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오오하손毁吾吾何損이며
예오오하익譽吾吾何益고.
귀와동산하歸臥東山下하니
명월만공정明月滿空庭이라.
나를 헐뜯는다고
내게 무슨 손실이 있으며
나를 칭찬한다고
내게 무슨 보탬이 있는가.
돌아와 동산 아래 누우니
밝은 달이 빈 뜰에 가득하더라.
이 화제를 읽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야! 그 화제는 그림보다 더 좋구나”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뒤에서 어떤 사람이 “선생님! 인사 왔습니다”하면서 인사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홍강弘岡 이봉호李奉昊란 사람으로 그 전시회를 주최한 사람이고 또 환경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홍강과는 그 후 서로 친하게 지내게 되었지만, 첫 눈에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 날 우리는 한참동안 글씨와 그림을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며칠 후 연구실로 전화가 왔길래 받아보니 홍강 이봉호씨 였다. 대뜸 “전시회를 끝내려고 하니 이교수님께서 그 달마상 가져 가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난한 교수가 그런 값진 그림을 살 수 있습니까?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하니 그 다음 말이 또 걸작이었다. “그 그림의 주인은 선생님입니다. 가져 가십시오. 내가 선생님에게 대가를 많이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그림이 뜻도 값어치도 모르는 부잣집 응접실에 걸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표구대만 내시고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친구분들이 오시면 즐겁게 이 그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그 고마운 뜻은 십분 이해가 되나 그래도 백세노인의 그림을 헐값으로 가져오는 것이 나로서는 아무래도 거북스러워 굳이 사양했는데도 홍강의 권유가 또한 그만큼 간절하여 끝내 내가 그의 뜻에 따르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의 화제가 임환경 스님 자신의 오도송悟道頌인지 아니면 옛 선사禪師의 시를 인용한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이 시를 읽으면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는 듯 언제나 마음이 흐뭇하다.
사람들은 제각기 제 생각과 제 몸짓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제 생각 제 행동이란 것이 모두 남의 눈치·남의 평판에 얽매인 생각이요, 행동이다. 이런 차림을 하면 남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이런 행동을 하면 남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남을 의식하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이란 없다. 이런 삶의 방식은 대중의 인기를 노리는 탤런트나 배우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정치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도 전문가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고 들은 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네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이 온통 남의 존재에 얽매여 있다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결국 그 본질이 꼭두각시 인간이란 말이던가?이 허망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제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논어》의 첫머리에 공자의 말씀으로 ‘남이 알아 주지 않더라도 불만스레 여기지 않는다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하는 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제 삶을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의 태도이다. 공자의 말씀에 또 이런 말이 있다. ‘중용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바엔 나는 !
차라리 미치광스러운 사람이나 고집쟁이와 함께 하겠다. 미치광스런 사람은 남의 눈치 안 보고 설치고, 고집쟁이는 남 따라 하지 않고 자기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남의 눈치에 놀아나기만 하고 제 삶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나를 헐뜯는다고 내게 무슨 손실이 있으며 나를 칭찬한다고 내게 무슨 보탬이 있는가? 그렇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죽일 놈 살릴 놈’하고 나를 헐뜯는다 할지라도 내 스스로 양심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저들의 야단법석은 한바탕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온 세상사람들이 ‘나를 위대하다’고 하면서 떠받든다 할지라도 내 적연한 본 바탕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홍강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즐거이 그림과 화제를 신나게 소개한다.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십분 공감을 표명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족足한가?그러나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아련함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과연 그 헐뜯음에 초연할 수 있었던가? 그 칭찬에 우쭐됨이 없었던가? 아는 것과 체현體現과는 거리가 멀다. 논리의 세계·개념의 세?
兀?실재實在의 그림자다. 오늘날 똑똑하다는 지식인들이 이 논리와 개념의 허깨비를 쫓고 이 허깨비에 사로잡혀 일생을 허둥대고 있다.
이 화제의 작자는 이미 동산에 편안히 누워 뜰에 가득한 달빛을 즐기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는가? 달빛 어린 동산은 고사하고 시끄러운 저잣거리에서 개념의 허깨비를 뒤쫓으며 앵무새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내가 동산에 쉴 날은 언제인가? 그리고 모든 지식인들이 동산의 달을 함께 즐길 날은 언제인가? 삼라만상이 이미 본래적으로 동산 위에 평안한데 내 스스로 부질없이 이렇듯 서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