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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학림 원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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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2년 04월 242호
어느날 한 비구니가 봉선사 노장(월운 스님)을 찾아왔다. 체구는 작지만 눈과 말이 똑부러져보이는 이 비구니는 “스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했다.
1993년 당시 봉선사 주지였던 월운 스님은 마침 주지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봉선사에서 본격적으로 강講을 할 계획을 갖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좀 일렀다. 노장은 1년 후를 기약했고, 약속대로 정확히 1년 후 주지직을 놓고는 학인들을 모아 강판을 열었다. 강판의 1호 신청자는 당연히 1년 전의 바로 그 비구니 원민 스님이다.
한국의 화엄경 연구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될 《화엄경 십지품 삼가본 사기》가 출간되기까지 실제적인 두 주역, 월운 스님과 비구니 현암玄菴 원민圓敏 스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년 기도하며 강의 기다려
원민 스님이 월운 스님을 찾아온 것은 평소 알고 지내던 직지사 강사 화광 스님이 월운 스님의 강의계획을 전해주어서였다. 그래서 원민 스님은 자신을 청강생으로라도 끼워달라고 부탁했다. 비구니라는 점 때문에 물리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강은 열었지만 모인 학인이라고 해봐야 원민 스님 본인과 직지사 강사인 화강 스님 단 둘뿐이었으니.
“노장님 원래 생각은 정말 공부하고 싶어하는 비구들 몇이라도 모아서 강의를 하려 했을 거예요. 제대로 된 전통강사를 키우는 것이 노장님의 꿈이거든. 그런데 학인들이 오지도 않고 하니까 쬐그만한 비구, 비구니 둘 앉혀놓고 강의를 하신거지.(원민 스님도 작지만 화강 스님도 체구가 작은 모양이다.)”이 때 처음 본 것이 현수 법장賢首法藏(643~712) 스님이 해석한 《기신론필삭기起信論筆削記》. 기초를 중요시하시는 월운 스님은 불교교리체계가 잡히려면 법장 스님 것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원효元曉(617~686) 스님 것을 봐야 회통會通(모순된 것처럼 생각되는 여러 주장 가운데 상통하는 뜻을 모아 융화시키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원효 스님의 <해동소海東疏>는 기초가 약하면 교리와 행상체계가 안 잡힌다는 것. 그리고 《석가여래행적송》 등을 몇 개월 공부했는데, 1년 정도가 지나자 소문 듣고 학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장님의 신나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고, 이 때부터 화엄경 강의는 시작됐다.
능엄학림이 교육원에 등록되기 이전 이야기다. 월운 스님이 애초 생각한 것은 화엄학림이었다. 《화엄경》을 공부하므로 당연히 명칭이 화엄학림이 맞을 것이나, 이미 실상사에 화엄학림이 있어 같은 이름은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편으로 붙인 이름이 능엄학림이다. 과거 운허 스님이 《능엄경》을 강의한 바 있고, 제자 월운 스님 역시 ‘능엄경 강의’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능엄학림에서는 《능엄경》만 하는 줄 알지만.
봉선사는 예전 전통강사 키우는 방식으로 기초부터 차근차근 더듬어 올라가는 전통강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강원에서는 화엄경을 공부하는 데 1년을 잡지만 능엄학림에서는 화엄경의 앞뒤는 빼고 <삼현三賢>과 <십지十地>만을 하는 데도 3년이 걸렸다. 원래 학림의 학제는 2년인데 3년이 돼도 졸업할 기미가 안 보이자 교육원에서 졸업을 재촉하는 실정이다.

졸업후에도 혼자 남아 화엄경 공부를 마치니
1997년 《화엄경》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1기생들 졸업을 시켜야 할 상황이 되자 월운 스님은 공식적으로는 졸업이지만 강의는 계속할 테니 나머지를 듣고 싶은 사람은 남아서 들으라고 하셨는데, 남기를 원하는 이는 원민 스님이 유일했다. 그래도 월운 스님은 강의를 진행했다. 이 때 원민 스님은 월운 스님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명색이 봉선사가 본사인데 비구들 다 떠나고 비구니 혼자 남아서 강의를 들으면 노장님 체면이 서겠어요? 나 같으면 안 했을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노장님쯤 되면 그런게 상관이 없나봐요. 인간적으로 감동을 받았지요. 애초 비구니임에도 받아서 강의해 주시더니 혼자 남은 것에 개의치 않고 강의해 주신 그 은혜를 언제 한번은 꼭 갚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의외로 보답의 기회는 빨리 왔다.
