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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스님 영전에 바치는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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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스님 추모 - 도각 2002년 02월 240호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스님께서 아주 평온한 얼굴로 열반하셨다는 시자스님의 전화를 받는 순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알지 못할 막막함뿐이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멀리 남쪽의 가야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데 마침 하늘은 하얀 서설로 가득했습니다. 하늘 가득 무한대로 하강하며 춤추는 눈 사위, 바람 부는 대로 분분한 피동의 눈보라는 심한 혼돈이기조차 했습니다.
원당암에 도착하여 아무도 없는 스님의 텅 빈 방에 모셔진 영전에 분향하고 살아 있는 듯한 스님의 영정사진을 뵈오니 몰란결에 눈물 한 방울 흘러내렸습니다. 이것으로 스님과 함께 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모두 다한 마지막이지 싶습니다.
1979년 봄 스님을 은사로 정하고 중노릇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 올해로 23년이 됩니다.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어쩌면 내 생애의 모든 것이 이 세월의 무게에 녹아 있다 하겠습니다. 남은 나의 생애 또한 이 시절을 비껴갈 수는 없겠지요. 그 때 스님께서는 지리산 상무주암의 독거 수행을 마치고 해인사 해행당에서 막 3년 결사를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해인사 행자시절이 고달프다고는 하지만, 그 시기 스님에게서 배운 중노릇하는 기본자세는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세속의 습관이 많이 남아 있는 저에게 일거수 일투족 하나 하나 사문의 위의와 법도를 가르치는 스님의 말씀들은 참아 내기 힘든 어려운 관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쟁쟁하게 귓가에 남아 있는 말씀은 ‘이런 깜깜한 놈’이라는 질책이었습니다. 천방지축 행동하는 내 모습이 답답하여 하시는 말씀이었겠지요. ‘상좌 하나에 지옥이 둘’이라는 말씀도 자주 하셨지요. 상좌 가르치기가 힘들다는 말씀이기도 하겠지만, 상좌가 중노릇 잘못하면 은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문의 위의를 배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힘든 것은 스님께서는 도통 잠을 주무시지 않는다는 것과 하루 한끼의 공양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스님께서는 출가 이후부터 줄곧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일일일식一日一食의 두타행을 실천해 오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 두타행의 방편들이며 대도의 성취를 위해 매력적으로 해 볼 만한 수행법이기는 했지만, 저에게는 이러한 수행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더구나 스님께서는 강원의 공부보다 참선 수행이 무엇보다 최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참선하지 않는 상좌는 상좌로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시어 저는 그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한번은 삭발을 하고 거울을 찬찬히 들여보고 있는데 스님께서 저에게 다가 오시더니 거울을 홱 빼앗으면서 ‘중이 무슨 거울이 필요하나. 거울을 자주 보면 아상만 높아진다. 중은 바보 병신 같아서 사람들이 무시하고 외면할 정도라야 중노릇 잘하고 공부도 잘되는 법이다’ 하셨지요. 그 때는 그것이 서운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노사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의 말씀이었음?
?절감하게 됩니다. 옛 사람들이 ‘무감어수無鑒於水하고 감어인鑒於人하라 (물에 얼굴을 비춰 보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춰 보라)’ 하여 표면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했듯이 스님께서는 거울 보는 것 하나까지 공부에 연결시켜 상좌를 교육하고자 했었지요. 그렇게 스님께 입실을 하고 여러 달 동안 반듯한 중노릇하는 기본 위의를 착실하게 배우긴 했지만, 스님은 끝내 희로애락의 감정은 눈꼽만치
도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보이기만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 스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한 번은 스님 곁에서 같이 장좌불와한다고 좌선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지요. 그런데 새벽에 깨어보니 스님께서는 작은 담요를 저에게 덮어 주셨더군요. 그 때 참 부끄러움과 함께 어떤 알지 못할 따스함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스님의 시봉을 끝내고 강원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였더니, 스님께서는 어디를 가든지 대중에 머물라 하시고 매사에 조백白(잘잘못)을 가릴 줄 알고, 중노릇하는데 부끄러워할 줄 알면 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후 강원으로 제방선원으로 마침내는 서울의 승가대학에까지 떠돌면서 이십 수년을 중노릇한답시고 헤매고 다녔지만, 그 때 스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슴 가득 간직하고 실천해 보지 못한 부끄러움이 오늘 더욱 가슴에 사무쳐 옵니다. 어쩌면 스님에게서 나는 미운 털이 박힌 상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민주화 바람이 한 시대를 휩쓸던 시절 그 격정의 회오리에 휩싸여 정신 없이 내달리던 나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연민으로 걱정도 하셨지만, 나중에 구제불능이라 판단하셨는지 관심조차 두시지 않으셨지요. 그렇게 매서운 스님이셨지만, 스님께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저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94년 봄 종단개혁의 불사가 한참 타오르던 때 저는 불섶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개혁의 선두에서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거의 사경을 헤매는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온몸이 망가지는 부상을 입고 겨우 산소 호흡기에 연명을 하고 있는 저에게 생각지도 않게 스님께서는 노구를 이끌고 친히 찾아 주셨지요. 그 때 병실에 들어오셔서 저의 모습을 잠시 보시고 스님은 고개를 돌리셨지요. 저는 목소리를 낼 수도 없는 지경이었지만, 참 많이 죄송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한없이 울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의 그 호수같이 가라앉은 눈빛에 잠시 눈물 방울이 맺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스님은 한참 동안 창 밖을 보시다가 ‘남 원망하지 마라. 모두 이게 너의 업보다.’하시며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어쩌면 스님의 백 마디 위로의 말씀보다 스님의 눈에 맺힌 눈물 방울이 저에게는 더 큰 위로였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면 저는 눈물이 나서 가슴이 아파집니다. 그렇게 냉정하고 단호하신 스님께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스님의 가슴은 늘 중생!
을 연민하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는 그 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스님께서 수렁과 같은 종단 일에 나서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면 저는 또다시 스님께 불효하는 못난 상좌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스님께서는 저에게 연민 많은 아버지와 엄한 스승으로서의 가르침을 무던히도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스승으로서의 스님의 모습을 스님께서 아니 계신 허전함 속에서 깨닫는 저는 참으로 아직도 깜깜한 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팔십 노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는 의자에 몸을 묶고 용맹정진하시는 은사를 모시는 상좌로서 지금 사는 저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노사께서 좌복 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정진을 하고 있을 때 저는 저잣거리에서 어둡고 음습함을 탐내고 다니는 어리석은 중생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중생과 같이 한다는 성글고 헤픈 논리로 세속의 달콤함에 더 물들어 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을 스님께서 열반을 나투시는 마당에 소스라쳐 깨닫게 되는 것은 스님께서 주신 마지막 지고한 가르침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실천하신 죽음을 뛰어넘는 고행정진의 길은 이제 남은 제자들의 몫일 것입니다. 저희가 유혹에 흔들릴 때에는 굳건한 당간의 철주가 되어 주시고, 눈이 흐려졌을 때는 맑은 거울로 저희를 비춰 주시어 바른길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