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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10 - 빈틈에 놓여 있는 사람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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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 - 혜묵 1993년 03월 133호
중국 땅에서는 불교를 없앨래야 없앨 수 없다는 그의 깨달음과 나아가 사회주의의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다시 살아나기 마련이라는 말로 결론를 지었다.
나중에 직접 가 보고서야 그가 말하는 불상들의 폐허가 용문석굴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거의 완전하다시피 파괴되어 버린 그 거대한 유적을 보며 감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줌이 흥건히 괴어 있는 석굴 속의 잔재들 위에는 욕설이나 구호들을 포함하여 낙서들이 빼곡히 씌어져 있었다. 그 선교사는 파괴의 주범을 사회주의, 흥위병이라 단정 짓고 그래도 부숴지지 않고 남아 있는 불상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모습이다.

1991년 북경의 여름은 삼십오육도를 오르내리는, 말 그대로 살인적인 더위로 푹푹 쩌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십여 년 만의 더위라고들 했다. 더운 날은 사십 도를 넘었다고들 했다.
그래도 중국의 기후는 우리나라에 비해 건조한 편이어서 후덥지근한 불쾌감은 없어 생각보다는 견딜만했다. 지금에야 수교도 되었고 왕래도 자유로워져서 쉽게 한국사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만해도 한국사람이 매우 적을 때였다‘중국측이나 우리나라측의 관리가아주 까다롭던 때여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어렵게 입국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실정이었기 때문에 그때 그곳에서 간혹 만날 수 있었던 한국사람들도 대부분 특별한 목적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뿐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접할수 없었던 유형의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한때 홍미있게 그들을 관찰하기도 했었다. 가령 학교께서 공부하던 극소수의 유학생들 조차 대부분 교묘한 편법을 이용해 입국 체류를 하던
형편이어서 , 하나 하나가 일종의 모험담을 갖고 있었다. 나 또한 상당히 어려운 방법을 통해서 입학되었고 그 수속과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그러한 홍미 있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에 몇 사람의 선교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북경에 머물던 동안 한국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흥미가 있기로는 한국 선교사들이 으뜸이었다는 기억이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선교사들에 대해 관심이나 흥미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익히 당해 왔던 그들의 극성스러움 때문에 보통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이로운 사람들이라는 선입견 정도를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에 입국한 직후부터 나는 나 자신 또한 그들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종교인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머리를 깎고 치의 淄衣를 입어 눈에 띄이는 탓으로 선교 목적을 가진 선교사들보다 더욱 더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 실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무어라고 변명을 하든지 나는 중국 땅에 포교의 목적을 갖고 발을 디딘 한 사람의 선구적인 불교 선교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처음 만났던 한국선교사는 장로교에 속해 있다는 선교 단체의 책임자였다. 우연하게 길에서 만났던, 오십대를 바라보는 그 정렬적인 중년 신사는 마침 귀국 비행기 편이 잘못되어 호텔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는 내가 상상했던 보통의 선교사들처럼 정력적이고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단 한 마디의 중국어도 할 줄 모르는 그는 식당에서도 특유의 친화력으로 마늘과 파를 기어코 얻어내서 먹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번의 중국 방문이 두번째라는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웃통을 벗어 던지며 중국 땅에 들어와 겪었던 갖가지 선교 비화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교 활동이 만족스럽지 않고 쉽지도 않아 보여 상당히 실망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위와 짜증에 절은 내 모습에서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고 종교적인 이 질감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번의 방문은 선교가 목적이 아니라 선교 자금의 확보를 위한 오동나무의 수입이 목적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가 들려준 선교 비화들은 빨치산들의 기습 공격 같은 기발난 착상과 속도감을 지닌 것들어어서 갖 중국땅에 발을 딛는 어 리숙한 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세심하게 여성용 스타킹이나 속옷, 껌이나 초콜릿포장지 속에 선교 인쇄물들을 감추어 넣고기차칸이나 시장통에서 공안원들의 눈을 피해 순간적으로 뿌리고 다음 장소로 급히 이동하는 식의 선교활동을 주로 구사하는 모양이었다. 중국의 어느 지방엘 갔더니 부수어진 불상들이 무수히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모습에 상당히 충격과 감흥을 받았던 듯, 아주 열심히 그 모습과 유례를 자신의 감상을 섞어 설명해 주었다. 중국의 역사나 실정에는 그다지 지식이 없어 보이는 그의 설명은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는 기억이다.
