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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형국과 가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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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야 - 이상해 2002년 03월 241호
산사山寺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상은 비슷하다.
법당 지붕의 부드러운 곡선과 어울리며 지붕 뒤 멀리 법당을 받쳐주고 있는 산마루의 곡선. 그리고, 무엇에 파묻힌 듯한 경내의 아늑한 분위기.
사찰 전각과 주변 산세의 조화, 그리고 경내의 아늑한 분위기를 두고 흔히 산사는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절터가 점지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것은 수행 도량으로서 적합 여부였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왕 짓는 사찰 전각이라면 주변 산세와 어울리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자연과의 조화, 그것은 풍수의 한 속성일 수는 있어도 오로지 풍수지리사상에서만 보이는 내용은 아니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건축 행위치고 주변과 조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없다. 다만, 그 판단 기준과 적용 방법이 다를 뿐이다. 산 속에 자리잡은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들은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길지吉地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곧 절터를 잡을 때 풍수를 중요하게 고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터의 특성을 바로 읽어 건물을 앉혔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찰을 주변 환경과 어울리게 잘 가꾸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풍수와 연관시켜 해석한다.
해인사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을 많이 갖고 있다.
‘해인사의 풍수’를 두고, 흔히 행주형국行舟形局을 하였다고 한다. 가야산 자락에 묻힌 큰 형국의 품이 그러하고, 해인사 경내를 구성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작은 형국도 그러하다. 풍수지리적으로, 행주형국은 키(舵)·돛대(檣)·닻(碇)·상앗대·선장 등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행주형’이란 물건과 사람을 가득 실어 막 출발하려는 배를 뜻하며, 그 배는 세속에서 벗어나 불국토, 즉 피안의 세계로 떠나는 반야용선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 해인사의 풍수지리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1430m), 두리봉(1133m), 남산(1113m), 단지봉(1028m), 남산제일봉(1010m), 매화산(954m) 등의 연봉과 능선으로 둘러싸인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해인사가 들어선 가야산은 건너 맞은편에 있는 남산에서 바라보면 마치 겹이 여럿인 연꽃봉오리로 보이고, 해인사는 봉오리 속, 즉 꽃심에 앉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야산 정상을 김천 증산면 수도산의 수도암에서 보면 막 피어오르는 한 송이 연꽃봉오리로 보인다. 그 연꽃봉오리 남쪽 기슭에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연꽃은 동남쪽으로 약간 처지며 길쭉한 형상을 하고 있어 행주형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형국은 해인사의 대형국에 속한다.
해인사의 소형국을 보면, 가야산 상봉이 서남으로 뻗어 내려오는 남녘 산 중턱에서 그 능선이 두 맥으로 갈라져, 한 맥은 향로봉을 이루어 동남쪽으로 해인사 입구 길상탑이 있는 곳에 이르렀고, 다른 한 맥은 해인사 서남쪽으로 흘러들어 학사대를 이루면서 그 아래로 일주문 서남쪽 곁에 꼬리를 풀고 있다. 그 가운데로 주산인 우두봉이 서남쪽으로 뻗었는데, 그 봉우리의 남쪽 중턱에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즉, 해인사는 좌청룡격인 향로봉 능선과 우백호격인 학사대의 능선에 에워싸여 자리잡고 있다. 이 소형국 역시 피안의 세계로 떠나가려고 하는 듯한 배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먼저,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해인사의 대형국을 행주형국과 연관시켜 살펴보면, 가야산은 선체, 해인사는 선실, 해인사 뒤 가야산 중턱의 마애석불(보물 제222호)은 선장(도사공), 남산과 매화산의 기암들은 삿대(상앗대), 대장경 판전 뒤쪽의 바위는 돛대가 된다.
대장경 판전 뒤에는 원래 ‘돛대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대적광전 앞 축대 계단공사 때 깨어져 석재로 사용되고 그 밑뿌리만 남아 있었는데, 파괴된 지 60년이 지난 1986년에 돛대바위를 복원하는 뜻으로 이 자리에 일타 스님이 수미정상탑을 세웠다. 바위 뿌리의 흔적은 수미정상탑 기단 윗면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어 남겨 놓았다.
