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목줄을 묶다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유마의 방 - 이현주
1993년 03월 133호
‘바우’는 우리 집 개 이름입니다. 진도개 혈통을 받은 수컷인데 우리 집으로 온 이튿날 뒷산에 갔다가벌 에 쏘였는지 눈두덩이 퉁퉁 부어가지고는 미동도 않고 봉당에 앉아 있는 모양을 보고, 제 아내가 놀라며 “어머나, 얘좀봐. 바위 같애!”하는 바람에 이름이 바우가되었지요. 우리 집에는 서양개 혈통을 받은 개도 한마리 있는데 검은 털로 싸인 온몸에 반달 같은 흰점이 있어서 이름이 ‘반달이’ 랍니다. 그런데 그 반달이도 강아지 적에 벌한테 발바닥을 쏘인 적이 있는데 얼마나 엄살을 떨며 밤새도록 앓는 소리를 하던지요 그러니까 조선 토종을 대표하는 바우의 의젓한 모습이 더욱 돋보이더군요. 몇 방이나 쏘였는지 눈두덩이 부어올라 완전히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부어오를 때가 있으면 가라앉을 때도 있으렸다 하고 태연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놈 바우 때문에 잠깐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었지요. 그 얘길 좀 해보겠습니다. 뭐 굉장한 얘기는 아닙니디만, 이제 입춘도 지나 천천히 봄맞이 채비를 해야 할 때가 된지라 장에 가서 개 목줄을 사왔거든요. 얼마 안 있어 농부들이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릴 터인데, 시방처럼 바우하고 반달이가 운동장 삼아 쏘다니며 논밭을 짓밟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대문 밖 논밭으로 뒷산으로 온통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공간속의 자유’를 만끽하던 놈들의 모가지를 옭아 묶어 놓을 생각하니 여간 마음이 찝찝한 게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니 어쩝니까? 겨울이 영원히 계속되어 논밭이 두 번 다시 논밭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은 바에야 달리 무슨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목줄을 매지 않고도 개를 기르는 방법은 몇 가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 농토를 모두 사서 우리 집 개가 짓밟아도 괜찮을 마당으로 만든다든지. 아니면 깊은 산 속으로 이사를 간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우리를 좀 크게 만들어 그 속에 가둔다든지 ...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지금
우리 집 형편에 그냥 생각만 해볼 수 있는 것일 뿐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장에서 목줄을 사온 이튿날, 무슨 좋은 수라도 생기는 줄 알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놈을 움켜잡고 모가지를 옭아 매자, 바우란 놈은 그만 미치는 거 있지요
벌에 그토록 쏘이고도 신음 한 번 하지 않던 놈이 깽깽거리면서 쇠줄을 마구 물어뜯고 목이 빠져라 꽁무니를 빼며 줄다리기를 하는가 하면 원망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헐떡거리는 겁니다. 마음이 아프더군요. 순간, 저렇게 하면서까지 개를 길러야 하는가, 뉘우침이라 할까 미안함이라 할까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감상에 사로잡혔지요.
한동안 미친 듯이 날뛰던 바우는 그 완강한 쇠사슬이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이번에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턱을 땅바닥에 댄 채 체념의 눈을 감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까이 가서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꼬리만 마지 못해 서너 번 흔들 뿐 움직이려 하지 않더군요. 그날 바우는 음식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 말았습니다. 반달이도 비슷했습니다만 바우보다는 정도가 덜했지요. 놈의 유전자속에 ‘사슬’에 대한 경험이 바우 보다 더 짙게 새겨져 있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부터 반달이는 바우보다 사슬에 더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는 이야기올시다. 아무튼, 그날 처음으로 사슬에 매여 ‘자유’를 빼앗긴 아픔을 흘로 삭이고 있는 바우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얘길 들려주었습니다.
