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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의 깨달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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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看話禪 사상 - 인경 2002년 04월 242호
수행에는 반드시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세상의 사업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도의 정신적 수행은 더더욱 전문가로서 선지식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깨달음을 완전하게 성취하지 못한 대혜의 입장에서 보면, 담당 선사의 존재는 꼭 필요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입적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대혜연보大慧年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혜가 27세가 되는 1115년 늦여름에, 담당 선사는 가벼운 병세를 보이다가 질병이 급박해졌다. 대혜가 물었다. “화상께서 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면, 저는 누구를 의지해야 일대사一大事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담당이 한참 있다가 말하였다. “극근克勤이라는 이가 있다. 서로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만약 그를 만난다면, 반드시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후세를 기약해야 될 것이다.” 담당이 천화한 뒤, 담당 선사는 평소의 법어를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혜는 기억을 더듬어 송출해서 집성하고, 각범화상覺範和尙을 알현하여 편찬을 상의하였다. 이 때 각범은 발문에서 ‘내가 매양 이 노인이야말로 쇠퇴한 임제의 도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철인이 가버린 것을 간절히 탄식하고 슬퍼한다’고 했다.

여기에 의하면, 오늘날 전하는 담당문준湛堂文準(1061~1115)의 법어는 대혜의 기억에 의해서 송출되었고, 그 발문은 각범혜홍(1071~1128)이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말唐末의 혼란기와 오대五代의 전란으로 말미암아 당시 불교계는 침체되었다. 그렇지만 송대宋代에 들어와 정국이 안정되자, 불교를 비롯한 유교와 도교는 활발하게 자신들의 종파적 이념을 재정비하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마찬가지로 송대 임제종의 선승들 역시 임제의 가풍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원오극근과의 만남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점은 ‘스승의 중요성’에 대한 지적이다. ‘누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할까요’라고 묻는 대혜의 질문이나, 담당 선사가 ‘나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극근이란 이가 있다. 만약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생사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대답한 점은 모두 스승에 의한 공부점검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지만 담당 선사의 유촉에도 불구하고, 대혜는 곧장 원오극근悟克勤(1063~1125)을 참방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담당 선사와 동문인 도솔종열兜率從悅(1044~1091)의 제자인 혜조慧照(1049~1119)나 보융과 같은 황룡파 계열의 선사에 의지하여 공부를 계속하였다. 대혜가 32세가 되는 1120년에 무진(張商英 ?~1122)거사와 설두중현(980~1052)의 염고拈古를 가지고 문답을 했는데, 그 때 거사는 대혜에게 다시 원오극근 선사를 뵙도록 간곡하게 권하였다. 그러다가 담당 선사가 입적한 지 10년이 지나서, 36세가 되던 1124년 9월에 대혜는 원오극근에게 천영사天寧寺에 주석하라는 조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대唐代와 비교하면, 송대宋代의 선종은 국가에 의해서 보다 엄격하게 관리되었으며, 주지는 덕망 있는 인물로 관청에서 임명되어 발령되었다. 송대의 주지는 단순히 행정적인 임무보다는 수행하는 납자를 지도하는 일이 주요한 역할이었다. 오늘날 조실과 같은 지위를 가졌다. 대혜는 마침 가깝게 위치한 천영사의 주지로 원오 선사가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로 하늘이 내게 노사를 보내셨구나’ 하고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 1125년 4월 천영사에 방부하고, 5월 결제에서 마침내 원오의 상당법문을 처음 듣게 된다. 이것을 《대혜연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극근은 대중에게 말하였다.)어떤 승려가 운문에게 ‘어떤 것이 모든 부처가 몸을 드러낸 도리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은 ‘동산이 물 위로 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구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대혜는 홀연히 앞뒤 생각이 끊어졌다.(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채, 도리어 맑고 텅 비인 자리(淨處)에 앉아 있었다.

대혜가 입실하게 되었을 때, (이런 경험을 말하자) 원오극근은 말하였다. “그대가 그런 자리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어 버려 활발발活潑潑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구나. (조사의) 언구에 의심하지 않는 이것이 큰 병통이다. 듣지 못했는가. 낭떠러지에서 손을 뻗어 스스로 긍정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죽었다가 살아난다면 누구도 그대를 속이지 못하리라. 반드시 이 같은 도리를 믿어야 한다.”

위에서 첫 번째는 대혜가 겪은 종교적인 체험을 기술한 대목이고, 두 번째는 극근의 점검 내용이다. 대혜의 경험은 ‘앞뒤 생각이 끊어짐’과 ‘맑고 텅 빈 자리’로 구별된다. 전자가 생각이나 분별의 부정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맑고 텅 빈 자리의 긍정을 상정한다. 이 경험의 특징은 ‘순수하고 텅 빈 자리에 앉아 있음’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히 순수하고 텅 빈 자리라는 정태적인 경험, 일종의 선정이다. 이것을 원오는 ‘도달하기 쉽지 않은’ 경지이지만, ‘활달하지 못한 죽어 버린’ 자리라고 평가한다.
사실 대혜가 경험한 내용은 초기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의 청정을 의미하는 사선四禪의 경험과 같다. 최근에 관수행觀修行(Vipas、yana-)과 비교하면서, 간화선看話禪을 지수행止修行이나 선정禪定 수행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간화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이런 선정주의禪定主義는 극근이 결코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며, 오히려 큰 병통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렇다면 극근이 제시한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조사의 언구에 의심하는 방식, 간화선看話禪이다. 간화看話란 곧 ‘선문답(話)을 꿰뚫어 본다(看)’는 의미이다. 선문답에는 일상의 논리로는 해결되지 못한 갈등이 노출되고, 그 곳엔 삶의 근원적인 모순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에 대한 의심疑心이 바로 간화선의 일차적인 요건이다. 그래야 끊임없이 생멸生滅하는 일상에서 활달하게 내면으로부터 자유자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번은 ‘의심’이라는 생사의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겪어야 한다. 이렇게 죽었다 살아난다면, 누구도 그 무엇도, 더 이상 ‘그’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근은 텅 빈 선정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무엇에도 속지 않는 단 하나의 안목, 곧 지혜의 전체 작용만을 귀중하게 여긴다. 다만 한 가지인 ‘이것’은 형식에 매이지 않고 인연을 따라, 언제나 바로 눈앞에 현전하여 활발발하다. 그것은 ‘산이 물 위를 가고’, ‘전각에 서늘한 바람이 일어나는’ 역동적인 경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써 자연스럽게 선정과 대비되면서 간화선은 깨달음이 강조되는 수행이 되었다.□

인경스님은 송광사로 출가하여 송광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선학과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 동국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술로는 <몽산덕이와 고려후기 선사상 연구>가 있으며, 역서로는 <위빠사나 수행법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