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과 남산으로 이루어진 대형국은 바다가 되고, 해인사는 선체, 대적광전과 판전 일곽은 선실, 판전 뒤의 수미정상탑은 선장, 구광루는 돛대, 학사대의 전나무와 봉황문 앞의 고사목은 아디채가 된다.
대적광전과 판전 일곽이 선실인 것은 대적광전 앞 축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축대는 그 아래 정중삼층석탑이 위치한 안뜰과 경계를 이루는데, 대적광전과 평행하지 않고 안뜰을 향하여 앞으로 약간 나와 볼록하게 휘어져 있다. 이는 실제로 많은 선실의 외곽 선이 약간 볼록한 모습을 한 것과 통한다.
구광루는 대적광전 앞 안뜰 남쪽 축대를 끼고 자리하고 있는데, 축대 아래의 해탈문 쪽에서는 2층, 축대 위의 정중삼층석탑 쪽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이 구광루는 산문인 일주문과 제일 뒤쪽의 수미정상탑의 중간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인사는 이 건물을 경계로 해서 단 아래와 단 위를 연결하는 진입축이 꺾여 있다. 진입축이 일직선이 아닌 것은 행주형국인 해인사는 정박하여 있는 배가 아니라 피안을 향하여 뱃머리를 틀면서 움직이려고 하는 배임을 의미하고, 구광루는 배가 움직이게 하는 ‘깃폭’의 역할을 한다. 이를 반영하듯 ‘구광루九光樓’ 현판 글씨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구九’자에서 ‘루樓’자로 갈수록 크게 쓰여져 있어 마치 깃폭이 방향을 트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구광루 서쪽으로 있는 적묵당 남쪽의 축대 역시 더 크게 방향을 꺾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준다.
학사대는 해인사 강원이 있는 경학원 서북측 뒤에 위치하고 있다. 학사대는 신라말 한림학사인 최치원이 만년에 독서하며 노닐었다는 곳으로, 이 때 최치원이 손수 심었다는 노거수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고사목은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에 이르는 진입로 가운데 되는 지점에 서 있다. 이 고사목은 애장왕 3년(802)에 순응, 이정 두 스님이 해인사를 개산開山한 기념으로 식수하였다고 한다. 이 나무는 1945년 고사하여 지금은 뼈대만 서 있다. 이 전나무와 고사목은 풍수지리적으로 배의 돛대를 고정시키는 아딧줄(밧줄, 앗줄)을 잡아매는 아디채가 된다.
이 외에도 해인사 경내에 있는 전각들의 배치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내용들이 꽤 있다.
해인사는 사찰 뒤쪽의 주산인 가야산 정상과 앞쪽의 조산朝山인 남산을 축으로 한 좌향을 취하지 않고 약간 돌아앉아 있다. 다시 말하면, 가야산에서 흘러 들어온 해인사의 내맥來脈은 남쪽의 매화산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실제로 해인사는 남산을 바로 보지 않고 거기서 약간 오른쪽을 향한 좌향을 하고 있다.
이는 해인사가 풍수지리적으로 남산 봉우리 형상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화기火氣를 피하기 위해 그러한 좌향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상징적으로 반야용선을 타고 피안으로 떠나려고 하는 배의 형국을 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기법은 풍수지리적으로 해석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또 건축 입지 및 공간적으로 보아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게 가람을 배치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적광전 북쪽 밖 모퉁이 부근에는 두 개의 초석이 있는데, 이 초석은 대적광전이 순조 17년(1817) 대화재를 당하기 이전의 것이라고 하며, 초석의 배열 상태를 근거로 대적광전은 원래 남산을 향하여 앉아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해인사가 화기를 피할 것을 강조하다 보니,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좌향이 아닌 남산을 향한 좌향을 하였다고 가정하였을 때, 이는 해인사의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배치가 된다. 오히려 대적광전 뒤 초석들은 지금의 건물보다 규모가 큰 2층 전각이 서 있었음을 증명케 하는 유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적광전 아래 뜰에 있는 정중삼층석탑은 구광루와 대적광전을 잇는 중심선상에서 동쪽으로 약 6m 비켜 서 있다. 이러한 석탑의 위치는 풍수지리적으로 풀이되고 있다. 탑은 인체의 심장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약간 비켜 서 있다고 하기도 하고, 해인사의 소형국을 이루는 좌청룡, 우백호에서 청룡이 풍수지리적으로 약하다고 해서 이를 비보하기 위하여 왼쪽으로 치우치게 탑을 배치하였다고도 한다. 상징적으로 탑은 배의 중심인 안뜰에 위치하여 배의 요동을 막는 역할을 한다.
원래 석탑 서쪽으로 수각이 있었는데, 해방 후에 이를 메우고 수각을 이전시켰다. 우물은 배의 밑바닥을 훼손하는 것과 같으므로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해서 메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해인사 가람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지리적인 내용과 습합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풍수지리적인 내용으로 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중삼층석탑 남쪽에 위치한 구광루는 정면 일곱 칸의 누 마루집으로, 원래 동쪽에서 두 번째 칸 아래를 틔워서 통로로 사용한, 일종의 누하樓下 진입방식을 하였다. 누하 진입방식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건물은 음터에 자리를 잡아야 좋기 때문에 해인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도록 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구광루는 대적광전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건물로서, 누 밑을 통하여 단 위를 오르면 정중삼층석탑이 있는 공간이 갑자기 전개되도록 하였다.
범종각 뒤에 위치한 청화당 자리에는 본래 정미소로 사용되던 창고가 있었는데, 해인사의 백호 부분을 비보하고 북풍을 막기 위하여 정미소는 적묵당과 학사대 서쪽 등 바깥 아래로 옮기고, 이 자리에 청화당을 1984년에 새로 지었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단오날 해인사 경역 내 수 곳과 남산(매화산) 꼭대기에 소금을 묻어 화기火氣를 진압하는 행사를 한다. 해인사 경내 수 곳에는 염주석이 설치되어 있어, 단오날 이 염주석에 소금을 담고 물을 부으며, 또 해인사 경내와 남산 꼭대기에는 선원 대중이 소금을 담은 항아리를 묻는다. 매화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 정상에 소금을 묻는 것은 매화埋火를 한다는 뜻도 담고 있는데, 이는 해인사가 조선조 후기에 자주 화재가 나므로써 이를 막기 위하여 화산인 남산의 화기를 진압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행사이다.(단오날 선방 스님들이 남산에 오르는 행사는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결제에 들어가 오랫동안 정진을 하여 쇠약해진 신체를 단련케 하는 방책으로도 볼 수 있다.)이러한 행사는 풍수지리적으로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교사찰이 발생지인 인도 북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문화, 토속신앙 등과 결합되어 ‘민족화’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해인사도 예외가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인사 가람의 특성을 이루는 경관구조, 진입체계, 배치 및 외부공간, 그리고 구성요소 등은 풍수지리와 연관된 상징체계를 이루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해인사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개산하였다고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해인사는 창건 당시 수행하기에 좋은 땅을 골라 세웠고, 그 후 그러한 터에 어울리게 가람을 일구어 나갔다고 볼 수 있으며, 풍수지리적인 내용과도 잘 습합해 나갔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해인사의 많은 전각들은 불교 특유의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설들이지만, 이러한 전각들이 풍수지리의 행주형국과 결합된 여러 상징적인 의미체계를 갖게 된 것은 풍수지리적인 상징체계와 건축공간 및 기능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결국 하나의 전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