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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동산東山 아래서 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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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완재 2002년 03월 241호
사람들은 제각기 제 생각과 제 몸짓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제 생각 · 제 행동이란 것이 모두 남의 눈치 · 남의 평판에 얽매여 있다.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본질은 꼭두각시라는 말인가.
내 거실 한 모퉁이에 달마상 그림 한 폭이 걸려 있다. 임환경林幻鏡 스님이 96세 때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이 내 거실에 걸리게 된 데에는 아름다운 인연이 있다.
이미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는데 내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당시 대학원장으로 계셨던 모산慕山 심재완沈載完 박사의 전화였다. 퇴근길에 함께 나가서 YMCA 건물에서 전시되고 있는 임환경 스님의 서예전 구경을 하자는 것이었다. 심박사나 나나 서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취미를 가진 터라 기회가 있을 적마다 함께 구경을 잘 다니는 처지였다. 그 날도 쾌히 동행을 했다. 임환경 스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고 또 96세 노령의 작품이라 그런지 글씨가 마음에 썩 드는 것은 아니다. 건성으로 한 바퀴 휙 둘러 보고 지나가는데 문득 한 쪽 귀퉁이에 걸려 있는 달마상 한 폭이 내 시선을 확 끌어 당기는 것이었다. 끌리듯 다가가 쳐다보니 역시 걸작이었다.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의 그림이었다. 붓끝이 빳빳이 중봉中鋒을 이루어 한 곳 멈춤도 주저함도 없이 한 줄기 선線으로 뻗어내려 마무리한 혼연渾然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에는 시 한수가 화제畵題로 적혀 있었다.

훼오오하손毁吾吾何損이며
예오오하익譽吾吾何益고.
귀와동산하歸臥東山下하니
명월만공정明月滿空庭이라.
나를 헐뜯는다고
내게 무슨 손실이 있으며
나를 칭찬한다고
내게 무슨 보탬이 있는가.
돌아와 동산 아래 누우니
밝은 달이 빈 뜰에 가득하더라.

이 화제를 읽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야! 그 화제는 그림보다 더 좋구나”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뒤에서 어떤 사람이 “선생님! 인사 왔습니다”하면서 인사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홍강弘岡 이봉호李奉昊란 사람으로 그 전시회를 주최한 사람이고 또 환경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홍강과는 그 후 서로 친하게 지내게 되었지만, 첫 눈에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 날 우리는 한참동안 글씨와 그림을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며칠 후 연구실로 전화가 왔길래 받아보니 홍강 이봉호씨 였다. 대뜸 “전시회를 끝내려고 하니 이교수님께서 그 달마상 가져 가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난한 교수가 그런 값진 그림을 살 수 있습니까?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하니 그 다음 말이 또 걸작이었다. “그 그림의 주인은 선생님입니다. 가져 가십시오. 내가 선생님에게 대가를 많이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그림이 뜻도 값어치도 모르는 부잣집 응접실에 걸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표구대만 내시고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친구분들이 오시면 즐겁게 이 그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그 고마운 뜻은 십분 이해가 되나 그래도 백세노인의 그림을 헐값으로 가져오는 것이 나로서는 아무래도 거북스러워 굳이 사양했는데도 홍강의 권유가 또한 그만큼 간절하여 끝내 내가 그의 뜻에 따르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의 화제가 임환경 스님 자신의 오도송悟道頌인지 아니면 옛 선사禪師의 시를 인용한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이 시를 읽으면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는 듯 언제나 마음이 흐뭇하다.
사람들은 제각기 제 생각과 제 몸짓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제 생각 제 행동이란 것이 모두 남의 눈치·남의 평판에 얽매인 생각이요, 행동이다. 이런 차림을 하면 남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이런 행동을 하면 남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남을 의식하지 않은 생각이나 행동이란 없다. 이런 삶의 방식은 대중의 인기를 노리는 탤런트나 배우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정치지도자의 일거수 일투족도 전문가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고 들은 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네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이 온통 남의 존재에 얽매여 있다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결국 그 본질이 꼭두각시 인간이란 말이던가?이 허망한 삶에 환멸을 느끼고 제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논어》의 첫머리에 공자의 말씀으로 ‘남이 알아 주지 않더라도 불만스레 여기지 않는다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하는 말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제 삶을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의 태도이다. 공자의 말씀에 또 이런 말이 있다. ‘중용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바엔 나는 !
차라리 미치광스러운 사람이나 고집쟁이와 함께 하겠다. 미치광스런 사람은 남의 눈치 안 보고 설치고, 고집쟁이는 남 따라 하지 않고 자기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남의 눈치에 놀아나기만 하고 제 삶을 잃어 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싫었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나를 헐뜯는다고 내게 무슨 손실이 있으며 나를 칭찬한다고 내게 무슨 보탬이 있는가? 그렇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죽일 놈 살릴 놈’하고 나를 헐뜯는다 할지라도 내 스스로 양심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저들의 야단법석은 한바탕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온 세상사람들이 ‘나를 위대하다’고 하면서 떠받든다 할지라도 내 적연한 본 바탕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홍강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방문하는 친구들에게 즐거이 그림과 화제를 신나게 소개한다.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십분 공감을 표명한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족足한가?그러나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아련함이 자리하고 있다. 내가 과연 그 헐뜯음에 초연할 수 있었던가? 그 칭찬에 우쭐됨이 없었던가? 아는 것과 체현體現과는 거리가 멀다. 논리의 세계·개념의 세?
兀?실재實在의 그림자다. 오늘날 똑똑하다는 지식인들이 이 논리와 개념의 허깨비를 쫓고 이 허깨비에 사로잡혀 일생을 허둥대고 있다.
이 화제의 작자는 이미 동산에 편안히 누워 뜰에 가득한 달빛을 즐기고 있는데 나는 무엇을 하는가? 달빛 어린 동산은 고사하고 시끄러운 저잣거리에서 개념의 허깨비를 뒤쫓으며 앵무새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내가 동산에 쉴 날은 언제인가? 그리고 모든 지식인들이 동산의 달을 함께 즐길 날은 언제인가? 삼라만상이 이미 본래적으로 동산 위에 평안한데 내 스스로 부질없이 이렇듯 서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