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만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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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2년 04월 242호
봄바람이 매화 향기를 업고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삼각산 자락에 있는 작은 암자 주변에도 산수유가 꽃망울을 피우며 시절을 알리고 있다.
자연이 봄을 알리기도 전에 사람들은 더 수선스럽다.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뭇 생명의 씨앗들보다 더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댄다.
두꺼운 나무 껍질을 밀치고 나온 여린 잎사귀도 말없이 조용한데 마치 남에게 뒤질세라 봄소식을 알리는 것이 장한 일이라도 되는 양 ‘어디에 무슨 꽃이 피었네’, ‘어디에는 버드나무가 벌써 여린 나뭇잎으로 옷을 갈아입었네’ 하면서 지루한 사람들의 궁색한 살림살이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방송관계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유난스럽게 계절이 오고간다고 수선을 떨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말로나마 유난을 떠는 것은 사람들의 일상을 환기시켜서 조금이나마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고자 함이고, 자연이 지니고 있는 신선한 기운과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무한한 창조력을 더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철마다 나도 자연의 기운을 충전하기 위해서 훌쩍 도심을 벗어나곤 한다. 며칠 동안 선이 고운 남쪽을 돌아 미리 봄기운을 느끼고 오거나, 동해안을 따라 시원하고 푸른 바다를 담아 오기도 한다.
때론 오대산 보궁을 찾아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갖거나 토굴에서 정진하시는 스님을 찾아 빠져나간 기운을 재충전하기도 한다. 사람은 가끔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자기를 만나는 여행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 만나는 낯선 풍경은 마치 새 옷을 입었을 때처럼 조금은 불편하고 몸을 긴장하게는 하지만 신선함이 있듯이 느슨해졌던 일상의 끈을 조이기에 적당히 좋고 미지의 세계를 느끼게 해서 좋다.
올해도 굽어서 더 아름다운 선을 간직한 섬진강 줄기를 따라 흐르는 강물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형성된 매화마을을 지나며 지천에 피어 있는 청매꽃 향기의 유혹에 빠져 잠시 발길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고 귀에 모든 신경을 모았다. 어느 어른 스님께서 매화 향기는 코로 향기를 맡을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언제부턴가 매화 앞에만 서면 그런 습관이 생겼다.
서서히 눈을 뜨고 꽃잎에 눈을 맞추었다. 그 작은 꽃 한 송이가 품은 향기의 세계를 나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음악으로 느끼기로 했다. 마치 Beethoven의 Violin Sonata No.5 in F-dur, Op.24 ‘Spring’을 감상하는 듯했다.
봄을 노래한 음악은 많지만 봄이 되면 자주 즐겨 듣게 되는 음악이 바로 이 Spring Sonata다. 베토벤의 그 많은 작품 중에 바이올린 소나타는 10곡이다.
그 중에서 제5번이 스프링 소나타인데 작품번호를 참고해서 연대적으로는 제1기 말경의 작품으로 본다. 베토벤의 모든 작품이 그렇지만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Kreutzer’와 함께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곡은 베토벤 자신이 제목을 ‘봄’이라고 붙인 것이 아니다. 후에 붙여진 “Spring Sonata”라는 부제이지만 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선율이다. 1악장 Allegro에서 제1주제 선율이 바이올린으로 시작하고, 이어 피아노가 주제를 연주하는 형식으로 시작해서 곧 피아노가 포르티시모로 선율이 이어지면서 바이올린이 온화하게 어우러진다.
유려한 제1주제에 비해서 제2주제는 약간 거친 듯하게 이어진다. 마치 봄을 시샘하는 바람과 같이, 그렇지만 그 바람마저도 땅과 나무에서 생명이 움터옴을 도와주듯이 말이다.
10여 분 남짓한 1악장을 감상하다 보면 겨우내 땅 밑으로 잦아 흐르던 계곡의 물소리가 찬 기운을 털어낸 바람과 짝하듯이, 다투어 피어나는 꽃과 풀잎이 가볍게 나르는 새들과 대화를 하듯이 그렇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정겹고 온화하게 1악장의 선율을 펼쳐 간다.
전개부에 들어서면 제2주제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조바꿈을 동반하면서 새들의 힘찬 날개짓처럼 흥취를 고조시킨다. 마치 내가 무거운 겨울 누비를 벗고 풀옷을 가볍게 입고 여유롭게 도량을 산책하는 것처럼 말이다.
1악장이 그렇게 끝나면 2악장 Adagio molto espressivo가 이어진다. 2악장은 속도를 나타내는 말의 의미처럼 ‘마음씨 좋은’ 이라는 뜻에서 생긴 Adagio는 안단테와 라르고 사이의 느린 속도를 말하는데 거기에다 molto espressivo를 더하면 느리지만 매우 표정이 풍부한 선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2악장을 감상하다 보면 피아노가 주제를 콜로라투라 풍으로 장식을 하면서 이어 바이올린의 여린 떨림으로 이어지는데, 마치 화사한 햇살이 눈부셔서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나무의 두꺼운 표피에 깊숙이 침잠하고 때를 기다리며 은밀한 시도를 꿈꾸는 여린 잎사귀를 엿보는 듯하기도 하고, 어느 시인의 ‘찬란한 슬픔’이란 시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조용하게 끝난다.
3악장 Scherzo(Allegro molto)의 1분 남짓 되는 부분에서 밝은 선율을 들으며 가볍게 심호흡 한 번 하고 다시 4악장으로 접어들면 Rondo(Allegro ma non troppo) 선율이 이어진다.
명랑한 론도 주제를 피아노가 연주하고 바이올린이 이것을 반복하는 악장이다. 론도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주테마가 에피소우드를 사이에 두고 몇 차례 반복되는 형식이다.
troppo는 사전적 의미로 보면 ‘극도로 지나칠 만큼’이라는 뜻인데 ‘그러나’라는 ma와 ‘부정형’ non과 ‘함께 빠르고 경쾌하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빠르지 않도록 연주하라’는 지시어가 있는 악장이다.
어쩌면 이 3악장에서는 봄날 나른하게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춘곤증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말끔히 씻어 버리기에 좋은 악장이라고 할까. 힘이 있고 의욕이 솟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그 표현에 제대로 부응한 것이다.
음악은 감상하는 사람이 처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베토벤의 Spring Sonata는 나에게 봄을 느끼기에 충분한 그런 영양제 같은 음악이다. 악성樂聖 베토벤이 작곡한 대부분의 무겁고 진지한 느낌의 곡인데 이 곳은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산뜻함을 느끼게 한다.
이 곡은 베토벤이 30을 갓 넘어 1801년에 작곡한 곡이라는 면을 감안해 본다면 젊음이 있어 아름다운 베토벤을 만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낡고 작은 소리통에서 새어나오는 베토벤의 Spring Sonata의 선율에는 아직도 가벼운 바람결에 실려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던 매화꽃 향기가 실려있는 듯하다.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봄날 봄바람같이 가벼운 음악 한 곡으로도 충분한 여유를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이런 여유가 사치가 아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