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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장경의 몇 가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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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박경준 1990년 02월 96호
1 만해 한용운 선사는 일찍이 ‘역경의 급무(急務)’라는 제하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조불조탑(造佛造塔)이 공덕이 아닌 것이 아니며 대가람을 창건하는 것이 사업[佛事]이 아닌 것은 아니나 그보다도 경전을 번역·유포하면, 공덕으로도 막대한 공덕이요 사업으로도 무상(無上)의 사업이 될 것이다. 아무리 천불만탑(千佛萬塔)을 조성하고 거사대찰(巨寺大刹)을 설립하더라도, 교리를 선포하여 중생을 제도치 아니 하면 3세 제불의 본원과는 10만8천 리의 거리뿐이 아닐지니 불교의 당국자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언제 들어도 역서 새롭기만한, 시대적 안목과 불교적 예지가 번뜩이는 만해스님다운 사자후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본디 불상을 조성하고 탑을 세우며 범종을 주조하고 절을 짓는 것은, 그러한 일 자체를 위함도 아니고 그를 통한 반대급부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그러한 불사들은 어디까지나 참다운 불사를 위한 기초작업이요, 진정한 불사의 상징적인 출발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을 마쳤다고 해서 불사를 끝냈다고 할 수는 없다. 고통과 미혹에서 허덕이는 이웃이 있고 우리들 자신이 한결같은 자유와 평정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한, 불사는 결코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불사란 곧 내가 스스로 부처(깨달음)를 이루는 것이요, 이웃을 부처되게(깨닫게) 하는 것이며, 하여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부처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45년에 걸쳐 몸소 그러한 불사를 행하셨던 것이니, 참다운 불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다름아닌 부처님의 말씀, 즉 경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은 경전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요 미혹한 중생들을 깨우치는 수단인 데에 참가치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되살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불교를 일부 지식계급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梵語] 로 설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불교는 반드시 각 지방의 민중들이 사용하는 일상어로 전해야만 한다”고 설하셨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범어로 전해져 오던 부처님의 말씀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혹은 서역어(西域語)로, 혹은 한문으로, 혹은 서장어( Tibet語)로 되살아났던 것이며, 근래에는 일본어와 영어를 비롯한 프랑스어, 독일어 둥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이러한 경전번역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인식되었던 것 같고 그 본격적인 역사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조선조 초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말(한글) 역경의 효시는 능엄경(楞嚴經),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등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계속되는 불교 억압 정책 때문에 그렇게 큰 결실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로부터 광복이 되면서부터, 경전의 한글화 작업에 대한 필요성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불교계의 선각자들은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64년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이 설립되었고,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활발한 사업이 전개되었다. 동국역경원의 핵심 사업은 다름 아닌 한글 대장경의 간행 사업으로서, 그것은 한국 불교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2. 그러나 역경원 출범 4반세기를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글 대장경 간행 사업을 되돌아볼 때, 아쉬운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러한 아쉬운 점올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느낀 몇 가지 문제점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취지로써 밝히는 바이다.
첫째, 한글 대장경의 우리 말 번역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올 독자들에게 인식시켜, 어느 정도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읽게 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왜곡을 최소화시켜보지는 취지이다.(필자의 경우, 고교시절까지는 한글 대장경의 번역 내용이 거의 완벽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
둘째, 오늘의 또는 미래의 불자들이 이러한 문제점올 깨닫고 그것을 극복·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어떤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 놓자는 취지이다. 예를 들면, 남북관계가 진전되어 혹시 통일이 된다면 우리한글 대장경과 북한에서 일부 번역·발간된 대장경을 자료로 해서 가칭 ‘한글 대장경 개정판’같은 것을 함께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역경의 중요성과 문제점에 대하여 좀더 많은 불교인들에게 인식시킴으로써, 역경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여 건설적인 의견도 수렴하고 재정적인 지원도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은 현재의 한글 대장경이 갖는 역사적 가치와 불교적 의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줄 안다. 한국불교의 참으로 열악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현재와 같은 정도의 업적을 일구어 낸 것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사실 한글 대장경이 발간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되었고, 한글 대장경을 근거로 많은 ‘불교성전’이 간행되어 불교 포교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본다. 불교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도 한글 대장경은 참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3 이제는 한글 대장경을 보아 오면서 필자가 느꼈던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이야기해 볼까 한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요 의견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첫째, 의미가 모호하거나 잘못된 번역이 적지 않다. 그 단적인 예를 한두 가지만 들어 본다.
