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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신화로 남은 큰스님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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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스님 추모 - 이상균 2002년 02월 240호
“부장님, 원고 송고했습니다. 사리는 총 86과가 출현했구요. 우리 나라에선 맨 처음으로 황금 법사리가 출현했답니다. 오늘 올라가겠습니다.” 잔뜩 먹구름을 먹고 하루종일 눈을 쏟아내는 하늘을 쳐다보며 김 기자는 전화를 접었다. 8일간의 긴 취재가 끝난 것이다. 몸이 풀을 먹은 것처럼 축축해졌다. 담배를 찾던 손이 슬그머니 펴진다. ‘아차 아직 이 곳은 해인사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 갔기때문이다.
총 86과의 오색 영롱한 사리를 수습한 원당암 미소굴은 새벽부터 쏟아진 눈을 뒤집어쓴 채 깊은 적막에 빠져 있었다. 가까이 바라다보이는 해인사 큰절에 불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저만치서 몰려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줄을 잇던 참배객들의 발길도 어느새 뚝 끊어져 있었다. 큰일을 치른 가야산이 피곤한 듯 일찍 어둠을 끌어당기는 독경을 시작하고 있었다.
원당암 미소굴 앞 나무계단에 앉아 점점 폭설로 변해가는 눈을 보며 김 기자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큰스님이 살아 생전 눈을 제일 좋아했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뼈를 습골해 미소굴로 운구해 오던 아침이었다. 스님의 사리수습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단들이 북적거리며 미소굴까지 몰려들었다. 제자들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미소굴 문을 굳게 닫자 할 일이 없어진 기자들은 점점 굵어지는 눈발에 “웬 눈이 이렇게 온담” 하며 애꿎은 화풀이를 했다.
“이것도 다 큰스님 법력이여. 도력이 높은 것을 그대로 증명하는 거여. 큰스님이 살아 생전에 제일 좋아했던 것이 바로 눈이여. 사박거리며 눈이 오면 스님은 해가 뜰 때 까지 밖으로 안 나갔어. 단지 문만 열고 눈을 바라보며 웃기만 했지. 궁금해진 제자들이 물었어. 뭐라 그랬는지 아시오. ‘눈도 생명이여. 아름답기 그지없고 순수하기 그지없고 그래서 빨리 없어지지. 나는 그런 눈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어. 그래서 안 나가는 거여.’”며칠째 원당암에 마련된 분향소에 머물며 “성관당 혜암 대종사는 나하고 인연이 깊은 스님이야. 내가 제일 존경하는 큰스님이야. 도력이 높은 도인 스님이 가셨어.” 하며 스님 생전이야기를 즐겨하던 노비구니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말을 흘려듣던 김 기자의 머리에 갑자기 전율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1월 6일 영결식에 이어 다비식이 열리던 날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던 것과는 다르게 하늘은 벽공처럼 깊고 맑았다. 그 하늘을 보고 사람들은 이처럼 깊고 맑은 하늘은 살아 생전 첨 봤다고 했다. 새벽같이 취재준비를 마친 김 기자도 맨 처음 본 것이 하늘이었다. 그의 뇌리속에 하늘은 푸른 거울 자체였다.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서 손가락으로 푹 찌르면 시퍼런 물이 폭포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미당은 이런 하늘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던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그런 하늘이 마치 살아 생전 큰 스님의 모습을 닮았음을 김 기자는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전날까지 세차게 불던 강풍은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리고 봄날처럼 따스한 햇살이 하루종일 내리쬔다.

“종정 스님께서는 가는 해에 숨을 거두시고 오는 해에 육신을 허공에 놓으시니 어제와 오늘이 따로 없고 전생도 없고 내생도 없는 마음을 주인 삼아 시時와 공空을 부리면서 살아라는 말없는 가르침에 온 사부대중은 이제 슬픔에서 벗어나 환희심으로 가득합니다. 가시는 듯 다시금 이 땅에 오셔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소서.”원로의장 법전 스님의 추도사가 끝나자 푸른 하늘과 따뜻한 봄날씨를 배경으로 3만여 명이 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관이었다. 김 기자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영결식 사상 최고로 많은 2천여 장
의 오색 만장들은 길라잡이가 되어 영결식장에서 다비장까지 이르는 2km에 이르는 길을 메우고 노란국화꽃 바탕에 연분홍빛 연꽃이 새겨진 운구차는 큰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법신法身을 삼라만상에게로 이끌었다. 3만여 명의 사부대중이 한몸이 되어 움직인 그 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몸을 버리고 본체만 그대로 드러낸 가야산의 나목들도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바라봤다. 연화대에서는 큰스님의 법신을 다비할 오색 영롱한 연꽃 한 송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돔형의 연화대 주변에는 1만 5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거화擧火” 불꽃이 일었다. 연꽃이 하늘을 향해 만개滿開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셔텨를 정신없이 누르던 김 기자의 손끝이 무뎌졌다. ‘누가 저들을 이 곳에 모이게 했는가.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 염원하는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튿날의 연화대도 마찬가지였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하늘에서 다비장의 불꽃이 사그라들던 새벽 5시부터 하늘에서 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다비장을 지키던 상좌 스님들과 사람들이 서둘러 연화대 주위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아침 9시경 습골拾骨이 끝나자마자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20년 넘게 스님과 함께 수행해오던 재가보살들 사이에서 ‘다 스님의 덕화德化’라는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김 기자는 그 말을 지금까지 무심코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8일간 이상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됐다.
첫 연락을 받은 날도 마찬가지였다. 2001년 12월 31일. 한 해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전라도 먼 암자에 예약을 해둔 김 기자의 뇌리에 불현듯 핸드폰을 켜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음성사서함에 남겨진 메시지들이 여럿 있었다. “휴가중인데 누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김 기자! 종정 스님 열반하셨다. 연락 받는대로 취재 준비해서 내려가도록….” “김 기자, 나 ○○인데 우리 스님 열반에 드셨다. 해인사로 좀 내려와 줘야겠어….”스님의 열반소식이 전국에 전해진날 하늘에서는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한여름밤처럼 주먹만한 소나기가 내렸다. 그리고 그 비는 곧 진눈깨비가 됐다. 하늘의 ‘천기’를 아는 스님들은 이를 두고 “큰스님의 열반을 삼라만상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큰 도인 스님이 가신 것을 삼천대천세계에 고하는 겁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건국사상 최초로 발표된 김대중 대통령의 조사弔辭도 눈길을 끌었다.
차를 몰고 어둠이 깔린 해인사 일주문을 빠져나간 김 기자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신화神話로 우리 곁에 남겨진 혜암당 성관 대종사를 생각했다. 다비식날 큰스님의 제자들은 입적 직전까지 계셨던 미소굴을 공개했다. 미소굴 방 안을 본 기자들은 아연했다. 방 안에 빛 바랜 회색좌복과 죽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닌가. 평생 이불과 베개가 필요없었다 한다. 호랑이와 싸웠고 잠을 쫓기 위해 쏟아지는 폭우를 맞아가며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를 오고갔다 한다. 몸에 뼈가 단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는데도 평생 장좌불와를 했다 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봉암사 결사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 혜암당 성관 대종사는 근현대 한국선불교에 우뚝 선 큰 산맥이었던 것이다. 그 산맥의 맑고 향기로운 향기가 우리를 불러모았고, 삼라만상을 감동시키는 이적異蹟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혜암 대종사는 이제 하나의 살아있는 신화로 남아 우리 곁에 남은 것이다.□