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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서 있는 그 가눌 길 없는 적막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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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스님 추모 - 여연 2002년 02월 240호
엄동설한 정말 살끝이 아리는 깊은 계절에 큰스님 원적圓寂의 소식을 접하고 가슴을 에는 슬픔은 뼈속의 추위가 아니라 막막한 세상의 한가운데 문득 홀로 서 있는 그 가눌 길 없는 적막 그 자체입니다.
제 생의 긴 강물로 굽이치는 어귀에 한 줌 물거품으로 맴돌아 흐를 길 없이 서성이는 찢긴 나뭇잎 그 속살의 아픔으로 옵니다.
생이 아무리 한 조각 흐르는 무지개빛 구름으로 왔다가 문득 산골짜기에 한 가닥 연기처럼 피어올라 아무도 보이지 않는 저 골짜기로 스러진다고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염불을 외우지만 그렇게 한 구절의 게송으로 위안받기에는 저희들의 지금 심정은 너무도 막막한 혼돈입니다.

지금도 큰스님이 거두어 주신 업보 많은 제자들은 스님 시적示寂의 법구 앞에 모여 금강경을 독송하고 또 독송하고 있습니다. 금강경 4구게(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를 헤아리고 또 헤아려도 도무지 인생은 한낱 꿈과 같고 한방울 물거품과 같고 여름날 골짜기에 순식간에 때리는 벼락빛과 같고 아침 여린 풀잎에 맺히는 이슬과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관하여 살라는 위대한 진리가 관념의 물살로 허우적댈 뿐 큰스님의 열반과는 너무도 먼 하늘나라의 말로만 메아리쳐 올 뿐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날 헤매고 떠돌던 방랑의 그림자를 접고 생의 회한을 삼키며 산문을 두들겨 스님과 맺은 불연佛緣이 훌쩍 30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헤아려 보면 스님께 입은 은혜는 수미산보다 높고 깊은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떠밀리는 존재의 미망이 엉킨 제 가난한 영혼의 그릇에 우담바라의 풍성한 향기를 담아 주셨던 생의 노정기(화두)는 어느 땅 어느 하늘 아래에서도 저의 존재를 당당하게 해 주었던 기둥이었습니다.
남해섬 용문사 염불암에서 사미계를 받고 스님을 따라 해인사 총림 숲에 발을 내딛은 때가 71년 이른 봄이었지요.

스님께서 극락전에 철조망을 치고 3년 결사에 들어가시고 저는 그 곳에서 강당에 입문하여 하루 한끼니 큰절에서 밥을 타 나르며 시봉하는 일로 승려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산문에 들어와 처음으로 귀뺨을 얻어맞고 어둠이 내리던 뒷산에 올라가 새싹 풀잎 여린 순에 눈물을 떨구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강당에서 봄 개강하고 얼마 안 있어 진대밭골로 소풍을 간다기에 따라 갔다가 머루주 담은 찻잔을 얻어 마셨는데 그만 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온종일 깨지 않고 빙빙 대었습니다.
돌아와 저녁 때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데 스님이 불러 나갔더니 왜 얼굴이 그렇게 발갛냐고 물으시길레 그냥 얼떨결에 불기운이 더워서 그렇다고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느닷없이 귀뺨을 갈기셨습니다. 입에서는 술냄새가 펄펄 나는데 이 부처님 제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지요.
3년 결사를 마치시고 잠시 태백산 동암에 가 계실 때 철없는 생각으로 진각의 이름이 맘에 들지 않아 여연으로 고쳤었습니다. 스님께서 다시 해
인사로 돌아오시어 진각을 찾는데 강당의 학인이 스님 상좌 중에 진각은 없고 여연만 있다는 얘기에 ‘여연이라는 상좌는 없는데 어떤 놈이 내 이름을 팔고 다닐까’ 하며 ‘그 놈 데려 오라’는 말씀에 제가 갔더니 ‘진각이가 여연이가 되었다’고 또 한 번 꾸지람을 듣던 추억은 지금은 달콤하기까지 합니다.
은사 스님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진검眞劍을 제게 주어 삼십년 세월을 헤매면서도 이렇게 산문 안에서 버티게 했던 것은 지리산 상무주에서 삼동결제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당당하게 제방선원의 입승으로 죽비를 잡고 있는 정견 스님과 함께 삼칠일 단식용맹정진을 했었지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는 그 긴 죽음의 터널을 지날 때 정말 그 때는 상무주 골짜기에 스님을 떠밀어 버리고 싶었던 심정이었습니다. 스리랑카 인도에서 그 모진 더위와 잠에 시달릴 때에도 상무주의 삼동결제의 인욕으로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었지요. 스님께서는 삶에서 밥 먹는 일과 자는 일을 극복하면 그것이 본분사의 반은 해결된다 말씀하셨지요.
마지막 남긴 스님의 열반송을 되뇌어 봅니다.

아신본비유我身本非有 심역무소주心亦無所住
철우함월주鐵牛含月走 석사대효후石獅大哮吼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저희들도 그 길을 따라 다시 저 구품연화대, 깊은 연꽃 향기 속에 계시는 스님의 환한 법안法眼을 뵙고 삼배를 드리도록 뼈를 깎고 살을 에는 화두 참구하겠습니다.
은사 스님 그 때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