먼저 용어의 개념이 잘못된 번역으로서, 잡아함경 7권 187경인 탐욕경(貪慾經) 가운데에는 “慢慢慢增慢我慢增上慢邪卑慢橋慢”이라는 귀절이 나오는데, 한글 대장경에서는 이것을 번역하여 “거만·거만의 거만·더한 거만·‘나’라는 거만·왕성한 거만·사특한 거만·야비한 거만·교만”이라고 하고 있다. 구사론(俱舍論)을 공부한 사람들은 ‘왕성한 거만’‘사특한 거만’‘야비한 거만’등의 우리 말 번역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느낄 것이다. 다음에, 문맥상 문장의 의미가 모호한 번역으로서, 증일아함경(增-阿含經) 제38권 끝부분을 보면 “나는 지금 모든 내 군사를 모아, 저 사문 얼굴 보나니, 만일 내 계책을 쓰지 않으면, 다리를 잡아 바다 밖에 던지리라”는 계송이 나오는데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전후의 내용을 잘 살펴서, 원문대로만 번역하려고 하지 말고, 의미가 통하고 내용이 연결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는 데에 문제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전문 역경사-적어도 한문 실력이 뛰어나고, 불교에 대한 상당한 소양을 겸비한-의 부족 또는 전문 역경사를 계획적으로 양성하지 못한 결과 때문에 야기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경 사업이 과거 중국의 역경원이나 번역원에서처럼 세분된 직제(職制)를 통한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체제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렇게 역사적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전에 진행과정이나 재정 확보 및 역경사 충원 등의 문제에 대하여 보다 치밀한 계획과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둘째,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정함으로써 많은 무리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한글 전용의 원칙을 세운 것은, 대본이 한문으로 된 경전이기 때문에 그것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고, 한글 대장경이라는 이름에 부합되며, 장차 한글 전용이 일반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긴 안목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삼다보니, ‘生死’를 ‘죽살이’로 ‘輪廻’를 ‘바퀴돌이’로 ‘器世間’올 ‘그릇누리’로 번역하는 등, 생소하기 그지없는 신조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개념의 혼란과 의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五蘊’을 ‘다섯 가지 쌓임’으로, ‘十八界’를 ‘18 경계’로 번역한 예도, 결국은 오히려 의미 전달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色受想行識’을 굳이 ‘물질·느낌·생각·지어감·의식’으로 옮긴 것도 문제가 있다. 특히 ‘생각’과 ‘지어감’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글 전용을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수반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말은 그대로 두되, 일본의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에서처럼 간략환 주를 달아주는 방법이 더 낫지 않았을까. 완전번역이란, 국한문을 혼용하더라도 의미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것을 뜻하지, 의미에 상관없이 한글만을 쓴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고유명시를 비롯한 말은 용어를 힘들여 산스크리트어로 표기한 점이다.
여기에서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 귀에 익은 ‘우바새’‘우바이’를 한사코 ‘우파라사카’‘우파라시카’로 옮긴다든가, ‘사위국’‘왕사성’을 ‘슈라아바스티이국’‘라아자그리하성’으로, ‘대목건련’‘교진여’를 ‘마하아 모옥갈라아나’‘콘단냐’ 등으로 옮기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이러한 산스크리트어를 읽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웬지 거리감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넷째, 호칭의 문제라든지 겸양어, 존대어의 문제에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인도유럽어에서는 겸양법이나 존대법이 별로 발달해 있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 말에서 2인칭에 대한 호칭이 ‘너’‘그대’‘자네’‘당신’‘자기’등 여러가지 격이 있는데 영어에서는 모두 ‘ you ’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한국어를 쓰셨다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어떤 용어를 선택하셨을까. 또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어린 제자와 사리불이나 목건련처럼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에게 아무런 구별없이 대하셨을까. 이러한 의문들을 가져보면서, 제자들을 지칭하는 역어로 ‘너’또는 ‘너희들’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차라리 ‘그대’‘그대들’이라는 표현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여기에도 예외의 경우는 두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현재, 한국불교의 한 과제는 역경의 양적 증대와 질적 향상에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완전 번역은 불타정신의 올바른 이해와 불교학 연구의 견실한 정초(定礎)를 위해서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동국역경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불교인의 관심과 협조, 그리고 종단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