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용장 능선입니다.
저 아래 신우대 소복한 골짜기에 용장사 옛터의 소슬한 자취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능선에는 탑이 있고, 마애불이 있고, 머리 없는 부처님이 높이 앉아 있는 삼륜대좌불이 있습니다.
신라 때, 대현大賢 스님이 염불하면서 주위를 돌면
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전설 속의 불상 말입니다.
나그네는 바위에 걸터앉아, 또 다른 나그네를 생각합니다.
시대에 울분하고, 죽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울분했던 그 나그네.
그에게 생육신이라는 호칭은 아마도 모욕이었을 것입니다, 능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충신이 역적 되고, 역신逆臣이 공신功臣 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이, 산다는 것에 대한 능멸 아니면 다시 무엇이겠습니까?500년 전, 그 나그네는 여기에도 찾아와 흔적을 남기고 갔습니다.
인적 없는 깊은 골짜기에서 가랑비에 젖는 신우대를, 비낀 바람에 향기 흩날리는 들매화를 노래했고, 꽃의 떨어짐과 피어남을 노래했습니다.
빈 축대만 남은 용장사 옛터에는 여전히 신우대가 가랑비에 젖고, 철따라 꽃이 피어났다가 떨어지고 하지만 폐허는 허무하기만 합니다.
서쪽 내남들판 너머로 산맥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풍경도 무심하기만 합니다.
그대에게 묻습니다.
이 풍경을 안고 있는 용장사의 자취들이 보입니까?
거기 탑이, 마애불이, 삼륜대좌불이 보입니까? 전설 속의 대현 스님이 보입니까? 그리고, 시대와 불화不和하여 미치광이 행색으로 세상을 비웃던 나그네, 매월당 김시습의 모습이 혹시 일렁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