현재의 해인사에 들어선 전각들이 차지하는 터의 크기는 남북으로 약 300m, 동서로 약 150m가 된다. 일주문에서 장경 판전에 이르는 길게 생긴 터인데, 이 곳에 들어선 전각들은 해인사 일주문을 지나 우측에서 좌측으로 조금씩 꺾이는 진입축을 따라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 정중삼층석탑, 대적광전, 판전, 수미정상탑 등이 차례로 들어서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행주형국인 해인사는 그 지형 지세를 잘 이용하여 여러 전각들을 배치하여 가람 전체의 배치 형상이 마치 큰 바다로 향해 배가 떠나려고 하는 소형국을 하고 있다. 그 세부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산과 남산으로 이루어진 대형국은 바다가 되고, 해인사는 선체, 대적광전과 판전 일곽은 선실, 판전 뒤의 수미정상탑은 선장, 구광루는 돛대, 학사대의 전나무와 봉황문 앞의 고사목은 아디채가 된다.
대적광전과 판전 일곽이 선실인 것은 대적광전 앞 축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축대는 그 아래 정중삼층석탑이 위치한 안뜰과 경계를 이루는데, 대적광전과 평행하지 않고 안뜰을 향하여 앞으로 약간 나와 볼록하게 휘어져 있다. 이는 실제로 많은 선실의 외곽 선이 약간 볼록한 모습을 한 것과 통한다.
구광루는 대적광전 앞 안뜰 남쪽 축대를 끼고 자리하고 있는데, 축대 아래의 해탈문 쪽에서는 2층, 축대 위의 정중삼층석탑 쪽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이 구광루는 산문인 일주문과 제일 뒤쪽의 수미정상탑의 중간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인사는 이 건물을 경계로 해서 단 아래와 단 위를 연결하는 진입축이 꺾여 있다. 진입축이 일직선이 아닌 것은 행주형국인 해인사는 정박하여 있는 배가 아니라 피안을 향하여 뱃머리를 틀면서 움직이려고 하는 배임을 의미하고, 구광루는 배가 움직이게 하는 ‘깃폭’의 역할을 한다. 이를 반영하듯 ‘구광루九光樓’ 현판 글씨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즉 ‘구九’자에서 ‘루樓’자로 갈수록 크게 쓰여져 있어 마치 깃폭이 방향을 트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구광루 서쪽으로 있는 적묵당 남쪽의 축대 역시 더 크게 방향을 꺾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준다.
학사대는 해인사 강원이 있는 경학원 서북측 뒤에 위치하고 있다. 학사대는 신라말 한림학사인 최치원이 만년에 독서하며 노닐었다는 곳으로, 이 때 최치원이 손수 심었다는 노거수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고사목은 일주문을 지나 봉황문에 이르는 진입로 가운데 되는 지점에 서 있다. 이 고사목은 애장왕 3년(802)에 순응, 이정 두 스님이 해인사를 개산開山한 기념으로 식수하였다고 한다. 이 나무는 1945년 고사하여 지금은 뼈대만 서 있다. 이 전나무와 고사목은 풍수지리적으로 배의 돛대를 고정시키는 아딧줄(밧줄, 앗줄)을 잡아매는 아디채가 된다.


이 외에도 해인사 경내에 있는 전각들의 배치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내용들이 꽤 있다.
해인사는 사찰 뒤쪽의 주산인 가야산 정상과 앞쪽의 조산朝山인 남산을 축으로 한 좌향을 취하지 않고 약간 돌아앉아 있다. 다시 말하면, 가야산에서 흘러 들어온 해인사의 내맥來脈은 남쪽의 매화산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실제로 해인사는 남산을 바로 보지 않고 거기서 약간 오른쪽을 향한 좌향을 하고 있다.
