가장 기억나는 일로 남아 있다.
스님은 평소에 우리 행자들을 불러다 놓고 귀감이 될 만한 옛스님들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다. 통도사 뒷방 노장님들에 대한 얘기도 그 때 함께 해 주셨다. 즉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아래 위에 등잔을 두 개 켜야 책을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통도사에선 등잔 하나만 켤 수 있는 기름을 공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개인적인 돈으로 기름을 구입해 등잔을 켰는데. 반드시 자기 기름은 위에, 사중이 제공한 기름은 밑에 놓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윗 등잔에 기름을 붓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내 것이 공공의 것에 도움이 되어 괜찮지만, 등잔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공공의 것이 내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땐 스님이, 참 인색한 줄 알았다. 쌀도 한 말씩 딱- 내어 주셨고 팬에 두른 기름조차 아끼게 하셨으니, 어린 마음에 어찌 그리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나중에 내가 대중 처소에서 소임을 살 때 보니 ‘스님이 맞았다’는 생각을 깊이 했다. 공공의 것을 자기 것처럼 쓰면 이미 수행자의 본분에서 벗어난 것이다.
스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평생 내게 온 것들이 나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지 않게 했다. 사진전에 내걸었던 작품도 부처님과 나를 도와 주었던 신도들의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 그들에게 회향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스승이나 부모는 환경과 같다. 그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삶의 중심과 내용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신도들에게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지 말라고 한다. 맨날 싸우고 달려들고 하는 내용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면 아이가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나는 지금도 내 상좌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죽비가 부러지도록 때린다. 수행자로 잘 키우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이르고 있다.
“남에게 도움을 주려는 생각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 되라,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라. 공사公私의 것을 분명히 구분하라.”결국은 저 마흔 해 전 행자시절부터 스승이 내게 가르쳤던 내용이다. 스승에 견주면 턱도 없지만, 내 상좌에게 그리 이르고 있는 걸 보면, 행자시절 스승께 보고 배운 모든 것이 내 평생의 살림살이가 된 것임엔 틀림없다.
결코 후회하지 않으나 만족은 없었던 내 출가의 길에서 상좌는 물론 아는 이들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말이 하나 더 있으니, 그 당부 하나는 이렇다.
“간절히, 진심으로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