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언어의 역사성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
일반적으로 불교의 이해 및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불교언어의 역사성에 관한 좀더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허 최근의 번역이 그 언어에 정통성을 부여함에 따라 언어에 바탕을 두고 성립하는 종교에 대한 형이상학적 또는 존재론적 파악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를테면 모든 지어진 것은 괴롭다( Sabbe Samuh ra dukka; Dhamma pada, 278)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명한 것 같지만 언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그것이 이 문장 속에 번역상의 깊은 형이상학적 또는 형이심리학적 문제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고성제(苦聖蹄 : duhkh ryasatya )는 사실상 불교 이해의 출발이자 전체일 뿐 아니라 인도철학 일반에서 해탈사상을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관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의 역사성에 관해서는 별반 알려진 바가 없다. 괴로움 즉 duhkha라는 말은 원래가 하우어( Hauer )의 견해에 따르면 베다어에서의 duh와 kha의 바후브리히 합성어로 duh는 ‘나쁜, 어려운’의 뜻을 가진 전철이며 kha는 베다어에서‘수레의 바퀴살’을 의미하므로, 합치면 ‘나쁜 바퀴살을 지닌’이란 뜻이다. 이 말은 마치 중국어 묵(默)자가 ‘저녁 무렵 마을에서 개가 짓고 밥을 하기 위해 불을 지피고 연기가 오르는’ 한가함을 그림으로 보여주듯이 원래 추상적, 심리학적 용어가 아니고 매우 구상적(具像的)인 단어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은 그 반대말인 Sukha가 Su ‘좋은’와 kha‘바퀴살’의 합성어로 ‘좋은 바퀴살을 지닌’의 뜻을 지닌다는 데에서 명백해진다. 따라서 이 괴로움(dukkha; sk duhkha ) 이라는 말은 나쁜 바퀴살을 가진 차의 ‘불완전성, 동요성, 혼들림, 변화, 혼란’의 사태의 심각성을 지시하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심리적으로 ‘불안이나 괴로움’올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에 후에 심리학적 용어로 굳어진 것이다.
우리는 왜 ‘모든 지어진 것이 괴롭다’고 했을 때 ‘모든 지어진 것’이라는 존재론적인 주어가 ‘괴롭다’라는 심리학적인 술어로 주어져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지어진 것은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고 변화한다’라는 듯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운동개념이 엔트로피(혼란)의 개념으로 정의되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지어진 것은 괴롭다’는 것이 단순히 염세주의를 강화하는 심리학적 진술이 아니라 형이심리학적 진술이며 전 우주에 대한 존재론적인 정의임을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괴로움( duhkha )이란 말이 왜 더욱 나아가서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인 무상(無常), 공(空), 무아(無我) 등의 더욱 깊은 뜻을 의지하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 문맥에 따른 문법학의 이해의 필요성
불교 원전에서 특히 싼스끄리뜨어의 경우 이미 유명한 빼니니( p nini )에 의해서 완전히 과학적인 언어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필요로 함은 아라한의 오역에서 여실히 드러나지만 상이한 문맥 속에서 같은 단어-모든 고전어의 해석상의 일반적 문제이지만-가 심지어 상반된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어서 충분히 그 의미가 고려되지 않으면 잘못된 번역이 되기 쉬운 것이다.
이를테면, 마명(馬鳴)의 붓다짜리따( Bud오a Carita; 佛所行讚)의 경우, 담무참(曇無讖)의 한역은 한문 자체로서 훌륭한 오언절구이지만 원문에 비해 자의적인 것이 많으며 문맥상의 결정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 있다. 부처님의 탄생을 언급한 ‘Kramena garlh dalhinihsatah’란 문구를 漸漸從般出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문맥상 맞지 않는다. 여기서 Kramena는, Kram은 ‘걷는다, 통과한다, 기어오른다, 소유한다, 성공한다’의 명사형 주격으로서 부사적으로 쓰여서 ‘올바른 때에’라고 해석해야하지, ‘점점(漸漸)’으로 해석하여 ‘차츰차츰, 모태에서 태어났다’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을 존스톤( E.H Johnston )은 when in clue course he had issued from the womb으로 번역했고, 梶山雄一 등이 번역한 일역을 “その ふが 順調な 經還を 經て 胎より 出た とま”라고 영역에 따라 번역을 했는데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서”란 의미는 “漸漸”과 유사한 번역으로 올바른 번역어라고 할 수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티벳장경의 땐주르( Bstan-gyur )에는 그 부분이 ‘ mnal mas nmon par nes byun ba gzugs mdzas te ’로 번역되어 있어 문제가 되는 싼스끄리뜨어 Kramera가 누락되어 있다.
