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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보살과 보현 보살을 받든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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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설곡 2002년 03월 241호
내 출가 인연은 소년시절 어머니를 잃은 아픔에서 비롯되었다.
옷깃을 스치기만 해도 오백생의 인연이라는데, 다겁생으로 맺어왔을 어머니와의 인연이 그토록 빨리 끊어져 버린 데 대한 내 상심과 슬픔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할아버님에게서 한학을 배우면서 성장한 내 소년시절은 온통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이 두 가지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여름날 스님 한 분이 할아버지를 찾아오셨는데 몇 해 전에 입적하신 종조부님이셨다. 종고모님도 출가의 길을 걷고 계시니 불연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 같다.
며칠 머물러 계시던 종조부님께서 하루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죽음에 대해서 공부한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며 죽은 뒤에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를 공부하는 사람이다.”어머니의 죽음은 물론 할아버님에게서 배운 한학에서 일찍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눈떠 있던 나는 그날로 스님을 따라 집을 나섰다.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면 어머니 가신 곳을 알 수 있다’는 스님의 말씀이 나를 하루도 세속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님은 나를 학교에 보내고 자상하게 장래에 대해 걱정을 해 주셨지만, 그러한 걱정이 내가 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법회에 초청되는 스님들을 시봉하면서 많은 스님들을 뵈올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유엽 스님께서 나를 귀엽게 보시고 해인사를 이야기해 주시면서, ‘그 곳에 가서 참선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이 년 동안 살았던 종조부님의 슬하를 도망치듯 떠나 해인사로 갔다. 다시 출가를 했던 셈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수돗물도 없던 시절, 내가 해인사 공양주를 하고 있을 때 해인총림이 결성되었다. 그 당시 석남사 대중도 성철 큰스님 법문을 듣기 위해 해인사에서 결제를 했으므로 대중이 400여 명이나 되었다. 대중스님들의 한끼 밥을 짓기 위해 쌀을 한 가마니나 씻어야 했다. 요즈음처럼 정미된 쌀이 아니어서 매번 쌀을 일어야 하는데, 한 가마니 쌀을 이는 데 두 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쌀을 일 때는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쌀을 이는 시간이 하루 세 번, 두 시간씩 여섯 시간이었다. 손발은 시려운 정도를 넘어 얼어터지는 것 같았지만, ‘대중을 공양함은 제불을 공양하는 것과 같다’는 어른스님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겼다.
그 때 추위와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해 주신 분이 주지 스님이셨다. 주지 스님께서는 매일 공양간을 들르셨는데, 그 때마다 나를 향해 깊이 허리를 굽혀 합장하셨다. 행자들에게 합장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정성스러웠던지 그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어쩌다 쌀알이 얼음으로 서걱거리는 쌀뜨물에 섞여 떠내려가는 것을 보시면 아무 말없이 하수구멍에서 그 쌀알을 주워서 깨끗이 씻은 뒤 일어놓은 쌀에다 놓곤 하셨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하면 주지 스님께서는 내게 합장하시며 그러셨다.
“죄송합니다. 내가 행자님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그리곤 내 언 손을 꼬옥 잡아 주셨다. ‘쌀 한 톨을 소홀히 한 죄가 일곱 근이나 된다’는 시주물을 중요시하는 불가의 가르침이고 보면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행자의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내 실수를 덮어 주시고 오히려 따뜻하게 위로해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웠는지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 고달픈 공양주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스님의 말씀을 따뜻이,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장래 큰스님 되실 보살님. 지금의 어려움을 꾸욱 참고 견디면 반드시 큰스님이 되실 것입니다. 공양주를 하면 대복을 짓는 것이니 어금니를 물고 참으십시오. 반드시 불보살님이 당신을 옹호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이론의 나열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자비심을 베푸는 것임을 배우게 됐다. 출가의 길에서 인욕보다 강한 힘은 없다는 것을 가슴에 새긴 것도, 수행자의 생명은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춤에 있다는 것을 안 것도,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하심으로 대중을 따르며 살게 된 것도 모두 당시 주지 스님의 수행하시는 모습이 내 가슴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내 일생을 통하여 삶이 어려울 때마다 스님을 생각하며 정신적인 힘을 얻었고, 스님의 언행을 수행의 지표로 삼았다. 그 주지 스님이 바로 지월 스님이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성철 스님의 부름을 받았다. 큰스님 공양 시봉을 맡게 된 것이다. 스님은 소금기를 조금도 섭취하지 않고 싱겁게 먹는 담식을 하셨기 때문에 대중들이 먹는 음식을 드시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음식을 소금이나 간장을 쓰지 않고 따로 준비해야 했다.
그 때 내가 쓰게 된 방은 성철 스님 방 옆에 붙어 있는 작은 골방이었는데, 지월 스님 방과 붙어 있었다. 한국 최근세의 모든 큰스님들 가운데서 당시 지혜 제일로 불리던 성철 스님을 오른쪽에, 인욕 제일로불리던 지월 스님을 왼쪽에 모시고 살았으니, 행자로서 그보다 더 큰 복이 있을 수 없었다.
공양주를 할 때는 육신은 힘들었지만 신심과 기쁨이 있었던 나날이었으나 성철 스님을 시봉할 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스님의 기억력은 놀랍도록 대단해서 한 번 읽은 것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으셨다. 불길을 뿜어내듯 하던 눈빛은 어린 나로서는 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정성을 다해 모셨지만 조금만 잘못해도 불호령이 떨어지고 죽비가 날아오곤 했다.
좋은 말로 타일러도 될 터인데 어찌 그렇게 무섭게 하시는지 그 때는 스님 앞에 서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왔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바로 옆방에 자비의 화신이신 지월스님이 계셨으니, 어린 내가 꾸중을 듣고 서 있으면 언제고 남 몰래 나를 당신 방으로 데리고 가서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다. 성철 스님의 방을 청소하고 스님의 방으로 걸레를 들고 가면 내 손을 아랫목 방석 밑에 넣어 주시면서 쉬라고 하시며 손수 방을 닦으셨던 자비보살, 지월 스님. 스님은 나에게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에서 더 큰 힘이 나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해 주셨다. 그리고 언제나 성내지 않고 오만하지 않는 수행자가 되기를 서원하는 내 수행자의 삶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다.

산문에 들어온 지 어느덧 사십여 년이 되었다. 내가 행자였을 때 모시고 살던 스님들은 모두 입적하셨다. 이제는 내가 시봉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후학들에게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저 행자시절 내가 지월 스님의 언행을 수행의 지표로 삼았듯, 누군가에게 나도 그런 수행자로 남아 있는가.
출가 수행자의 목표지점은 지혜의 완성과 자비의 실현에 있다. 나의 행자 시절은 문수 보살 성철 스님의 칼 같은 지혜의 가르침과 보현 보살 지월 스님의 따뜻한 자비의 덕화를 배우고 익혔던 시절이었다. 두 분을 가까이 모신 그 인연으로 초발심시절 행자 때부터 오늘까지 생사문제를 잊지 않고 사는 수행자의 삶을 걸어온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복받은 행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