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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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김형태
2002년 04월 242호
대학시절 선배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우라’는 그 말을 나는 가득 찬 열정으로 되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이 무너져도 꼭 세워야 할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말이 다 옳다’는 황희 정승의 말씀에 더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즈음입니다
얼마 전 TV에 80년을 해로한 노부부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나이가 아흔둘에 할머니는 아흔 여섯인가 되셨는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현역 한의사였습니다. 일흔여섯 된 맏아들 이하 팔남매에서 나온 자손들이 백 명이 넘는 복 받은 그 할아버지가 세배를 받으신 후 하신 덕담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첫째로 건강하고, 둘째는 서로 참아 화목하거라. 셋째는 바르게 살아라.”어려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다 싶으면 그냥 못 넘어가는 내 성격 때문에 많이 부딪쳤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우리반 반장이던 철수는 대나무 잣대를 들고 아이들 책상 위로 마구 뛰어다니며 선생님처럼 군림했고 오줌이 급한 아이를 화장실에 못 가게 막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 대신 나서 반장과 싸우기 시작한 이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는 독재정치에 대들었고 그 이후에는 소위 ‘인권 변호사’ 소리 들어가며 20년을 보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세 번째로 말씀하신 ‘바른’ 삶을 나는 맨 앞에 내세우고 지낸 것입니다.
몇 년 전 파업을 유도한 검사들을 수사하는 특별검사보가 되었을 땐 검사 몇 명을 잡아넣으려다 반발에 부딪쳐 사표를 냈고, 그 다음에는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을 조사하다 역시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일부 유가족들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난 시절 탄압하던 쪽과 탄압 받던 쪽 그 어느 쪽과도 잘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친구들과 어울려 퍼 마신 술에 여기저기를 다치기도 하고 지난 겨울에는 손가락이 차 문에 끼어 손톱이 빠질 지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선배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우라’는 칸트인가 누군가의 말을 열정에 가득 차 되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한 고비를 넘긴 나이가 되니 하늘이 무너져도 꼭 세워야 할 정의가 과연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되었습니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황희 정승의 말씀에 점점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즈음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에서 시작되어 사막의 은수자隱修者들, 그리고 이슬람의 스승들을 통해서 비전되어오던 애니어그램을 얼마 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대처하는 유형, 남을 돕는 유형, 일의 성취에 관심이 있는 유형, 개인주의자, 탐구자, 착실형, 베짱이 유형, 권력 지향형, 평화주의자 등 아홉 가지로 사람의 유형을 나누고 있습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틀이 근본적으로 이렇게 저마다 다른데도 우리는 남들도 다 자기와 같다고 착각하여 자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강요하므로 세상에 싸움 그칠 날이 없습니다. 남이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와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이해하고 참을 줄 알게 되니 애니어그램을 초등학생 때부터 가르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만 선이고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악의 축’이라는 유치원생 수준의 사람이 세계 최강의 나라 대통령이라는 게 한심스럽습니다.
얼마 전 개신교에서 민영교도소를 운영하겠다 하여 법무부 위촉을 받아 심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운영지침을 살펴보니 교도소 생활 전체를 기독교 전도에 맞추어 구성해 놓고 있었습니다. 이 교도소에 불상이나 천주교 성상들을 모실 수 있느냐고 묻자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두 분 다 ‘나’라는 울타리를 헐어버리라, 다른 말로 이웃을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셨는데도, 우리는 꼭 ‘나’, ‘우리 교회’, ‘우리 종교’하는 식으로 울타리를 치는 것을 ‘스승님 잘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나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나’를 버린답시고 열심히 발버둥을 쳤는데, 이 나를 버린다는 것이 결국은 김 아무개라는 ‘나’가 더 큰 나, 하느님, 또는 천지만물의 근원이 되려는 욕심을 부린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 이 모습 그대로, 당신 주신 본성 그대로, 생긴 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내 어머니 아버지의 어느 날 밤 사랑으로 이 세상에 나서, 먹을 때 먹고, 쌀 때 싸고, 사랑할 때 사랑하고, 그리고 때가 되면 천지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내 몸은 썩어 흙과 물이 되어 나무를 키우고 물고기를 노닐게 하고 그것을 먹은 후대의 어느 누구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내가 누구로부터 배우고 익혀 깨달은 이 생각들은 다시 나 비슷한 유형의 어느 누구의 입술과 글을 통해 되살아날 것입니다.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 천지는 나와 함께 그 뿌리에 있어 같고, 만물은 나와 함께 한 몸이라 하셨습니다.
지난 겨울 술 취해 택시 문짝에 끼인 내 엄지손톱은 몇 달이 지나도 아직 아프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자식의 더 오랜 병고는 솔직히 가끔 머리 속에 떠오를 뿐이니 이 몸,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힌 이 존재가 해탈을 한다거나 하느님과 하나된다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해 보입니다.
김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남과 구분되어지는 이 몸뚱이, 이 생각이 해탈로 상태가 변화된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몸뚱이, 이 생각 그 자체로 이미 천지와 한 몸, 한 뿌리이니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두 다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어느 날 늘 따라 다니던 제자가 예수께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청하자, 당신께서 이리 답하셨습니다. ‘너는 나하고 그리 오래 다니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다.’ 석가세존께서도 세상에 나시자마자,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조 스님께서 서방국토를 보여 달라는 제자에게, ‘부처를 이루고자 할진댄 자기 성품을 향하여 지을 것이요,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자성이 미혹하면 곧 이것이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이것이 불佛이라.’하셨습니다.
저 문수봉 바윗덩어리 그대로, 나에게 잡아먹힌 소 그 모습 그대로, 피를 빨아먹은 모기 그 모습 그대로, 감옥에 있는 사형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버리려 애쓰는 어느 산골 스님이나 수도원의 수사 그 모습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요, 부처임을 저마다 알 수 있다고 스승님들은 입을 모으셨으니 존재의 한계 속에 갇힌 나도 기쁩니다.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파악하여 정의나 보편의 이름으로 남을 단죄하지 말고, 나를 버리려는 이룰 수 없는 꿈에서도 깨어나서, 천지만물이 나와 하나요, 같은 뿌리임을 알고 ‘나’ ‘우리’라는 울타리를 허는 일. 쉽고도 어려운 이 길이 우선은 내 앞에 주어진 길입니다.
그래서 아흔둘이나 사신 어른의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 닿습니다. 첫째는 건강이요 둘째는 화목이요 그 연후에 바르게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