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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불교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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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일지 1993년 03월 133호
불교 문화의 자기 갱생
우리 불교계에는 정말 이상한 습관이 한 가지 있다. 이미 제기되었거나 이구동성 앞을 다투어 했던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그 문제의 테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교단의 발전을 위한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그 문제가 일년 재탕, 삼 년 재탕, 십 년 재탕 거리가 되어 계속 같은 문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을 우리는 언제나 타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 역시 그 동안의 문제점을 다시 재탕하고 개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문제점만을 거듭 반추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습관을 버리고 문제점을 정면에서 응시하고 더욱 똘똘 뭉친 분야마다 전문가의 동아리들을 만들어 일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불교가 현대 산업사회라는 괴물을 잘 이해하고 다스릴 줄 모른다면 현대사회에서의 불교란 무기력한 자기 폐쇄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마술의 잠에 빠진 거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늘상 제도 개혁이나 종단의 정상적인 운영, 종교의 활성화, 교육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그 문제의 전말과 해결의 필요성에 대해서 누구나 보편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문화적인 기초가 있어야한다. 그러한 역량 없이 어떤 구호를 외친다는 것은 공허한 구호의 나열로 그치기 마련이다. 또한 현대 산업사회에서 불교가 당면한 과제들은 어느 누구, 몇몇 사람의 작업으로 쉽게 풀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불교는 문화적인 자긍심을 갖고 모든 방면에서 불교의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자기 갱신 작업이 먼저 필요하지는 않을까? 우리 불교는 기존의 제도, 권위만 앞세우는 승가의 살림살이만으로는 풀어갈 수 없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기존의 수로水路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변화의 물결을 유연하게 다스리려면 좀더 폭넓은 사고 방법과 작업의 탄력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제도 개혁을 하고 누가 종단의 요직에 앉거나 주지가 되는가의 문제는 그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위원회(?)에 맡겨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생동감 있는 현대 불교의 존재 방식을 먼저 생각하고 내실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승가의 권위만을 앞세우며 사부대중을 밀어붙이고 믿음을 강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만일 우리 불교가 도도하게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직시하지 못하고 권위의 작은 제방에만 안주하면서 현대사회에 복무하는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 제방은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은 위대한 문화 운동가
현대 불교의 존재 방식을 모색하며 되새길 때 우리는 불교의 문화적 역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 교계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 곧 종권을 둘러싸고 분열된 몇몇 사람들의 화합, 지성을 갖춘 대중들의 폭발적인 증가에 대체할 수 있는 불교도로서의 현대어 작엽, 깊이 있는 교육, 내실을 갖춘 포교 등의 문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보편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문화적인 역량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결국 교계가 당면한 어떤 문제도 불교 문화에 자기 생산력이 없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문화란 조금도 강제적이지 않으면서 한 시대의 가치와 행동 방식을 이끌고 순화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좀더 잘 정리되고 대중적인 불교 문화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다면 기존의 미흡한 점들은 스스로 바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비등하는 승가 대중, 불교도들의 양심과 의식, 고양된 문화적 역량을 막을 수 있겠는가.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란 인간의 노동 과정에 의해서 생성되는 물질적, 정신적 소득의 총체이며 인간의 존재 방식에 관한 의미를 부여하는 최상의 경험적 가치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언제나 의식을 생산하며 부조리하고 낡은 권위를 지양해가는 힘을 갖고 있다. 바라문들의 신학적 권위와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고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을 펴신 부처님이야말로 위대한 인간 문화 운동가였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 승가는 불교 문화 운동의 기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소중한 책무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불교 문화는 실로 우리 한국인들의 정서적 원천이며 우리 문화의 최고봉이라고 말해도 전혀 낯설은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교계의 일각에서는 문화를 웬지 오렌지스러운(?) 사치로 이해하거나 현대 불교가 요청받고 있는 문화적인 역할과 그 성과를 정면에서 응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고질적인 종단분규와 절을 더욱 크게 짓는 일, 삼천불 조성 불사만이 불교 문화의 창달이라고 자부해 온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척되어야 할 불교 문화의 영역은 아직도 무진장하다. 문학, 미술, 출판, 음악, 영화, 방송 등의 다양한분야에서 불교 문화가 좀더 활성화된다면 현대 산업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은 물론 교계의 난관을 창조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역량이 구축될 것이다. 문제는 교계의 난관을 필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필연을 돌파할 수 있는 의지와 노력이다. 각 분야마다 전문적인 안목과수행을 겸비한 스님과 불교도들이 좀더 많아져서 창조적인 기획과 문화 운동으로 나설 수 있는 교계의 인식 전환도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일지스님은 1974년 출가하여 강원과 율원을 수료한 뒤에 서옹선사께 선불교 수업을 쌓았다. 한때 「선사상」 「월간법회」 의 편집장 일을 하기도 했으며, 낙산사 교무를 역임했다. 역서로는 「임제록」을 비롯한 여러권과 ‘현대중공의 불교인식’ 이란 논문으로 제1회 해인상 「학술부문」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붓다·해석·실천」 , 「달마에서 임제까지」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