《화엄경》이 끝나자 월운 스님은 원민 스님에게 <사기私記>를 주며 해보라 하는 것이었다. 원민 스님은 사기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기>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원민 스님뿐 아니라 대부분의 스님들이 <사기>를 보지도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에는 화엄경 주석서가 많아요. 대표적인 것이 청량징관淸凉澄觀(738~839) 스님 것과 이통현李通玄 장자 것이 있는데, 우리 나라 강원에서는 청량 스님 것을 택하고 있어요. 청량 스님이 본 화엄경을 우리 나라 스님들이 보고 나는 이렇게 본다, 또 이해를 잘 못하는 부분을 청량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탈자가 있다 없다 등을 지적해 놓은 것이 <사기>예요.”그러니까 <사기>는 강원학인들이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강사들 내지는 전문학자들이 보는 참고서라고나 할까. <사기>는 학인들의 학구기능을 저하시킨 훈고학적인 병폐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월운 스님은 사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깨달음에는 십지돈초十地頓超의 법이 있으나 사리事理는 꼼꼼히 따지자는 것이니, 반드시 계승 발전시켜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중요성을 강조하신다.
한국불교에서 전통적 경학연구 방식의 붕괴는 <사기>가 사장된 중요한 이유이다. 또한 한문세대 아닌 한글세대의 등장으로 초서로 쓰여진 <사기>를 읽어낼 수 없는 것도 <사기>가 무용지물화된 이유가 될 것이다. 게다가 비구·대처 정화과정을 거치면서 자료들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예전에는 태고종에 학자스님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정화 과정에서 그 후손들이 서책을 엿장수에게 팔아먹은 경우도 허다하답니다. 리어카로 몇 번씩 실어나르는 것을 노장님이 목격하셨다니까요.”원민 스님에게 <사기>를 하라 이르신 것은 그만큼 원민 스님의 공부능력을 인정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사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불교 공부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야 하지만 초서를 알아야 했다.

까막눈 되기 싫어 초서를 배운 것
원민 스님은 월운 스님으로부터 <사기>를 건네받기 전, 초서에 관심이 있어 지곡서당의 창명 선생 밑에서 청강생으로 다니며 배운 적이 있었다. 초서를 배우고자 한 것은 출가해 한문권에 있으면서도 어디가서 글자를 써놓은 것을 보면 읽을 수가 없었다. 아는 보살이 지곡선생의 제자여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는데, 살아 생전에 지곡 선생은 “앞으로 고문서 정리하려면 반드시 초서를 해야 한다”며 제자에게 초서를 배우라고 누누이 강조했다고 한다.
“나는 초서가 간단한 줄 알았는데 어렵더라구요. <사기>를 보며 초서에 대한 눈이 아주 조금 떠졌다고 할까요?”<사기>를 받아든 원민 스님은 처음에는 글자를 알 수 없어 수도 없이 월운 스님께 들고 갔다. 웬만하면 귀찮을 법도 한데 월운 스님은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다.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도 “저 아이부터 봐줘야 한다.”며 이야기를 뒤로 물리고 책을 받아드셨다. 그러더니 후에는 “귀찮게 오지 말고 니꺼하고 내꺼하고 똑같이 두 부 만들어 페이지 매겨갖고 전화로 하라.”시더란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찾아가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초서를 보게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론 스님 자신은 “아주 쬐금”을 강조하시지만.
“지곡할아버지에 따르면 개인따라, 나라따라, 시대따라 글씨가 다르답니다. 초서를 보면 시대를 알수 있을 정도로.” 일자로 죽 그어진 것이 어떤 것은 ‘물 수’를 나타내는가 하면 ‘말씀 언’일 경우도 있고. 그래서 판단이 안 서는 것은 앞뒤 문장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유학자들이 <사기>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다보니 노장님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글자들이 있어요. 그러면 문맥으로 끄집어내는데, 그런 것이 어려워요.”원민 스님은 불교와 초서를 안다고 <사기>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강판이 벌어져야 한다는 것.
