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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부원(牧夫苑) 일장(日藏)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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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시명 1990년 02월 96호
물 건너 제주도를 생각하면 우선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제주도는 심정적으로나 지도상으로만 멀 뿐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면 고작 한시간이면 닿는 지척이다. 한달에 한번 편집회의를 위해 해인사를 내려가는 시간에 비하면 지척이란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서울에서 조바심을 치고 탑승한 지 한시간 제주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먼 한라산은 안개구름으로 얼굴을 가리고 남한의 최정상답게 신비를 조장하고 있었다. 가까운 오름들은 마치 신라의 고분처럼 곡선이 평화로왔고 전체 제주도의 인상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었다.
흔히 제주도를 여자 돌, 바람이 많다고 삼다도(三多島)라 했던가. 그러나 여자보다는 관광객이 더 많아 보였다. 형형색색으로 차려 입은 신혼부부들 틈에서 바랑을 맨 내 꼴이라니…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나를 힐긋힐긋 쳐다보곤 하였다.
일장스님이 사시는 표선의 신풍리(新豊里)는 장일남의 가곡 ‘기다리는 마음’으로 더욱 유명한 성산 일출봉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주의 동쪽에 속하는 곳이다.
대뜸 나는 재주의 냄새를 맡기 위해 우선 서귀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의 진면목은 남제주를 가야만 느낄 수 있다. 길기에 피어나는 수선화하며 붉은 동백꽃이랑 한라산 중턱의 노란 귤밭을 보면서 겨울 제주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목부원(牧夫苑), 일장스님이 사시는 집 이름이다. 무슨 짐승을 돌보기에 목부라 했는가. 고려의 저 유명한 목우자(牧牛子)처럼 또 마음 소를 돌보는 초부인가?
스님은 한동안 천성산(千聖山) 내원사 부근의 청류산방(淸流山房)에 머무셨다. 스님네의 삶이 구름처럼 물처럼 청처없다 하여 운수(雲水)라 하듯이 어느날 스님은 정들었던 청류산방을 홀연히 버리고 제주도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먼 빛으로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떠난 제주 생활이 벌써 4년이란다.
“처음에는 제주도를 다니러 왔지. 그냥 살다가 더러 기약없이 어디론지 훌쩍 떠나고 싶은 때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 아닌가. 그런 마음으로 제주에 왔을 뿐 처음부터 제주도에 살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지. 마침 서도의 대가 현중화(玄中和) 선생님이 계시므로 제주에 머물며 글씨를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서귀포의 풍광이 좋아 바다나 실컷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처음에는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다가 다시 육지로 갈 생각이 많았지”

스님의 방안에는 막 피어나고 있는 제주 한란과 중국 춘란의 향기가 코끝에 은근하고 몇 송이 꽂아놓은 수선화꽃이 아기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본래 여기 신풍리 쪽은 황무지나 다름없었지. 버려진 땅이었어. 순전한 돌밭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이었어. 처음 왔을 때는 정이 영 붙지 않았지. 그러나 황혼녘에 먼 한라산을 보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었어. 어린왕자처럼 의자를 옮길 필요도 없이 바라보는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일품이었어.”
스님은 타고난 예술가다. 한라산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황무지에 주저앉은 것을 보면,

“이젠 조금 안정이 되었지만 여기 처음 개간할 때에는 매일 막노동자처럼 일했지. 나무를심고 귤모종을 옮기고 집을 짓고, 그 가운데에서도 전시회 준비와 틈틈이 무슨 불사전(佛事展)이다 무엇이다 하면서 마치 맡겨 놓은 것처럼 그림이나 글씨를 해달라는 사람들의 성화를 감당하느라고 숨쉴 틈조차 없이 바쁜 나날이었지.”
스님은 이미 글씨와 그림으로 교계에서는 퍽 알려진 분이다. 지난 해에는 청소년 수련원을 건립하기 위한 개인전을 서울 백악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열었으며, 그밖의 절집에서 여는 여러 불사전에서 스님의 그림과 글씨를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또한 스님은 경학(經學)에도 밝아, 이미 천성산 시대에 영가선사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번역해 내기도 했으며 나의 스승 경봉노사의 문집 간행에도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 한마디로 못하는 게 없는 멋장이이다.
“어디 내 글씨와 그림이 무슨 서법이나 화법에 맞는 그림인가. 그냥 여유나 심심파적으로 해보는 것이지.”
스님은 이렇게 자기의 그림이나 글씨가 한사(閑事)라고 말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지.