4. 주석적 번역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점
번역상 또한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원문의 의미가 불분명할 경우 주석의 해석으로 대체하는 경우이다. 물론 그것이 정확한 주석에 의해서 번역되는 경우도 있지만 주석도 주석가의 사견이 개입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언어적 감각을 살리지 못하고 단순한 명증적인 문구를 형이상학적인 어려운 문장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
이를테면 앙굿따라 니까야( A guttara nikaya IV -61) 에 param pi gautv akiriy ya Santhahanti 란 말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기껏해야 헛수고로 끝난다’란 뜻이다. 이것을 중아함업상응품도경(中阿含業相應品度經)은 ‘而鳥他說 然不獲利’즉 ‘다른 교설을 위한 것이나 이익이 없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paramd을 공간적으로 ‘他’로 본 데서 온 해석상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어의 남전장경에는 동일한 문장을 “幾何世代を 遡りてむ 作者するてと 無し”로 번역했는데, 이는 냐나띨로까( Nyanatiok )가 독역한“Selhst wenn man chnen bloB der Tradition folgt in Unt tigkeit enden”과 유사하게 번역한 것이다. 이들 번역은 param를 시간적으로 보아 ‘전통세대’등으로 해석한 것이다[이에 비해 우
드워드( F. l. Woodwrld )의 영역은 ‘( they ) , persist im a traditional doctrin of inaction’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다]. 이들 해석은 붓다고샤의 주석서 Manorathapurani에 따른 해석인 것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석임을 알아야 하며 원문 번역에 그것을 대체해 버린 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param이 원래 ‘극(極)’올 나타내므로 그 목장을‘기껏해야’로 번역하고 외도와의 논쟁은 무위(無爲; aksriyaya )라고 할 때는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도(道)의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헛수고’로 번역글이 더욱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기껏해야 헛수고로 끝난다’는 직역을 하고 그 뒤에 따로 주석적 입장을 천명해야 원문이 모든 주석적 입장을 포괄하는 생명력을 지닐 것이다.
5. 번역에 있어 정확한 음사(音寫)의 필요성
번역에 있어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원전의 고유명사, 번역 불가능한 단어의 정확한 음사일 것이다. 이를테면 한역장경에 아라한의 음사만도 阿盧漢, 阿羅漢, 阿羅呵, 阿羅呵, 阿黎呵, 適羅局帝 등 여러 종류가 있어서 초기의 중국에서의 불경 번역에서 어떤 음사를 택해야 하는지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다행히 로마자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이미 각국 언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음성학적으로 연구되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지만, 표기법과 발음기호가 상호 다르므로-예를 들어 티벳어의 경우 로마자 표기법을 읽으려면 전문적인 음성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표기는 옳게 하더라도 일반 독자는 각기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의 발음방식에 따라 발음해 버리므로 원래의 발음과는 큰 차이를 지닐 때가 많다는 것이다.
구미어(歐美語)에서는 그러한 표기법과 실제의 발음법이 충돌하지만 우리의 경우 완전히 다른 글자 유형을 가지am로 글자를 글자 그대로 옮기는 표기법의 창출은 불가능하며-적어도 선례가 없으므로-결국 소리나는 대로 외국어를 옮겨적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외래어에 대한 음성학적 체계가 아직 서 있지 않은 것이다.
특히 한국에 나와 있는 불교 관계 자료의 번역을 보면 싼스끄리뜨어, 빠얄리어, 티벳어,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의 표기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오류가 드러나 있다.
예를 들어 싼스끄리뜨어 유바나스와( Yuvan sva )를 유바나스바로 한다든가 빠알리어의 비빳싸나( Vipassan )를 위빠싸나로 한다든가 독일학자 노이만( Neumann )올 뉴먼이라고 한다든가 불란서계 독일학자인 뚜따( Tutoit )를 투토이트라고 하고, 티벳어 뺀첸( pan chen )을 판챈으로 적는 등, 이루 셀 수 없는 잘못된 음사들이 한국의 불교 관계 문헌에 등장하는 것이 퍽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