이번에 <화엄경 십지품 삼가본三家本 사기私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월운 스님이라는 대강백과 초서를 정서 현토해 낼 수 있었던 원민 스님, 그리고 능엄학림이라는 3박자가 조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능엄학림에서의 공부진행 과정은 이랬다.
일정 부분을 정해 원민 스님이 정서 현토하고 - 이 때 무려 9권의 사기들이 방 안에 죽 펼쳐져 있을 때도 있었다 - 그것을 학인들에게 나누어 주면 학인들은 참조해서 나름대로 공부하면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월운 스님이 강의하면서 다시 바로잡고 하는 식이다.
“노장님은 의무감 같은 것이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 <사기>를 다 찾아다 정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그런데 노장님 혼자서는 할 수가 없어요. 연세도 있고. 물론 나도 혼자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둘이서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강판이 벌어져야 해요. 이것은 연衍이다, 탈자다, 오자다, 현토가 잘 됐다, 못 됐다, 안 된 부분은 새로 달고 내용 보고 교정하는 부분이 많아요. 그것은 강의를 해봐야 알거든요. 노장님도 강의를 하며 보는 것과 안하고 보는 것에는 차이가 난다고 해요.” 이번에 출간될 <십지품 삼가본 사기>는 조선후기의 대표적 사기인 설파상언雪坡祥彦(1899~1988), 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 인악의첨仁岳義沾(1746~1796) 스님 세 분의 저술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부분들은 지리산과 팔공산 등에 계시면서 영남계를 대표하던 인악 스님과 대흥사, 장흥 보림사 등에 계시면서 호남계를 대표하신 유일 스님 두 분의 저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오는 것들이 가장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스님은 말한다.
“가장 난점은, 어떤 것이 원래 스님의 저서인가를 모르겠다는 점이에요. 원래 유일 스님이 쓴 것이 이거고 후에 가감한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게 확실치 않아요. 판본으로 정해져 온 것이 아니고, 강사 스님이나 제자들이 써서 전해져 내려오다보니 여기서 베끼고 저기서 베끼고 또한 강사스님의 식견에 따라 가감을 하기도 했어. 그래서 명칭을 ‘갑을병’으로 붙여서 근거를 적어놓았는데, 그 다음은 후학 스님들이 더 연구해서 완벽하게 할 일이에요. 일단 지금은 챙겨놓는 일이 급하니까. 아니면 사장될까봐.”

앞으로 3년 후면 화엄경 사기는 완성될듯
사실 스님은 화엄경 공부를 마치고 2년 정도만 스님을 도와드릴 생각이었다. 비구니 혼자 놓고서 강의해 주신 그 은혜를 이 기회에 갚아보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기를 정서 현토한다는 것이 생각만큼 간단치가 않다. 워낙 방대해서 꼬박 3년이 걸렸고, 앞으로 나머지까지 하려면 3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어떤 때는 너무 힘들고 하기 싫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손 놓으면 후회할까봐.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요.” 스님은 이 일을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안하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자신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기에, 이왕 시작한 일 끝까지 해보겠다는 생각일 뿐이라고. 그러면서 신신 당부하신다.
“제발 얼굴 화끈화끈하게 띄우지 말라.”고.
그러고 보니 스님은 자신의 얘기보다는 내내 봉선사와 월운 스님과 능엄학림 학인스님들 칭찬으로 입에 침이 마른다. 그 겸손함이 아름답다.
60살 이전까지는 배우는 자세를 유지하기로 했다는 스님의 올해 세수는 46세. 꽃다운 17세에 출가했으니, 법랍이 30년이 가까워온다. 그러나 그 외모와 말씀만으로 보면 강원의 나이 어린 학인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특히 활짝 웃는 입매가 무척이나 천진하다.
스님에 따르면 출가자들은 출가할 당시의 나이에 어느 한 부분은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하더니, 속인의 눈에, 막 읽은 책 이야기를 친구에게 감동적으로 설명하는 열일곱의 홍조 띤 소녀가 보인다.
지금 봉선사 주위의 산천은 완연한 봄이다. 성급한 산수유에 이어 이미 붉은 진달래가 산을 설레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