중국 땅에서는 불교를 없앨래야 없앨 수 없다는 그의 깨달음과 나아가 사회주의의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다시 살아나기 마련이라는 말로 결론을 지었다. 나중에 직접 가 보고서야 그가 말하는 불상들의 폐허가 용문석굴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환전하다시피 파괴되어 버린 그 거대한 유적을 보며 감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줌이 홍건히 괴어있는 석굴속의 잔재들 위에는 욕설이나 구호들을 포함하여 낙서들이 빼곡이 씌어져 있었다. 그 선교사는 파괴의 주범을 사회주의 홍위병이라 단정 짓고 그래도 부숴지지 않고 남아있는 불상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던 모양이다. 아무리 부숴도 부숴도 다 부술 수 없는 불교 유적들이 전국에 퍼져 있고 아무리 탄압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 불교가 기특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히려 그 오물로 뒤덮힌 폐허를 돈 받고 공개하고 있는 중국 당국자들의 무감각함이나, 불상의 잔재들에 경건하게 합장하는 일본 관광객들의 이상한 신앙심이 우스워 보였을 뿐이다. 저녁 늦게 돌아와 다시 그를 보았을 때, 이제 그는 화제를 바꿔 나 개인의 상황에 대해 물어 대기 시작했다. 한나절의 휴식에서 기운을 되찾고 선교사라는 자신의 직분과 중이라는 나의 직분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는 불상들의 폐허에 대한 그의 감흥을 계속 들먹이며 나 자신의 선교 목적과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집요하게 물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습게 알았던 한국의 불교가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이렇게 선구적으로 선교를 기획하는 중도 있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생각한다는 따위의 말들을 지치지도 않고 늘어 놓았다. 더위와 중국인들의 불친절에 지쳐왔던 나는 그런 소리들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입학 수속을 위해 서류를 점검하던 나는 기어코 그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지금도 당황해 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눈을 뜨자마자 그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밤새 생각해 보고,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고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가 장황하면서도 분명하게 늘어놓은 제안의 핵심은 얼마를 주면 승복을 벗고 기독교에 들어올 수 있으며 , 얼마만큼 생활을 보장해 주면 기독교를 위해 활동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우스개로 귓등으로 들으며
외출할 준비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진지한 이야기임을 느끼게 되었다. 얼마 전 기독교로 전향, 부흥회로 말썽을 일으켰던 전직 승려라는 사람의 보도를 들었던 터여서 더욱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실제적인 금액과 처리 방식까지를, 그리고 그러한 유형의 실제 사례들까지 들어가며 설득을 해대고 있었다.
불쾌하긴 했지만 나는 그에 대해 그다지 나쁜 감정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아직도 그런 유형의 인간형이나 사고 방식에 흥미도 있고 관심도 있다. 그는 아무튼 그렇게 풀이 죽어 내 방을 나갔다. 몇 달이 지나 나는 다른 유형의 선교사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대만에서 온 한 무리의 젊은 선교단 이었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이 바로 한국 사람이었다. 내가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 , 그들은 기숙사 문 앞에 커다란 배낭을 내려 놓거나 기대고, 혹은 아주 길게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주 지쳐 보이는 그들 사이에서 한국말이 튀어나왔고 당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은 학생들을 포함한 국제적인 선교단의 일원들로서 훈련차 이렇게 그룹 여행을 나왔다는 설명이었다. 경비를 줄이려고 기숙사만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 불친절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 학교에서 숙소를 배정 받지 못하고 그렇게 그냥 기다리는 중이었다.
짐들을 임시로 내방에 들여놓고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그들이 매우 친절하고 깍듯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만과 한국, 일본과 미국 학생까지 한 명 포함한 그들 선교 그룹은 그런대로 신선한 감동까지 주었다는 기억이다. 길고 힘겨운 여행으로 지쳐있었음에도 몸가짐들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예절도 아주 바랐다.
동료들끼리의 예절도 유별나서 서로 서로 염려하고 지친 이들을 잘 돌보고 있었다 명랑하고 유쾌한 식사 뒤에 결국 방 배정도 받고. 잠시 휴식을 한 뒤에 한국 학생들을 포함해 몇몇이 내 방으로 건너와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한국청년은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돋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와의 친절하고 조리 있는 대화는 도무지 지루해지지를 않아서 , 그렇잖아도 대화에 굶주렸던 차에 자정을 넘도록 그치지 않았다. 옆 방에 있던 학생들이 불평만 하지 않았어도 대화는 새벽까지라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작년에는 몇몇이 자전거를 타고 한 달여 남방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는 그들의 목적은 선교자체가 아니라 선교를 위해 현지의 상황들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중국은 말 그대로 기독교 선교의 마지막 황금지대로 불린다. 12억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선교 단체들이 자금과 인력들을 쏟아 붓고 있다. 정부에서조차 그들의 자본을 외면할 수 없어 개방과 견제를 조절하며 선교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요즈음 중국정부가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선교 행위와 종교인들의 중국 입국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소문을 들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님들의 출입국에 제한이 심하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불교의 선교사로 낙인 찍혔던 기억이 나서 씁쓸하게웃게 된다. 그리고는 중국 땅에서 만났던 갖가지 유형의 기독교 선교사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삶을 던져 오는 용감한 사람들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