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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라는 시간의 갈피에 무엇을 채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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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담는 오솔길 - 진명 2002년 03월 241호
방송을 하고부터는 출가 후 무심히 지나던 국가 공휴일이나 명절, 그리고 절기의 오고가는 길목의 소식까지 민감해졌다. 하루하루 날씨의 변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까지 세심하고 예민해졌다.
가볍게 지나가는 바람소리며 가늘게 내리는 빗소리도 내 생활 가까이 자리한다.
이렇게 오감을 온전히 열고 세상을 느낄 수 있음은 분명 무량한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음?정월이 되면 무심히 지나간 시간 사이를 뒤적이게 되는데, 오고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린 시간들 앞에서 삶의 중간 점검을 하게 된다. 핑계삼아 지나간 시간의 갈피를 뒤적이다 보면 그 갈피 사이사이에는 사람도 있고 희망과 약속, 회한과 성취 그리고 어제와 오늘이 함께 어우러져 삶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어느 갈피 속에는 작은 계획과 희망이 가득하고, 수행자의 고뇌와 삶의 게으름도 있다.
또 어느 갈피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도 있고, 나 자신과의 단단한 약속과 누군가에게 지키지 못한 약속의 흔적도 남아 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적당한 핑계가 널려 있기 마련인데, 현실적인 핑계로 방송매체를 통해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소임을 수행하느라 시간의 틈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나에게 적당한 핑계일 수 있지만 너무나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고, 그것은 분명 게으르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제 내일로 이어지는 삶의 갈피에는 작지만 성실하게 지나온 흔적과 수행자의 향기로 채우고 싶다.
이런 약속을 오늘이라는 시간의 갈피에 끼우고 삶의 중간 점검을 하는 나를 발견하면서 벌써 내가 여기에 와 있는가?
무심히 잊고 지나온 시간이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구나.
그래도 엇길 걷지 않고 반듯하게 데리고 와 준 데 대한 고마움도 있지만, 너무 빨리 와 버린 데 대한 아쉬움도 없진 않다.
흐르는 세월은 장사도 못 당한다는 표현이 실감이 난다.
요즘 어른 스님들을 찾아 설날(구정)이라고 새해 인사를 드리면서 멀지 않은 나의 미래를 생각해 봤다.
늘 곁에서 모시고 살면서 닮고 싶은 어른 스님도 있고,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삶에 있어 역경계의 좋은 거울이 되는 사람도 있다.
나도 훗날 세월이 가면 누군가가 나를 닮고 싶어하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참 잘 살아야 되겠구나 하면서 혼잣말을 되뇌이곤 한다.
도심에 살면서 스님들과 많은 인연을 지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 같은 문중이나 동문 수학한 선배 또는 후배가 아닐지라도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자들의 고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되면 잎사귀를 다 떨구고 겨울 햇살의 꾸밈마저도 거부한 본연의 모습으로 자리하는 겨울 산에서 느끼는 맑은 충만감이 마음에 가득히 차 오를 때가 있다.
나에게 있어 그런 스님 중의 한 분이 계율을 연구하고자 하는 원력으로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스님이다.
계율정신이 희박해져 가는 복잡한 현대에 무슨 계율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의 윤리와 도덕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이런 시대일수록 계율정신이 살아나서 교단이 청정성을 회복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종교나 수행자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의견에 동감을 하는 입장이라 나는 그 스님을 진정 보배로운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맑은 차 한 잔 사이에 두고 그 스님과 마주 앉으면 자연히 우리 수행자의 정체성에 대한 화제가 중심이 된다.
거창하게 교단을 걱정할 여력과 능력은 없지만 아주 가까이 나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우리 비구니계의 현실적인 문제는 조금씩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초심자들이 모범을 삼을 수 있는 선지식은 무엇이며, 초심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은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 스님들만이 입어야 하는 고유한 법복이 너무 흔해서 승복을 파는 가게에 돈만 들고 가면 사 입을 수 있는 데서 오는 문제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의 고유한 법복을 유행처럼 스스럼없이 입고 다니는 나라가 우리 나라를 제외하고 불교권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데도 거기에 대한 어떤 제지의 기준도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며, 자비와 방관도 구별이 되지 않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어 버리는 우리 교단의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며, 또 수행 중심의 사찰이 아니라 생활 중심으로 흘러가는 사찰의 현주소를 바꾸는 좋은 대안은 없을까 하는 고민들이다.
물론 이런 화제의 내용은 재가 불자의 교육과 수행, 그리고 신앙생활에도 해당이 되는 문제점들이다. 스님이라면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서 부처를 이루고자 큰 서원?품고 출가했을 것이지만 직업란에 승려라고 의심없이 써 버리는 그런 생활인으로 전락해 버린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까. 강원시절 경전과 조사어록을 보면서 말법시대에는 부처님을 팔아먹고 사는 무리들이 많을 것이라는 대목에서 참 이해가 잘 안 되었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것에 익숙해진 지금 나 자신도 그 무리에 속하지는 않았는가 순간순간 성찰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서원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이미 소속되어 버린 제도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탓하기 이전에 나 자신부터 마음의 눈을 지혜롭게 뜨고 성성한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유태인들이 2세들을 교육할 때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아내를 고를 때는 층계를 한 발 내려오고, 친구를 고를 때는 층계를 한 발 오르라.”
나는 이 말을 나에게 이렇게 이해해 본다. 자신을 만들어 가는 눈 높이는 조금 위에 두고 타인을 이해하는 눈 높이는 조금 아래에 두자, 라고 말이다.
타인과 나 사이에는 관용과 이해의 길이 존재하길 바라고, 나와 나 사이에는 약속과 부지런한 채찍이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산과 건널 수 없는 바다를 둘 때도 있고 향기 좋은 차 한 잔이 거리를 좁혀 놓을 때도 있다.
무거운 침묵이 있어 마음이 태산보다 무거울 때도 있지만 가벼운 웃음이 있어 잠시 삶의 고단함을 잊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 내는 조화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자신과 자신 사이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서로 믿어 주는 신뢰가 제일 소중할 것이다.
오늘은 시간의 갈피를 뒤적이면서 수행자인 나 자신이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신뢰를 시간과 시간의 갈피에 채울 수 있길 바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