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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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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법연 1990년 02월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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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처소에 구참 스님네들의 발걸음이 뜸해져 간다는 멀어 어제 오늘에 한하는 말은 아닐 터이나 그 분들에 의해 중노릇을 익혔던 후배 스님들마저 그 분들을 뵙기가 한 해가 다르게 어려워지고 있다 한다. 그만큼 절 집안도 세대교체가 빠르다는 의미로 새겨듣고 말면 그뿐일 터이지만 이십여 년 동안 절 밥을 훔쳐먹은 사람으로서는 외로움이 아닐 수 없겠다. 뿐만 아니라 중노릇에 대하여 별다른 교육이 없는 이즈음의 절 집안사정이고 보면 갓 머리깎은 스님들에게도 여간 큰 애석함이지 싶고. 아무리 자기 공부 스스로 지어 나가야 하고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야 하는 것이 구도자의 본모습이라 할망정 , 중노릇이 어디 벽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며 경전 몇권에 씌여진 것으로 그 내용의 완결성이라 하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십이삼 년 전만 하더라도 해인총림이 절 집안에서는 유일한 총림이던 것이 오늘날에 총림의 수는 늘어났지만 그 규모와 내용 면에서도 절 집안의 양속과 유습은 고사하고 대사회적 불교의 위상마저 예전보다 더 허둥대고 노도와 같은 시대의 도전을 맞이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총림의 상징성이나 의미는 영영 역사의 물굽이로 사라져 갈 것인가. 정작 그 서슬푸른 총림의 청규와, 한 산중의 숲을 더욱 울창케 하시던 큰스님들의 새벽 기침은 어느 승방에서 찾을 것이며 끊이지 않고 산문에 들어서는 어린 행자들의 발길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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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집안에서 중노릇 한답시고 시주밥 십여 년을 넘게 얻어먹은 스님들 치고 과연 중노릇이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며 중이란 또 나와 타인에 있어 무엇인가 하는 회의와 자문을 한두번 안 해본 스님들이 있을까만, 정작 그 이유와 방법에서는 노상 헷갈리게 마련이지 싶다.
물론 갓 머리깎고 처음 법의를 입는 엄숙한 수계식 그날, 팔뚝에 연비 자욱과 함께 신명을 받쳐 지키겠다는 열 가지 사미계와 삼년 후 이백오십 개의 계를 지키는 것으로 중노릇에 모든 의미와 가치를 삼는다면 그야말로 부처님 시대의 중노릇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멀지 않은 우리 윗대 스님들 모두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이 중노릇의 전부이고 또 그렇게 사셨지만) 그러나 과연 지금에 있어 그런 스님이 계실까 싶지도 않을 뿐더러 만약에 계신다면(어쩌면 무간지옥에 갈 소리일는지 모르겠지만) 한두 분으로 족하지 싶다. 최소한 오늘날에 많은 젊은 스님들의 가슴으로 꽃은 날처럼 지나가는 회의와 자문의 성격은 전혀 엉뚱한 데에서 기인할 뿐더러 그 강철 같은 계율의식이 나약해서 도저히 그 계율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해서 생기는 회의와 자문이 아닐 터이기에 더욱 그렇다.
오늘날에 승가의 안팎으로 불어오는 태풍은 어찌하고 그런 형식과 계율의 울타리 속에서 젊은 스님들의 구도의 싹이 커 울창한 숲이기를 바라리오. 두두물물이 불교 아닌 것이 없다고 가르쳤던 불교가 오늘날 불교적 실천과 삶이기를 되물어 오는 이 시대의 역류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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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눈이 내렸다. 가야산 홍류동은 장관일 것이다. 빽빽한 소나무들은 밤마다 온몸을 뒤틀며 터뜨리곤 하던 예의 그 푸른 함성을 잠시 죽이고 온 가지에 무겁게 쌓인 눈의 무게를 가늠하며 더욱 푸르렀으리라. 계곡물이 쩡쩡 얼어붙을수록 더욱 푸르른 함성을 쏟아붓던 소나무들.
며칠 있으면 동안거도 새벽 방선 죽비소리와 함께 끝이다. 그리고 해제. 계곡에 얼어 묶였던 물소리도 조금은 이르지만 조금씩 길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걸망 맨 스님들 또한 어느 곳엔가로 정처없이 떠나리라. 산중에선 느끼지 못한 승복의 불편함을 도처에서 느끼리라. 특히 도시거리에선 참으로 초라해 봐는 승복 입은, 같이 동행한 스님에게서 문득 피로와 겹쳐 달겨들리라.
사람 못 된 게 중 되고 중 못 된 게 부처 된다 한다. 중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