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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의 법손들이 모여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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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2002년 04월 242호
전유한수前悠漢水요 후외용문後巍龍門인데
운집이인雲集異人하니 임제법손臨濟法孫이로다.
앞으로는 한강이요 뒤로는 용문산인데
인물들이 모여드니 임제의 법손이로다.

용문산 상원사는 고려 말에 태고보우 스님이 주석했던 유서깊은 사찰입니다.
태고보우 스님은 임제의 18대 적손으로 고봉원묘高峰原妙 선사에게 참학參學한 원나라 석옥청공石屋淸珙 선사에게 법을 받았습니다.
전법 후 그 곳에서 법을 펴다가 귀국하여 얼마 동안 활동하다가 자취를 숨기기 위하여 이 곳 용문산 북쪽 기슭에 오게 되었습니다.
푸른 숲은 길고도 빼어났으며 꽃다운 노을이 은은한 이 곳에 터를 잡고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몸소 밭을 일구며 지낸 곳입니다.
이 곳에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선원을 열었으니
이제 납자들은 덕산 선사의 방망이를 꺾어 버리고 임제 스님의 할喝을 부수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방의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에게도 속지 않는다면 그제서야 바람과 달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고보우 스님은 ‘우두백조牛頭百鳥’ 공안을 깨쳐 석옥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 공안은 우두법융 선사로부터 시작됩니다.
법융 스님은 유가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배우고 나서 불교의 반야부 경전을 보고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유가의 경전은 지극한 법이 아니요, 반야의 바른 관법觀法이라야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배로다.”하고는 모산茅山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습니다.
뒷날 우두산에 들어가 유서사幽棲寺 북쪽에 있는 바위굴에 앉아서 공부를 하니 온갖 새들이 꽃을 물어다주는 상서로운 일들이 종종 생기곤 했습니다.
이에 4조 도신 선사가 멀리서 이를 보고는 그 산에 기이한 사람이 있음을 알고는 몸소 찾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두 스님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정진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도신 스님이 먼저 물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마음을 관觀합니다.”
“관하는 것은 누구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또 어떤 물건인가?”그러자 우두 스님은 말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벌떡 일어나 절을 하고서 제자의 예를 갖추어 가르침을 청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완전히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옥의 티 같은 번뇌가 몽땅 없어지고 모든 상相이 영원이 끊어지니 이로부터는 선신들이 공양을 가지고 오지도 않고 새가 꽃을 물어다주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서야 서상瑞相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제대로 된 공부를 한 것입니다.
이것에 의문이 생긴 어떤 납자가 남전보원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두법융 스님이 4조 도신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째서 온갖 새가 꽃을 물어다 바쳤습니까?”“걸음마다 부처님의 층계를 밟았기 때문이니라.”
“만난 뒤에는 어째서 꽃을 물어 바치지 않았습니까?”“설사 새가 오지 않았다하더라도 남전의 실오라기만큼의 공부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이것이 종문에 전해오는
“우두미견사조시여하牛頭未見四祖時如何? 우두 스님이 4조를 만나지 못했을 때는 어떠합니까?”라는 ‘우두백조牛頭百鳥’공안입니다.

태고보우 스님은 이 공안으로 정진하기 전에 ‘만법귀일萬法歸一’ ‘조주무자趙州無字’ 등으로 정진했습니다.
태고보우 스님은 13세에 출가하였습니다. 19세 때 ‘만법귀일’ 화두를 참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공부에 진전이 없어 용문산 상원암으로 들어가 관음 보살께 예배하고 열두 가지 큰 서원을 세우고 참회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지극히 참회를 했던지 그 정성에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리하여 그 뒤로 칼같이 날카로운 지혜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뒤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빨 하나 들어가지 않는 것이 쇠뭉치를 씹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이웃 전단원檀院으로 옮겼습니다.
그 쇠뭉치 속에서 계속 정진하다가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무’자에 대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애쓰던 어느 날 무자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그 뒤에도 정진을 계속하여 38세 때에는 완전히 마음이 한 경계 쉬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 뒤 소요산 백운암에 머물면서 법열을 즐기고 있는데 무극無極이라는 중국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중국 남조에는 임제의 정통종맥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거기 가서 인가를 받으십시오.”
종문에는 스승 없이 깨달았다는 것은 바로 외도요 마구니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석옥청공 선사를 찾게 됩니다. 스님은 중국으로 갑니다.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 천호암天湖菴으로 가서 석옥 스님을 뵈었습니다.
노을 속의 도인의 풍채는 기운이 늠름하였습니다.
스님은 위의를 갖추고 그 앞에 우뚝 섰고 석옥 화상은 눈을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스님도 눈을 뜨고 마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절을 하고 물러났습니다.
이것이 첫 대면입니다.
이튿날 석옥청공 선사가 태고보우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두법융牛頭法融 스님이 사조四祖를 만나기 전에는 무엇 때문에 온갖 새들이 꽃을 입에 물고 왔던가?”
“부귀하면 사람들이 다 우러러보기 때문입니다.”
“사조를 만난 뒤에는 무엇 때문에 입에 꽃을 문 새들을 찾아볼 수 없었던가?”“가난하면 아들도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공겁 이전에도 태고太古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석옥 화상은 미소를 지으며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하고 인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 가사를 주고서 인가를 증명하며 말했다.
“이것은 노승이 평생 지니던 것이오. 오늘 그대에게 주니 그대는 이것으로 길잡이를 삼으시오.”스님은 절하고 받은 뒤에 물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하거니와 말후末後에는 어찌 하오리까?”“스승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천년을 가도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요.
만일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에게 전해 주시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내려온 불조의 명맥을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하오.”그리하여 귀국한 후 삼각산 중흥사를 거쳐 이 곳으로 다시 오게 된 것입니다.
이 곳에서 산중생활에서 물과 돌과 함께 스스로 즐기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제야 내게는 아무 걱정이 없으니
바위언덕 험한 계곡에서 쓸쓸함을 즐기리라.
바위구멍의 조그만 암자는 능히 내 몸을 감싸나니
흰구름에 모두 맡겨 서로 의탁하노라.
그대는 이러한 태고의 즐거움을 보라.
스스로 즐거워 계절이 가는 줄도 알지 못하고
피고 지는 바위꽃을 바라볼 뿐이네.”

태고보우 스님을 성철 스님께서는 조계종의 종조라고 하셨습니다.
태고 스님의 수행처에 700년만에
이렇게 주지 스님의 원력으로 선방이 개원되었으니 참으로 인천人天이 기뻐할 일입니다.
이 도량이 조계의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 선림에 백화가 난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눈 밝은 납자들이 속출하여 조사선 가풍을 진작하여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는 소림굴이 될 것입니다.

선유차당先有此堂하니 방유세계方有世界라.
세계괴시世界壞時라도 차원불괴此院不壞리라.
먼저 이 선방이 있은 뒤에 비로소 세계가 있었으니
세계가 무너지더라도 이 선방은 없어지지 않으리.

억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