이는 해인사가 풍수지리적으로 남산 봉우리 형상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화기火氣를 피하기 위해 그러한 좌향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상징적으로 반야용선을 타고 피안으로 떠나려고 하는 배의 형국을 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러한 기법은 풍수지리적으로 해석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또 건축 입지 및 공간적으로 보아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게 가람을 배치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적광전 북쪽 밖 모퉁이 부근에는 두 개의 초석이 있는데, 이 초석은 대적광전이 순조 17년(1817) 대화재를 당하기 이전의 것이라고 하며, 초석의 배열 상태를 근거로 대적광전은 원래 남산을 향하여 앉아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해인사가 화기를 피할 것을 강조하다 보니,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좌향이 아닌 남산을 향한 좌향을 하였다고 가정하였을 때, 이는 해인사의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배치가 된다. 오히려 대적광전 뒤 초석들은 지금의 건물보다 규모가 큰 2층 전각이 서 있었음을 증명케 하는 유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적광전 아래 뜰에 있는 정중삼층석탑은 구광루와 대적광전을 잇는 중심선상에서 동쪽으로 약 6m 비켜 서 있다. 이러한 석탑의 위치는 풍수지리적으로 풀이되고 있다. 탑은 인체의 심장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약간 비켜 서 있다고 하기도 하고, 해인사의 소형국을 이루는 좌청룡, 우백호에서 청룡이 풍수지리적으로 약하다고 해서 이를 비보하기 위하여 왼쪽으로 치우치게 탑을 배치하였다고도 한다. 상징적으로 탑은 배의 중심인 안뜰에 위치하여 배의 요동을 막는 역할을 한다.
원래 석탑 서쪽으로 수각이 있었는데, 해방 후에 이를 메우고 수각을 이전시켰다. 우물은 배의 밑바닥을 훼손하는 것과 같으므로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고 해서 메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해인사 가람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지리적인 내용과 습합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풍수지리적인 내용으로 해석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중삼층석탑 남쪽에 위치한 구광루는 정면 일곱 칸의 누 마루집으로, 원래 동쪽에서 두 번째 칸 아래를 틔워서 통로로 사용한, 일종의 누하樓下 진입방식을 하였다. 누하 진입방식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건물은 음터에 자리를 잡아야 좋기 때문에 해인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도록 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구광루는 대적광전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건물로서, 누 밑을 통하여 단 위를 오르면 정중삼층석탑이 있는 공간이 갑자기 전개되도록 하였다.
범종각 뒤에 위치한 청화당 자리에는 본래 정미소로 사용되던 창고가 있었는데, 해인사의 백호 부분을 비보하고 북풍을 막기 위하여 정미소는 적묵당과 학사대 서쪽 등 바깥 아래로 옮기고, 이 자리에 청화당을 1984년에 새로 지었다.
해인사에서는 매년 단오날 해인사 경역 내 수 곳과 남산(매화산) 꼭대기에 소금을 묻어 화기火氣를 진압하는 행사를 한다. 해인사 경내 수 곳에는 염주석이 설치되어 있어, 단오날 이 염주석에 소금을 담고 물을 부으며, 또 해인사 경내와 남산 꼭대기에는 선원 대중이 소금을 담은 항아리를 묻는다. 매화산이라고도 불리는 남산 정상에 소금을 묻는 것은 매화埋火를 한다는 뜻도 담고 있는데, 이는 해인사가 조선조 후기에 자주 화재가 나므로써 이를 막기 위하여 화산인 남산의 화기를 진압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는 행사이다.(단오날 선방 스님들이 남산에 오르는 행사는 다른 한편으로 볼 때, 결제에 들어가 오랫동안 정진을 하여 쇠약해진 신체를 단련케 하는 방책으로도 볼 수 있다.)이러한 행사는 풍수지리적으로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교사찰이 발생지인 인도 북부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그 지역의 문화, 토속신앙 등과 결합되어 ‘민족화’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해인사도 예외가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인사 가람의 특성을 이루는 경관구조, 진입체계, 배치 및 외부공간, 그리고 구성요소 등은 풍수지리와 연관된 상징체계를 이루는 것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해인사가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개산하였다고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해인사는 창건 당시 수행하기에 좋은 땅을 골라 세웠고, 그 후 그러한 터에 어울리게 가람을 일구어 나갔다고 볼 수 있으며, 풍수지리적인 내용과도 잘 습합해 나갔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해인사의 많은 전각들은 불교 특유의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설들이지만, 이러한 전각들이 풍수지리의 행주형국과 결합된 여러 상징적인 의미체계를 갖게 된 것은 풍수지리적인 상징체계와 건축공간 및 기능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결국 하나의 전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