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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석題詩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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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천 - 김홍영 2002년 03월 241호
최치원의 제시석에 대해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 “최고운의 독서당에서 홍류동 동구까지 거의 10리인데 단애丹崖 벽령碧嶺에 송회松檜가 창창하고 바람과 물이 서로 부딪쳐 절로 금석 소리를 낸다. 공이 절구 1수를 썼는데 취중의 글씨가 초일超逸하다.”고 했다.
이후로 많은 문인 학자들이 홍류동을 찾아 제시석을 보고 각기 감회를 말하기도 하고, 이 시에 차운次韻하기도 했다.
일찍이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제시석을 두고 “부서진 돌 사이에 먹물 흔적 남았네/墨漬餘痕闕間”라고 읊었는데, 점필재 당시까지는 이 제시석에서 고운의 필묵 흔적을 그나마 느낄 수 있었던 같다.
시대를 조금 내려와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1579년 9월 가야산 유람 후 적은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폭포 곁 돌 표면에 최고운 시 1수를 새긴 것이 있는데 매년 장마의 미친듯한 물살에 씻겨 마멸되어 지금은 다시 알아볼 수 없다. 한참 손으로 비벼서 만져본 후에 어슴푸레 겨우 한두 글자를 얻었다”고 적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바로 폭포 곁에 위치한 제시석이 지난날 점필재가 고운의 필묵 흔적을 그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이 한강 당시에는 이미 대부분 마멸되어 거의 흔적을 살필 수 없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시석은 길에서 조금 높은 곳에 있고 또 그 필획이 매우 뚜렷하여 점필재와 한강이 말하던 제시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제시석의 좌측 하단에 작게 새겨진 ‘우암서尤菴書’라는 세 글자를 볼 수 있는데, 우암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이는 필세로 보아 우암 자신의 글씨는 아닌 것 같고, 다만 후인이 이 제시석의 글씨가 우암의 것임을 표시하기 위해 나중에 새겨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우암이 어떻게 이 글씨를 남기게 되었는지 그 전말을 알 길 없다. 그러나 우암의 서체가 대체로 활달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이는 우암의 글씨로 추정된다. 또한 동강東江 김영한金寗漢(1878∼1950)의 《급우재집及愚齋集》을 보면, ‘가야산 해인사’라는 시의 주에 “암벽에 우암이 쓴 최고운의 절구가 있다.”고 하여, 이를 우암의 글씨로 단언했는데, 우리는 동강의 박학다식을 믿어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