문인화는 본래가 전문 화원(畵員)의 그림이 아니므로 격이 높고 고상하듯이 스님의 그림이 결코 능란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은근히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 칭찬인지 흉보는 일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스님은 오히려 이제까지 살아 온 삶으로 보아서는 선승(禪僧)에 가까운 분이다. 줄곧 대중 선원과 토굴에서 정진해 온 이력으로 보아서는. 그러나 고지식한 선승의 입장은 아니었다. 최근에 와서는 그런 것들도 다 던져버리고 그냥 목부처럼 살고 싶단다. 요즘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느냐고 넌즈시 물었더니 벽을 가르켰다. 벽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앞을 봐도 아득하고
뒤를 봐도 끝이 없다.
목부자는 풀 속에 어디에 세월을 녹이면서
해 뜨면 밭에 나가 호미로 땅을 파고 해 지면 등불 아래 마음 달을 비춰 본다.
어떤 때는 흙 먼지 맨발로 아이들과 뛰어놀고
어떤 때는 술에 취해 홍에 겨워 춤도 춘다.
제 성품에 맞겨놓아 버린 채
빛을 감추고 티끌 세상에 함께 묻혀
오는 인연 맞아주고 가는 인연 놓아둔다.
하늘 위에 뭇별들이 혼없이 널려 있고
땅 위엔 온갖 생명 끝없이 벌려 있어
조금도 벗어나질 않고 낱낱이 제 자리라.
이같이 사람, 소, 날짐승, 기는 벌레
위 아래가 동락(同樂)하고
거센 바람 순한 비 가고오며 함께 사니
겁전삼매(劫前三味)의 남이 없는 곡조요
대방화엄(大方華嚴)의 멸하지 않는 설법이라.
어떤 말인들 범음(梵音)이 아니며
어떤 곳인들 난야(蘭若)가 아니겠는가.
옛사람 이르기를,
“뚜렷이 밝은 근원 태허공과 같아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이 없다” 하였는데,
아, 오늘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구나.
얼굴 아는 사람이야 많지만
회포를 함께 할 자 드므니
소리 앞의 마음 말을 누구와 함께 나눌꼬.

此處也, 前望無際而 後仰無極
牧夫子 草裡橫身消鷹歲月
日出將田 鋤頭握地 日入挑燈心月相照
有時灰頭跣足 與童蒙同 
有時醉酒野無發呵呵之聲
放 任逍和光同塵 有綠則應 無綠則任己矣
上天星羅 下天百物 頭頭本處 物物非改
如是人畜飛禽 上下同樂
順風逆雨逝往共淞 常演劫前三味
廣說大方華嚴 何言非梵 何處非若
所以 古云 圖同太虛 無欠無餘
嗚呼 然而 今日四顧無人
識面者 多而 同懷者稀
聲前 語共與誰

스님의 일상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글이다. 자유분방하여 호탕한 듯하면서도 밤톨같이 충실한 삶이 확연히 드러나는 글이다.
최근에는 작은 정자를 달아내고 연못을 만드는 일을 마무리하느라고 몇몇일 사람꼴이 아니었다고 술회하면서 웃는 얼굴에서 아직도 천진이 남아 있었다.
스님은 동산스님을 은사로 하여 열서덧의 어린 나이로 범어사에 출가하였다. 그러니까 동산스님의 가장 막내쯤 되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만년의 상좌였음에 틀림없다.

왜 갑자기 그 좋은 좋던 청류산방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이곳 물설고 낯선 땅으로 와서살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몇십년 절집에 와서 살면서 묵었던 인연을 한번쯤 털어버리고 싶었고, 그동안의 삶도 정리할 겸 그리고 좀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 승려가 마땅히 대중처소에 살고 제도 올리고 목탁도 치고 하여야겠지만 거기에는 거기에 따른 폐단이 또 있기
마련이지. 특히 타성적으로 수행자는 신도의 시주에 의해서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의존적인 삶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고나 할까 그래서 농사를 직접 지어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지. 내 팔다리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그리고 수확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생산한 것으로 청소년을 위한 심신 수련장 같은 것을 만들고 싶고, 만약 여력이 있다면, 이웃과 나누고 싶은 생각으로 이곳에서 살지”
천여평이 넘는 농장에는 갖가지의 감귤 모종이 심겨 있고 비닐히우스에는 한참 잘 익은 ‘긴깡’이라고 부르는 작은 종자의 감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는 너무나 감귤 값이 홀해서 그전에 흔히 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르던 때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몇년 전만 해도 귤나무가 흔하지 않아서 한해 농사를 잘 지으면 나무 몇 그루만 재배하고도 자식을 대학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농민들의 삶은 점차 고달파졌고, 올해에는 밀감 따는 인부 품갔도 나오지를 않다 보니 밀감나무를 베어내는 사태마저 있어 팩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때로 제주도에 살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느냐는 말에, 스님은 “제주도는 국내에서도 유수한 관광지역서 우선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오는 사람은 모처럼 찾은 제주도이지만 여기에 사는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아. 처음에는 공항에도 나가고 필요하다면 안내를 해주기도 했지만, 찾아오는 사람마다 그렇게 해주었다가는, 내 생활이 말이 아니게 깨어져 버리고 말지.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섭섭하게 해서 돌려보내는 경우가 있고, 가끔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쓸 때에는 참으로 곤란하지. 또 한 가지는 제주도가 섬이라서 그런지 육지에서 온 사람을 잘 신뢰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팩 어려웠다”고 이야기하였다.

필자가 더 이야기를 하려 하자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스님의 말이다.
마침 해질녘이니, 어디 성산 일출봉을 가든지 밖으로 나가 해지는 한라산을 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나서다 보니, 스님의 방 이름이 수선화실(水仙花室)이다. 추사 선생이 그 예전에 이곳에 귀양 와서 방에 걸었던 편액을 어디서 구해 와서 걸어두었다고 했다. 얼핏 보기에도 맑고 그윽한 향기를 지닌 수선화 같은 삶을 희원했을 추사의 정신이 그 글씨 속에 나타나 있었다. 일장스님도 그런 삶을 원하기에 그 글씨를 벽에 걸어 두었으리라.
찬바람에 의지의 날개를 펼치는 고결한 수선화 같은 삶이 그 속에 있기를 기원하며 뜨락에 나서니 해는 막 한라산을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