“바우야, 내가 원망스럽지? 그래서 밥도 먹지 않고 뭐냐, 단식 투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아서라, 너는 모르겠지만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다. 너를 이대로 풀어 놓으면 내가 너를 계속 기를 수가 없어. 너는 사람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바 없으니, 지금 하는 대로 마을의 논밭을 마냥 짓밟고 쏘다닐 텐데 그러면 이웃사람들이 그냥 두고 보기만 하겠니? 어림도 없지. 단번에 개를 없애든지 묶어 놓든지 하라고 요구할거야 그러면 너를 없앨 수 없으니 결국 묶어 놓아야할 텐데 그렇다면 아직 뼈가 덜 굳었을 때에, 그러니까 아직 어른 이 되지 않았을 때에, 묶이는 게 더 낫다 이거다. 알아듣겠니?’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물론, 네가 내 마음을 죄다 알아서 들어갈 곳과 들어가면 안 될 곳을 스스로 가려서 사람처럼 처신할 수만 있다면 내가 널 이렇게 묶어 놓을 까닭이 없지. 네가 길과 논밭을 구분해서 항상 길로만 다닌다면, 그런다면 내가 미쳤다고 너를 묶겠니? 나에게 개를 훈련시켜서 갈 곳과 가면 안 될 곳을 스스로 가릴 수 있도록 해 줄 만한 능력이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기술이 없구나.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이 사슬을 감수하거라. 다시 겨울이 되면 풀어 주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개한테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내 귀에 들린 음성은 이런 것이었어요.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만일 내 뜻을 빨리 알아 무명(無明)의 그늘을 벗어버린다면 무슨 계율이 필요하며 무슨 가르침이 더 있겠느냐?”
순간, 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요. 바우와 제가 과연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똑같다는 사실 앞에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이 태산같은 업장(業障)에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나의 인생을 보살피는 자비의 손길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입니다.
문화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돼지고기를 혐오하는 까닭을 설명하면서 야훼와 알라가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말라”고 금기한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이 돼지 사육에 적절하지 못한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요컨대 돼지를 사육하는 것이 중동지방에서는 너무나도 비싼 경비가 들고 따라서 일부 특권층의 사치스런 입맛을 조장할 뿐, 자연 환경과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종교의 금기taboo라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처한 환경에서 가장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지요.
종교의 가르침이라는게 계(械)와 율(律)로써 출발한다는 것은 상식 아닙니까? 서울을 가고자 한다면, 서울 가는 길로 들어서야겠지요. ‘길’이란 무엇입니까? 길 아닌 곳으로는 들어서지 말라는 계(械) 아닐까요. 나는 그렇케 생각합니다. 바우의 목을 옭아매고 있는 사슬처럼 그것은 오늘도 나를 살게 하려고 내 몸을 묶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짓은 하지 말아라, 거기는 발을 들여 놓지 말아라.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하여라. 한눈 팔지 말고 이 길로 정진하여라. 여기가 사는 길이다. 종교는 이렇게 친절한 계(戒)와 명(命)으로 우리 인간을 저 건너 지혜의 언덕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울 가는 길이 곧 서울은 아니지요. 계가 곧 구원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종교의 금기란 깨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 아닙니까? 알 껍질이 언제고 깨어지기 위해서 있듯이 말입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한발 두발 길을 밟고 밟으면서 동시에 버리는 것이지요.
나는 어머니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 길을 계속 걸어서 지금 ‘목사’까지 되었습니다만 이제 나의 목표가 ‘기독교인’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걸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나를 기독교인되게 한 목적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를 벗어버리고, 예수님 말씀대로 ‘진리로 말미암은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나는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었노라 자처할 수 있겠지요. 바우가 나의 뜻을 제대로 알아 더 이상 목줄이 소용없는 경지에 이를 수는 없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덕택으로 나에게는 그 눈부신 ‘깨달음’에 스스로 도달할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으매 과연 눈 먼 거북이가 나무토막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하겠거니와 어찌 한순간인들 정진의 고삐를 늦출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늦게나마 석문(釋門)의 향(香)에 접할 기회까지 간혹 얻게 되니 다만, 은혜에 황송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