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산내암자를 순례하면서
해인사와 같은 대가람이 있으면 어디나 할 것 없이 산내암자가 있게 마련이다. 큰절이 대체로 공동 수도원이라면 암자는 개인 수도처이다.
따라서 암자는 경제적인 면에서나 행정적인 면에서나 독립되어 있지 못하고 대체로 큰절에 부속된 것이 상례였다. 지금도 산내암자 책임자를 주지라고 하지 않고 도감都監이라고 하든지 감원 監院이라고 하는 이유가 행정적인 독립권이 없음을 의미한다.
옛 부터 산내암자는 공동생활을 엄격하게 지키는 공동수도원에서 생활하기가 여의치 못한 노덕스님이나 특별한 수행을 하고싶은 스님들의 처소였으므로 독립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큰절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암자가 비대해지는 경향이 곳곳에 있다. 암자가 비대해지는 원인으로는 암자에 이른바 큰스님이 계시면 신도들이 모여들기 마련이고 따라서 암자가 급격하게 커지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해인사의 암자들도 비슷한 경향인지는 더 살펴보아야 하겠으나 큰절의 힘이 분산되어 버려서 한 곳으로 응집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해인사의 암자들은 비교적 긴 역사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백련암을 비롯한 희랑대, 홍제암, 국일암, 원당암, 용탑선원 등 각 암자들은 단지 그 암자 특유의 역할 이전에 지나간 역사의 손때가 묻어 있고 큰스님들의 발자취가 어려있을 뿐 아니라 많은 설화도 남겨져 있다.
따라서 앞으로 산내암자 순례기는 그 역사의 향취를 찾아가 볼 예정이다.
백련암白蓮菴은 산내암자 중에서도 큰절에서 가장 멀고 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큰절 쪽에서 동쪽으로 사 킬로미터쯤에 있다. 가장 높은 곳이어서 한가롭고 경계 또한 탁 트여 가야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암자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幻寂臺, 절상대 絶相臺, 용각대 龍角臺, 신선대神仙臺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백련암터를 에워싸고 있어 예부터 백련암터를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숭지로 일컬어 왔다.
백련암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다만 선조38년 서기 1605년에 서산대사의 문인門人 소암 昭菴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래 전부터 고승들이 즐겨 수행처로 삼아 오던 이곳은 역대로 산중 어른들이 주석해 왔다. 곧 소암대사를 비롯하여 환적 幻寂, 풍계 楓溪, 성봉 性峰, 인파 仁坡 대사와 같은 스님들이 일찍이 주석하였고 지금도 산중 어른이신 성철 방장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시다.
이와같은 출중한 고승들이 주석하였으므로 전해 오는 이야기도 많다. 임진왜란 당시 소암대사가 해인사를 지키고 있는데 왜병들은 스님의 뛰어난 도력과 명성을 듣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해인사 앞의 산마루턱에서 넘나보기만 하였다. 지금도 왜병들이 엿보았다는 산마루를 일러 왜규치 倭叫峙라고 부르고 있다.
소암대사 이후 백련암에는 환적스님이 주석하셨는데 스님은 백련암 동쪽에 있는 한 기암에 토굴을 마련하고 그곳을 스스로 환적대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오랜 좌선으로 한 생을 마치셨는데 스님은 늘 가야산 산신령이었던 호랑이와 벗하였다.
호랑이는 스님의 도력을 사모하여 늘 곁에서 스님을 수호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호랑이가 환적스님이 출타한 틈을 타서 환적스님의 시자 스님을 해치자 스님은 산신에게 명命하여 다시는 가야산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로가 가야산 일대에서는 호랑이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음은 오직 스님의 법력으로 말미암음인데, 지금은 환적대만이 스님의 전설을 묵묵하게 전해준다,
환적스님의 문인으로 풍계 명등스님이 있다. 그는 특히 시문에 능하여 주옥과 같은 시들을 남겼는데 아직도 유완록 流 翫錄 등 시문의 관록이 있다.
그리고 백련암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것이 뜰 앞에 서 있는 불면석이다. 마치 부처님의 얼굴 같아 그와같이 부르는데 백련암을 상징하는 거석이다. 백련암의 가람의 구조는 원통전과 영자당, 요사가 있었는데 얼마전 영자당에 모셨던 여러 스님들의 진영들을 큰 절 진영각에 모셨으며 그 뒤로 축대를 새로 쌓고 여러 채의 건물을 세웠다. 본디 칠십년대까지 지켜온 백력암반의 고유한 풍치와 한가로움을 오히려 손상한 것 같은 인상을 받음은 나만의 경험일까.
내가 처음으로 백련암을 찾았던 것은 고둥학교 이학년 초봄이다. 중이 되겠다고 달아나 백련암으로 갔는데 그때의 그 아늑하고 조촐했던 암자의 인상도 다 사라지고 지금은 거대한 성벽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어 오히려 옛 백련암이 그립다.
백련암으로 오르는 길이 산죽으로 덮히고 계곡물이 도란거리던 그 오솔길과 눈이 화등잔 같던 큰스님! 정말 큰스님의 눈은 호안 虎眼이셨다.
칠십년대까지만 해도 점심 이후 입선때면 문을 확 잡아채고 졸고 있는 수좌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도적놈아 밥 값 내 놓아라” 호통을 치시던 성철 큰스님.
그때의 백련암과 스님의 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