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러나 역경원 출범 4반세기를 맞는 오늘의 시점에서 한글 대장경 간행 사업을 되돌아볼 때, 아쉬운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러한 아쉬운 점올 이야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느낀 몇 가지 문제점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취지로써 밝히는 바이다.
첫째, 한글 대장경의 우리 말 번역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올 독자들에게 인식시켜, 어느 정도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 읽게 함으로써 불교에 대한 왜곡을 최소화시켜보지는 취지이다.(필자의 경우, 고교시절까지는 한글 대장경의 번역 내용이 거의 완벽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
둘째, 오늘의 또는 미래의 불자들이 이러한 문제점올 깨닫고 그것을 극복·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어떤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 놓자는 취지이다. 예를 들면, 남북관계가 진전되어 혹시 통일이 된다면 우리한글 대장경과 북한에서 일부 번역·발간된 대장경을 자료로 해서 가칭 ‘한글 대장경 개정판’같은 것을 함께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역경의 중요성과 문제점에 대하여 좀더 많은 불교인들에게 인식시킴으로써, 역경에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여 건설적인 의견도 수렴하고 재정적인 지원도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은 현재의 한글 대장경이 갖는 역사적 가치와 불교적 의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줄 안다. 한국불교의 참으로 열악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현재와 같은 정도의 업적을 일구어 낸 것도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사실 한글 대장경이 발간됨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되었고, 한글 대장경을 근거로 많은 ‘불교성전’이 간행되어 불교 포교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본다. 불교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도 한글 대장경은 참으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3 이제는 한글 대장경을 보아 오면서 필자가 느꼈던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이야기해 볼까 한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요 의견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첫째, 의미가 모호하거나 잘못된 번역이 적지 않다. 그 단적인 예를 한두 가지만 들어 본다.
먼저 용어의 개념이 잘못된 번역으로서, 잡아함경 7권 187경인 탐욕경(貪慾經) 가운데에는 “慢慢慢增慢我慢增上慢邪卑慢橋慢”이라는 귀절이 나오는데, 한글 대장경에서는 이것을 번역하여 “거만·거만의 거만·더한 거만·‘나’라는 거만·왕성한 거만·사특한 거만·야비한 거만·교만”이라고 하고 있다. 구사론(俱舍論)을 공부한 사람들은 ‘왕성한 거만’‘사특한 거만’‘야비한 거만’등의 우리 말 번역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를 느낄 것이다. 다음에, 문맥상 문장의 의미가 모호한 번역으로서, 증일아함경(增-阿含經) 제38권 끝부분을 보면 “나는 지금 모든 내 군사를 모아, 저 사문 얼굴 보나니, 만일 내 계책을 쓰지 않으면, 다리를 잡아 바다 밖에 던지리라”는 계송이 나오는데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는 전후의 내용을 잘 살펴서, 원문대로만 번역하려고 하지 말고, 의미가 통하고 내용이 연결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는 데에 문제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전문 역경사-적어도 한문 실력이 뛰어나고, 불교에 대한 상당한 소양을 겸비한-의 부족 또는 전문 역경사를 계획적으로 양성하지 못한 결과 때문에 야기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경 사업이 과거 중국의 역경원이나 번역원에서처럼 세분된 직제(職制)를 통한 조직적이고 유기적인 체제로 운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렇게 역사적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전에 진행과정이나 재정 확보 및 역경사 충원 등의 문제에 대하여 보다 치밀한 계획과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둘째,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정함으로써 많은 무리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한글 전용의 원칙을 세운 것은, 대본이 한문으로 된 경전이기 때문에 그것과 확연히 구별할 수 있고, 한글 대장경이라는 이름에 부합되며, 장차 한글 전용이 일반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긴 안목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삼다보니, ‘生死’를 ‘죽살이’로 ‘輪廻’를 ‘바퀴돌이’로 ‘器世間’올 ‘그릇누리’로 번역하는 등, 생소하기 그지없는 신조어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개념의 혼란과 의미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五蘊’을 ‘다섯 가지 쌓임’으로, ‘十八界’를 ‘18 경계’로 번역한 예도, 결국은 오히려 의미 전달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色受想行識’을 굳이 ‘물질·느낌·생각·지어감·의식’으로 옮긴 것도 문제가 있다. 특히 ‘생각’과 ‘지어감’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글 전용을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수반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번역하기 어려운 말은 그대로 두되, 일본의 ‘국역일체경(國譯一切經)’에서처럼 간략환 주를 달아주는 방법이 더 낫지 않았을까. 완전번역이란, 국한문을 혼용하더라도 의미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것을 뜻하지, 의미에 상관없이 한글만을 쓴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고유명시를 비롯한 말은 용어를 힘들여 산스크리트어로 표기한 점이다.
여기에서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 귀에 익은 ‘우바새’‘우바이’를 한사코 ‘우파라사카’‘우파라시카’로 옮긴다든가, ‘사위국’‘왕사성’을 ‘슈라아바스티이국’‘라아자그리하성’으로, ‘대목건련’‘교진여’를 ‘마하아 모옥갈라아나’‘콘단냐’ 등으로 옮기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일까. 그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이러한 산스크리트어를 읽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웬지 거리감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넷째, 호칭의 문제라든지 겸양어, 존대어의 문제에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인도유럽어에서는 겸양법이나 존대법이 별로 발달해 있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 말에서 2인칭에 대한 호칭이 ‘너’‘그대’‘자네’‘당신’‘자기’등 여러가지 격이 있는데 영어에서는 모두 ‘ you ’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한국어를 쓰셨다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어떤 용어를 선택하셨을까. 또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나이가 어린 제자와 사리불이나 목건련처럼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에게 아무런 구별없이 대하셨을까. 이러한 의문들을 가져보면서, 제자들을 지칭하는 역어로 ‘너’또는 ‘너희들’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차라리 ‘그대’‘그대들’이라는 표현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여기에도 예외의 경우는 두어야 하겠지만).
아무튼, 현재, 한국불교의 한 과제는 역경의 양적 증대와 질적 향상에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완전 번역은 불타정신의 올바른 이해와 불교학 연구의 견실한 정초(定礎)를 위해서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동국역경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불교인의 관심과 협조, 그리고 종단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