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부처님은 구살라(狗薩羅)국에서 사라바제(娑羅婆提) 바라문의 마을의 북쪽에 있는 시사바 숲 속에서 머무셨다. 때에 노차(露遮)라는 바라문이 있어 파사닉왕에게 봉(封)함을 받고 칠대(七大)로 내려 오면서 남에 업신여김이나 비방을 받지 않고 이전(異典)의 삼부(三部)를 외워 통달하고 대인의 상법 길흉을 점치는 것과 제사 의례에 능하였다.
그는 사문 고오타마 석종자(釋種子)가 집을 나와 도를 이룬 뒤 이 시사바 숲 속에 계시는데 이름은 여래 지진, 등정각의 십호를 구족하였으며 모든 하늘, 세상, 사람, 악마, 혹은 악마의 하늘, 사문, 바라문의 무리 가운데서 자신이 증명을 얻고 남을 위해 설법하시는데 그 말은 상·중·하가 다 착하여 의미를 구족하고 범행이 청정하다고 들었다.
이러한 참 사람은 마땅히 가서 뵈어야 한다. 나도 가서 뵈올까하고 세존께 나아가 인사를드린 뒤 부처님의 설법으로 가르침을 받아 기쁘고 이로움을 얻고 떠나기 전에 부처님과 모든 대중에 공양청을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잠자코 그 청을 받아 주셨다.
그러나 노차 바라문은 부처님에게서 떠난지 오래지 않아 곧 나쁜 생각을 내었다. “모든 사문·바라문은 착한 법을 많이 알고 깨치어 이룬 바가 많다. 그러나 남을 위하여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스스로만 알고 남을 위하여 설명하지 않는다면 비유하면 어떤 사람의 낡은 감옥을 부숴버리고 새 감옥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때가 되어 부처님을 청하였고 그 때에 부처님은 바라문의 집에 가시어 자리에 앉아 맛난 음식을 이바지함을 받으시고 공양이 끝나자 부처님은 노차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스승이 있다. 그것으로써 스스로의 경계를 삼아라.
첫째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삼 법의를 입고 출가하여 현재에 번뇌를 없애고 나아가 상인(上人)의 법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번뇌를 없애지 못하고 상인의 법도 얻지 못하고서 제자를 위하여 설법한다면 모든 제자들은 공경하거나 섬기거나 공양하지 않고 다만 함께 의지하여 같이 거처할 뿐이다.
노차여, 이런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묵은 감옥을 부숴버리고 다시 새 감옥을 짓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제일의 스승이라 한다. 이것으로써 스스로의 경계를 삼아라. 이것을 현성의 계·율계(律戒)·의계(儀戒)·시계(時戒)라 한다.
둘째는 지금 현재에 있어서 번뇌를 없애지 못하고 다소상인의 법을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이익을 이루지 못했으면서 제자를 위하여 설법한다면 제자들이 공경하고 섬기고 공양하지 않고 다만 그저 서로 의지하여 함께 거처할 뿐이다.
노차여, 이런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남의 뒤를 따라가면서 손으로 그 등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제이의 스승이라 한다. 이로써 스스로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이것이 현성계·율계·의계·시계라 한다.
셋째, 이제 현재에 있어서 번뇌를 제하지 못하고 다소 상인의 법을 얻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이익을 이루지 못했으면서 제자를 위하여 설법한다면 제자들이 공경하고 섬기며 함께 머물러 살아 간다.
노차여, 이런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벼 농사는 내버리고 남의 밭농사를 김매는 것과 같다. 이것을 스스로의 경계로 삼아라. 이것을 현성계·율계·의계·시계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노차여, 한 세존이라도 세상에 계시지 않으면 숭배하고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세존은 삼명을 얻어 무명을 없애고 지혜의 밝음을 내어 모든 어둠을 보내며 큰 법의 광명을 내어 누진지(漏盡智)를 증하신다. 그것은 정근하고 전념하여 잊지 않으며 홀로를 즐기고 한가히 삶을 말미암아 얻는 것이다.
“믿음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스러움에 대한 것이요, 그 성스러움은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이며, 성스러움은 인간의 지혜로는 잴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어둠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설명하는 그 자체가 빛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에 대한 비판은 인식론적인 관점으로서의 비판적 믿음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다원화라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믿음은 즉각 종교화되고 그에 의하여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상황 하에서는 종교인은 자신들이 창출한 이론이 사회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생활이 인간의 심리과정에 파고들어 비판적으로 분석되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 것이 신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증득한 것이라며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남에게 비판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모든 번뇌를 없애지 못하고 상인의 법을 얻었으나 자신의 이익을 이루지 못한 이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설법이므로 탐탁한 악법이라 규정하셨습니다.
때로 종교의 내용과 사회의 내용이 서로 맞지 않는 측면이 있어서 현대에는 해방과 자유의 원천으로의 능력을 상실하고 억압과 굴종의 수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 보인 것이 제일의 스승에 대한 경고인 듯합니다.
지금까지 믿음을 지탱해온 두려움을 주는 것은 벽이고 우리는 이 벽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비판에 의하여 신에로의 환원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시도로 인식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조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넘을 수 없는 벽은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관념의 벽은 상인의 법을 증득함으로 무너지게 되고 지금까지 미래를 볼 수 없었던 어둠은 마음의 빛에 의해 이미 밝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벽은 밖을 볼수 없다는 것, 깜깜하다는 것,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벽이 없는 둑 트인 벌판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밝은 낮에는 누구다 느긋한 상황을 즐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남의 뒤나 따라다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의식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가 이원화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지평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식과 존재의 분리 속에서 종교인은 학문적인 입장으로서의 믿음에 대한 비판만을 관계해 왔지만 인간 스스로의 근본 문제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삶의 갖가지 문제에 관련지워 밝혀가는 것이야말로 매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그 세번째의 비유인,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벼 농사를 내버리고 남의 밭 농사를 김매는 것과 같다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이며 직면한 전 인류의 과제에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종류를 모두 부정하시고 정근하고 전념하여 잊지 않으며 사문의 과(須陀洹·斯陀含·阿那含·阿羅漢)를 얻는 사람이 있어 법을 들으면 마땅히 이 네 가지 과를 각각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삶에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과제인 믿음을 실천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노차경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의 생활을 끊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착하지 않는 법이라고 반복하고 계십니다.
믿음은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향하도록 열어 주며 생명으로 충만된 삶을 조직하고 관념의 벽을 없애는 길이라는 것을 노차경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